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를 공부하고 있지만, 문명을 공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도시는 어떻게 생기는지,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는지, 어떤 동물들이 길들여지고, 어떤 이기(利器)들이 발명되고 사용됐는지 등등 문명의 발생과 발달 그리고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여러 문명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덕분에 <주역>에서 우물이나 제기, 여러 동물들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하는지 그리고 팔괘의 각각이 왜 그러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게다가 지금과 너무나도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어떤 문명에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정보를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생각할 거리가 참 많아요. 아프리카를 더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고 알게 됐으면 좋겠네요.
다음 시간 9월 8일은 쉬고, 9월 15일에 8주차 세미나를 진행합니다. 책은 5부를 읽어오시면 되고요. 요즘 선생님들 일이 많으셔서 그런지 다들 컨디션이...ㅠ 한 주 충전하시고, 회복해서 만나요! 간식은 영님쌤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주제 두 가지만 정리하는 걸로 공지를 마칠게요.
“문명의 발상지”라는 허구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세계 4대 문명’이라는 게 있다고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 같습니다. 다른 문명들보다 앞서고, 이후 문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4개의 원조(?)격 문명이 있다는 건데요.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구분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명의 오래됨을 기준으로 나열한다면 수메르 문명만이 최초의 것으로 꼽혀야겠죠. 하지만 실제로 수메르 문명이 끼친 영향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아무리 넓혀도 아프리카 북부에서부터 북인도까지죠. 그리고 그 영향이란 것도 문명이 발생하거나 발달하기 위한 핵심 요인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수메르 문화가 유입되더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금방 폐기했죠. 다른 문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문명에 영향을 받더라도 그건 꼭 4개의 문명으로만 한정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세계 4대 문명 같은 분류를 굳이 믿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러한 분류에는 그곳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문명을 발생시킬 수 없다는 위계적 시선, 어딘가에 있을 근원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보입니다. 존 리더가 아프리카의 역사를 이해할 때 강조한 태도도 바로 이것입니다.
“나일 강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전달된 문명적 흐름의 통로로 보는 견해는 기본적으로 아프리카 역사에 대한 유럽 중심주의 시각이다. 그 견해는 아프리카인들이 스스로 자체적인 문명을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력적인 단순화지만 증거와는 상충한다.
사실 이집트인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주민의 관계는 약탈자와 피약탈자 이상이 아니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인간을 포함해) 나일 강 무역에 필요한 온갖 교역품을 제공했다. 아스완과 하르툼 사이의 강변에 살던 누비아인은 분명히 나일 강 유역을 이집트와 북부의 흥미로운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여겼겠지만, 아프리카 전체로 볼 때 나일 강은 골목이었다.”(243~244)
아프리카 북부 현재 이집트에 해당하는 곳에는 나일 강이 흐르고, 나일 강 상류에 이집트 문명이 발생했죠. 학자들은 오랫동안 나일 강을 통해 이집트 문명이 전파됐을 거라고 추측했는데요. 실제로 고대 이집트 왕국이 나일 강을 타고 내려가기 전에 이미 ‘누비아’라는 또 다른 왕국이 있었습니다. 인용문에서는 이집트의 강함만이 부각됐지만, 사실 이 둘은 역사적으로 꾸준히 시소처럼 싸우면서 대립해왔습니다. 누비아가 이집트를 약탈할 때도 있었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명들 간에 세력도보다 부모나 원조에 해당할 만한 문명 같은 게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스피노자적 관점을 빌려오면, 문명도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실재하는 하나의 사물입니다. 따라서 어떤 쇠약한 문명도 어떤 다른 강성한 문명과의 관계에서 단순히 영향받을 수 있는 수동적 입장만 취할 수 없습니다. 영향을 받더라도 자신에게 적합하도록 그것을 변형시키죠. 운송, 목축 같은 기술부터 종교, 심지어 역사까지 자신들의 방식으로 취했죠. 사실 이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이미 지형과 기후, 서식하는 생물 등이 너무나도 다르고, 어떤 발달된 문명도 자신이 적응한 것 이상을 예측하면서 발달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가령, 시원하고 습한 곳에서 발생한 문명이 건조하고 후덥지근한 곳에 통용될 수 있는 기술을 갖추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적용될 수 있는 기술이 미리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기술이 적용될 수 있도록 변형하는 작업이 먼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모든 문명에게 통용되는 이야기인지는 좀 더 공부해야겠지만, 일단 아프리카는 이런 식으로 변형하는 데 있어서 매우 능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일 강을 통해 문명이 전파됐다’는 발상은 이러한 능동적인 면모를 모두 배제하고, 외부에서 더욱 뛰어난 문명이 아프리카에 전파됐다는 관념을 전제합니다. 서양학자들의 이러한 전제에는 사실 매우 제국주의적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자생적으로 문명을 발생시킬 능력이 없었다고 얘기하는 순간, 이집트 문명도 그보다 앞선 외부의 수메르 문명에 의해 전파된 것으로 간주되고, 현대에 와서는 아프리카를 식민화시키는 논리를 완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 고고학적 결과물은 아프리카에서 자생적으로 문명이 발생했음을 말해줍니다. 즉, 아프리카인들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기술을 발명하고, (자연발생적으로 모일 수 있는 최대 단위인 150명 이상의) 거대 규모의 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죠.
“아프리카 전역으로 이동한 것은 물자였지 상인이 아니었다”
초기 공동체의 정치는 수직적이기보다 수평적이었다고 합니다. 각자 자신이 생산한 것을 탐욕스럽게 차지하려고 하면, 그것을 예방하고 모두에게 골고루 자원이 분배되도록 정치가 기능했다는 것이죠. 그 역할을 집단 내 연장자로서의 장로나 혹은 지혜롭고 책임 있는 자로서 추장이 맡았습니다. 이러한 정치성은 매우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좋은 의도나 성숙한 인격, 평화에 대한 애정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렇잖아도 인구와 환경의 제약을 받고 있는 공동체들이 대규모 분쟁으로 인력, 시간, 무기를 잃는 사태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330) 반대로 식인이나 폭력, 약탈처럼 지금 우리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문화도 그들이 ‘야만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발명된 기술로 이해해야 합니다. 역사에서 ‘좋은 인간’, ‘나쁜 인간’을 찾는 것만큼 유치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역사를 공부할 때는 인간적인 것에서 벗어난 관점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저희가 읽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의 저자 존 리더는 그러한 관점을 익힌 역사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독특함은 사물에 입각해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자급자족-지역 무역에서 벗어나 더 멀리 무역을 하고, 더 큰 사회를 건설하게 된 것도 여러 사물에 의해 일어난 복합적 결과로 파악합니다. 인구 증가에서 오는 압박, 소금에 대한 필요(그런데 소금은 식량 생산이 가능한 곳에서 채취가 불가능),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낙타의 등장 등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거주지를 찾아서 떠났던 사하라 사막으로 다시 향하게 됐던 것도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죠. 이렇게 보면, 스피노자가 지적했던 것처럼 사람의 의도나 목적은 항상 결과적으로 규정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내용은 '지역무역에서 더 벗어나 멀리 무역했다고' 되어 있는데, 제목은 상인이 아니라고 하니 좀 이해가 안되네요. 그러면 아프리카에서는 상인이 이윤을 얻고자 모험을 시도하거나 화폐가 없었나요?
모험을 시도하는 상인이나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부족들에도 통용되는 화폐가 있었지만, 그러한 상인과 화폐 이전에 물자의 출현이 있었고, 그게 상인으로 하여금 더 멀리 나아가고 화폐가 발명되도록 추동한 요인이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