안에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그대
밖에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그대
살갗의 문지기
혈관 속의 방랑자
우리는 이 집의 아이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땅의 어른에게 땅을 밟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묵는 곳은 우리가 손님을 모시는 곳이다
그가 쉬는 곳은 우리가 여행자를 위해 매트를 펴 놓은 곳이다
살갗의 문지기여, 현관 너머에서 그대의 머리를 보자
깊은 곳에서 자맥질을 하며 그대의 머리로 표면을 가르는 ……
(아 오 레 니 코모 온레 마 웰레
아 오 레니 키 바아알레 마 텔레
수그본 비 아 팔레조 시 니 응그베
이비 아 테니 시 라라린조 응페힌 롤레
오니보데 아라, 야 아 마 테리 보데
아무쿤 오도, 야 아 마 요리 보데 ……)
아프리카의 병은 대체로 벌레에서 비롯되죠. 말라리아, 체체파리 등 아주 살인적인 풍토병은 거의 벌레가 옮긴 균 때문입니다. 그래서 치료도 몸에서 벌레를 내쫓는 것과 많이 연관되는데요. 위에 시(?)는 몸에서 벌레가 나오게 만드는 주문입니다. 실제로 이걸 외면 벌레가 서서히 몸을 웅크려 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규문에는 12월 초까지 모기와 함께 공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는 아프리카의 정신을 믿으며 이 주문을 한 번 계속 외워보렵니다.
“아프리카는 무엇일까?”
이번에 저희는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월레 소잉카의 <오브 아프리카>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인’ 중에서 ‘최초’를 따진다고 그동안 소외되었던 아프리카를 존중하는 건 아니죠. 오히려 소잉카는 이때 ‘아프리카’가 과연 무엇인지를 질문합니다. 아주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서 인용해볼게요.
“아프리카는 무엇일까? 이 용어는 어떤 것으로 구성될까? 나이지리아 정치인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조국을 두고 말한 것처럼, 단순히 지리적인 표현일까? 간단히 말해, 자신을 아프리카인으로 생각하고 일컫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주지일까? 특정한 피와 머리칼과 얼굴을 가진, ‘흑인’이라고 대충 정의할 수 있는 인종의 고향일까? 200년이 넘게 강제로 노동력을 공급한 약탈의 땅일까?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아프리카는 바다의 문제다. 곧 서쪽으로는 대서양, 동쪽으로는 인도양, 북쪽으로는 지중해가 있는 대륙이다. 그러나 그 광활한 대지에는 스스로릅 아랍인이라 생각하고 역사적ㆍ문화적ㆍ정치적ㆍ종교적으로 아랍 세계라고 알려진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스스로를 아프리카인이라 일컫는 사람들을 다른 인종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41~42)
우리는 아프리카를 철저하게 외부인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피부가 검은 ‘흑인’들의 나라로 보든지 약탈을 당한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나라로 보든지, 아니면 그저 ‘아프리카’라는 대륙으로 보죠. 그런데 소잉카는 이런 식의 아프리카에 대한 규정은 아프리카에 대한 현재의 어떤 문제도 포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지금 아프리카 대륙에서 문제가 되는 ‘아랍인’이란 정체성이죠.
여러 이슬람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랍’이란 이슬람을 문화로 삼고 있는 지역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아랍에 해당되는 지역이 아주 넓어요. 이슬람을 배울 때만 하더라도 중동보다는 조금 더 동쪽으로, 그러니까 아프리카 북부에 살짝 걸쳐 있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실제로 아프리카 곳곳에 스스로를 ‘아랍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이 꽤 크기 때문에 여러 나라들에서 정부를 구성할 때, 정책을 건의할 때 아랍인들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해요. 문제는, 아프리카의 아랍인들은 ‘꾸란에 위배된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자주적으로 정치하려는 정부의 여러 시도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자신을 ‘아프리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하고, 다른 ‘아프리카인’들이 어떤 민족적ㆍ정치적 문제를 겪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배타적 태도를 취할 때가 많습니다. 소잉카는 예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가 아프리카 내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아이러니함을 지적했죠.
소잉카의 얘기를 따라가면서, 여전히 저희는 아프리카를 막연한 하나로 뭉뚱그리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는 여전히 아프리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음을 다시 알게 됐습니다. 독립이 된다고 문제가 해결되고 꽃길만 걸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공격할 적이 분명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국경으로 인한 다른 부족, 국가에 대한 적대적 태도, 한 국가 안에서의 분열로 인한 구성원들 간의 배타적 태도는 독립 이전보다 더 심해졌습니다.
따라서 소잉카는 아프리카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 누가 어떤 아프리카를 얘기하는지에 먼저 주목하죠. 그의 시선이 외부자의 위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서발턴의 위치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소잉카는 아프리카인들이 느끼는 아프리카란 대서양, 인도양, 지중해 사이의 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미국, 아랍, 유럽인들이 침략하는 땅이자 그곳으로 널리 퍼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향이라는 거죠.
아프리카적 정신
아프리카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갖게 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프리카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에 대해서인데요. 단순히 아프리카의 아픔을 위로하는 건, 그들의 아픔을 특권화하는 동시에 문화적 상대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죠. 아프리카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잉카가 다시 확인시켜줬듯이,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어땠는가를 나열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현재의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진행돼야 할 작업이죠.
그런 점에서 ‘아프리카의 정신’을 되살리려 한 소잉카의 작업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때 아프리카의 정신이란 단순히 잃어버린 정신을 되살리는, 아프리카의 순혈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잉카가 말하는 아프리카의 정신이란 ‘우분투(ubuntu)’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잉카는 아프리카의 토착 신앙에 이러한 태도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그건 어떤 서방(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 못지않게 매우 세련되고 정교한 정신을 보여준다고 아주 힘줘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걸 읽는 저희도 생태적 사유란 이런 게 아닐까 하면서 감동을 공유했습니다.
“요루바족은 어떻게, 본질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이러한 요소(신들이 초월적으로 세상 밖에 있지 않고, 지상에 뿌리를 두며 살아간다는 인식)를 이해하고 일상적 의식에 통합시키고 세속적인 설계에 적합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일까? 밀폐된 것이 아니라 가스가 소용돌이를 치며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유동적인 세 가지 영역을 상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나는 조상들의 세계요, 둘째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요, 셋째는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다. 신들과 조물주들이 머무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과도기적인 소용돌이가 세 영역의 주변을 돌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 태어나지 않은 사람, 혹은 조상은 존재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는데, 우리는 이 과정을 주로 삶과 죽음을 통한 변화로 인식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그들의 활력을 이 과도기적인 공간에 어느 정도 분산시키며, 근원적인 에너지를 그곳에 다시 채운다. 그 흐름, 즉 과도기적인 힘의 소용돌이가 우주적인 의식에 대한 요루바족의 정의이다.”(206)
요루바족은 나이지리아에 위치한 토착 부족 중 하나인데요. 요루바족은 세 개의 세계가 중첩돼 있다고 현실을 인식합니다. 세 개의 세계를 통해 요루바족은 이곳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실존을 그 자체로 긍정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탄생은 지금 우리를 있게 한 조상들의 돌아옴이기 때문입니다. 소잉카의 표현을 빌리면, 요루바족은 부재(不在)를 보존합니다. 아이의 탄생은 조상의 ‘돌아옴’이에요. 즉, 단순히 조상 숭배가 아니라 “조상의 세계, 산 자의 세계, 태어나지 않은 자의 세계가” 한 치의 간극도 없이 엮이는 거죠. 저는 여기서 요루바족의 스케일에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 앞으로 이곳에 살게 될 모든 이는 ‘아프리카인’, 나와 같은 조상을 공유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피부색이나 문화 같은 몇 가지 지표로 공동의 사회를 확인하는 저희와 달라도 너무나도 다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아프리카가 지배 당할 만한 야만적인 곳이라는 얘기가 얼마나 엉뚱한 말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소잉카는 아프리카의 모든 것에 향해 열려 있는 '부재'-돌아옴의 정신이 세계적으로 전염된 배타주의를 넘어가게 할 핵심 사유가 될 것이라고 했죠. 그동안 철저하게 배제되고 외면 당한 아프리카가 모든 세계적 사건의 중재자 같은 자리에 올라설 때, 아프리카의 정신이 세계에 어떤 식으로든 알려질 때, 소잉카는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실제로 왠지 그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아프리카의 정신을 좀 더 확장해 보면, 자신이 놓인 구체적인 땅과의 교감하는 종류의 정신은 근대 이전 공동체 여기저기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류의 토착 신앙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고요. 꼭 아프리카의 정신만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저희는 저희의 자리에서 대지와 교감할 수 있는 종류의 사유를 몸에 붙이면 될 것 같아요. 여기서부터는 이제 각자의 숙제로 남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유를 배워 나가야 할지, 아프리카를 보고 다시 또 저희의 공부를 돌아보게 됩니다..!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있었지만, 한없이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이 정도만 정리해야겠습니다. ㅋ 다음 시간에는 아모스 투투올라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읽습니다. 이번에 하신 것처럼 각자의 키워드를 잡고, 이런저런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메모해오시면 됩니다~
불면을 아프리카 소설로 보낸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아프리카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모두를 놀라게 했지요.
아프리카의 영성과 종교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프리카 종교중 하나인 오두사교의 신은 명령하는 자가 아니라 안내하는 자라는 이야기,
고정된 법리를 전하는 신이 아니라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변용하는 미완의 신이었습니다.
아프리카는 인간 사유의 보고이자 너무나 현대적이고 세련된 사유를 가지고 있었어요. 감동적인 세미나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