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읽었습니다. 소설을 읽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만 ^^;; 아프리카의 역사(Historie)에서 볼 수 없었던 이야기(historie)는 볼 수 있었습니다. 왜 큰 줄기의 역사만이 아니라 소설 같이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역사도 같이 읽어야 하는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모스 투투올라의 <야자열매술꾼>을 읽어 옵니다~
평화로운 아프리카는 없다
아프리카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유럽이 아프리카-흑인을 노예로 삼은 부분에서 격분하게 되죠. 그런데 그들의 부당한 침략과 수탈을 강조하다 보면, 마치 유럽인이 오기 전 아프리카는 살기 좋았던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모든 구성원이 100% 만족했던 유토피아 같은 사회는 없었습니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미개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그 안에서 착취나 폭압 같은 게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들의 정치 기술이 교묘하고 사유가 세련됐다고 해도 거기에도 배제된 자들,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이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전에도 그랬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유럽인이 오기 전, 공동체 안에서 어떤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작품은 ‘오콩코’라는 인물의 행적을 따라 서술됩니다. ‘오콩코’는 지금의 나이지리아에 있는 ‘우무오피아’라는 지역에서 가장 용맹하고 위대한 남자입니다. 다른 마을과의 씨름이나 전쟁에서 가장 앞장서서 활약했으며, 또 매우 부지런하게 일하기 때문에 부족민들의 선망과 신랑감 1위로 여겨지죠. 그러나 오콩코에게는 하나의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바로 유약하고 게을렀던 아버지처럼 무능한 남성으로 평가되는 것이었는데요. 이건 사실 오콩코뿐만 아니라 우무오피아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된 생각이었습니다.
‘아그발라’라는 토착어는 ‘여자’를 의미하는데요. 또한 아무런 칭호가 없는 남자에게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어떤 남성에게 ‘아그발라’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매우 모욕적인 말로 평가됩니다. 오콩코는 이미 다수의 칭호를 보유하고 있었고, 칭호를 보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그발라’라고 놀리면서 자신의 권위를 확인했죠.
그런데 모든 남성이 이러한 모멸적 언사를 감수하고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족의 고유한 관습으로서의 젠더적 질서, 신으로부터의 계시를 의문시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는 부족이 규정한 남성이 되어야 하는가?’, ‘왜 신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나의 쌍둥이 아이들을 버려야만 하는가?’ 같은 질문들이 나오기 시작했죠. 오콩코는 부족이 규정한 남성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인정받는 것에서 만족했죠. 하지만 그의 장남 ‘은워예’는 부족이 규정한 남성이 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죠. 그래서 그는 나중에 기독교를 전파하러 온 선교사들에게 가장 먼저 교화된 젊은이가 됩니다. 그리고 은워예를 비롯해서 부족의 전통 문화에 억압되었다고 느낀 사람들도 차츰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아래 인용문에는 이때 사람들이 왜 기독교를 따르게 됐는지 그 심정이 간략하게 드러나죠.
“그를 사로잡은 것은 삼위일체의 이상한 논리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새로운 종교의 시, 뼛속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둠과 공포 속에 앉아 있는 형제들에 대한 찬송은 이 젊은 영혼을 괴롭혀 온 막연히 계속되는 의문에 답하는 것 같았다. 숲 속에서 울고 있는 쌍둥이와 죽은 이케메푸나에 대한 문제였다. 찬송이 그의 목마른 영혼에 쏟아지자 마음 깊숙이 어떤 위안을 느꼈다. 찬송의 노랫말은 헐떡이는 대지의 메마른 입술에 언 빗방울이 떨어져 녹는 것 같았다. 은워예의 어린 마음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174)
기독교가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이미 토착 문화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인 거죠. ‘아프리카의 역사’를 얘기할 때, 확실히 유럽인들이 오지 않았다고 해서 낭만적으로 과거를 미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균열은 배제된 자들만이 아니라 가장 엘리트적이라고 할 수 있느 오콩코도 겪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그 다음은?
책 제목이기도 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 있습니다. 우선 오콩코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는 아프리카의 마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죠. 스포를 하자면, 우무오피아의 가장 영예로운 남성이 될 수 없었던 오콩코는 마지막에 자살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영화 <헤어진 결심>의 표현을 빌리면, 오콩코의 붕괴는 마지막에만 일어났던 건 아닙니다. 초반부에서 그의 양아들 아케메푸나를 죽이는 순간에도 일어났었죠.
마을의 무당 오구구가 아케메푸나를 죽여야 한다고 해서 그 말을 따르려고 했지만, 정작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건 오콩코에게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족의 영예로운 남성이 되기 위해 오콩코는 자신의 도끼로 아이를 죽였죠.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회복되기 전까지는 전혀 영예로운 남성답지 않게 무기력했죠.
“목소리를 가다듬은 남자가 다가와 도끼를 치켜들자, 오콩코가 눈을 돌렸다.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단지가 떨어져 망 위에 부서졌다. 오콩코가 이케메푸나에게 달려 나가자 “아빠, 사람들이 날 죽여요!”라는 외침이 들렸다. 두려움에 휩싸인 오콩코가 자신의 도끼를 빼 소년을 내리쳤다. 그는 자신이 나약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두려웠다.”(76)
“이케메푸나가 죽은 다음 이틀 동안 오콩코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야자주를 마셔, 꼬리를 잡혀 바닥에 내팽개쳐진 쥐의 눈처럼 눈이 벌겋고 섬뜩했다. (…) 오콩코는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이케메푸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생각이 났다. 한번은 침상에서 일어나 집 주변을 걸어 보았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조차 없었다. 마치 술 취한 거인이 모기 다리로 걷는 것 같이 느껴졌다. 가끔은 머리에 싸늘한 경련이 와 몸 아래로 쭉 퍼졌다.”(78)
하지만 아무리 균열을 겪었다고 해도 오콩코는 우무오피아의 남성이라는 정체성 속에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회복할 수 없었던 건 우무오피아가 더 이상 그가 기억하는 곳이 아니게 되었을 때였죠. 반면에 그의 아들 은워예에게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것은 새로운 출발점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출발점이 어떤 출발점일지는 상상의 영역에 있지만, 적어도 기존의 부족적 전통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 치누아 아체베의 자리 또한 이와 비슷합니다. 그는 영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병합된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의 아래에서 전형적 엘리트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서구인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 또한 ‘검은색’의 피부를 가진 흑인으로 경험한 차별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미 서구의 교육을 받아버린 아체베는 이전의 아프리카 전통 문화만을 ‘선’으로 간직하는 전통적 아프리카인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서구의 가치도, 아프리카 전통 문화의 가치도 깨진 자리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제목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아프리카 전통 문화, 공동체의 파괴를 뜻하는 동시에 새로운 세대가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저희에게도 필요한 건 이런 사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 기후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인간’의 범주가 어디까지 확장될지도 모르는 등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데요. 어떤 것이 새로 생기고, 기존의 것이 해체되든 간에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사유하는 힘이 필요하겠죠. 그걸 못할 때 우리는 오콩코처럼 목을 매다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고요. 아프리카의 역사가 지금 우리의 일상으로도 밀려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