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로 나눈 거긴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1권을 다 읽었네요! ㅋㅋ 두꺼운 책을 읽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유니크한 공부를 한다는 뿌듯함이 있습니다. 이 공부의 마침표를 어떻게 찍을지는 차차 생각하더라도, 일단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역사를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은 점점 뚜렷해집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위해서라면, 부담스럽지만, 이걸 강의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강의해야 할까요! 선생님들도 저와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ㅋ 이번에 잘 마무리해보죠!
다음 시간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2권의 6부를 읽어 옵니다. 그리고 각자 어떤 지도를 그릴지 이제 정하고, 다음 시간부터는 각자의 정리된 내용을 발표해야 해요~
‘지도 그리기’에 대해서
마무리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정리하고 가죠. 지난 시즌에는 ‘지도에 대한 감을 익히자’는 목표로 세계지도를 그렸죠. 덕분에 지금 우리가 보는 지도가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알 수 있었는데요. 이번 시즌에는 ‘어차피 지도 그리기가 왜곡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면, 지금껏 누구도 왜곡하지 않은 방식으로 더 왜곡하자! 다만 우리의 상식적 관념을 비트는 식으로 왜곡하자!’는 게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 누군가에게 아프리카를 소개할 때 자신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 우리가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키워드를 뽑아오자고 했죠. 그렇게 정리가 된 게 몇 가지 있습니다.
(1) ‘가장 오래된 대륙’.
세계 최대 매장량과 생산량을 자랑하는 아프리카. 서양의 국가와 기업은 오랫동안 아프리카를 착취하면서 상업적 이익을 올려왔죠. 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대표적 사건 하나를 연표로 정리하고, 지도로 가시화하기가 목표인 지도가 있습니다.
(2) ‘지그재그 국경선’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유례없이 인위적인데요. 유럽이 무책임하게 아프리카를 해방하면서 멋대로 설정한 것도 있지만, 민족적 분할에 따른 것도 있고, 하여튼 매우 복잡해요. 어떤 나라가 언제 세워졌는지 연도별로, 그리고 시기별로 정리하다 보면, 아프리카의 국가가 대략 어떤 흐름에 의해 성립됐는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 이걸 이우가 한다고 했었죠?
(3) ‘노예 무역의 메카’
이건 제가 쓰고 싶은 주제인데요. 방대하긴 하지만, ‘노예 무역’보다 더 아프리카의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을까 싶습니다. 아프리카의 노예 시장은 오래전부터 생존을 위해 고안된 문화적‧정치적 결과물이었고, 근대를 관통하면서는 유럽과 미국에게 착취당한 대표적 상품이었죠.제대로 아프리카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하나의 생존기술로 사용되었던 역사와 유럽‧미국인들에 의해 착취당한 역사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아프리카 중심의 세계 지도’
아직까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그린 세계지도가 없습니다. 크게 유럽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중심으로 그린 것, 날짜변경선을 중심으로 그린 것, 미국을 중심으로 그린 것 이렇게 3종류가 있는데요. 어떤 지도도 아프리카의 제대로 된 위상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중심으로 하면 경도는 맞지만, 위도는 너무 오차가 심해집니다. 어쨌든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제대로 세계지도를 그려보면, 분명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모습이 보일 것 같아요.
(5) ‘예측 불가능한 지형’
아프리카의 지형은 사막, 사바나, 삼림 등 아주 다양합니다. 그러한 기본적 지형을 숙지하지 않으면 여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하는 게 힘들어요. 왜 아프리카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동서남북 나누어야 하는지도, 지형을 이해하면 알 수 있습니다. 아직 어떤 지형을 어떻게 볼지는 좀 더 정리가 필요하지만요!
이 중에서 서둘러 챙겨가시거나 아니면 다른 주제를 가져오셔도 좋습니다. 아마 어떤 주제를 잡느냐에 따라 아프리카를 확대해서 그릴 수도 있을 거고, 아니면 세계지도를 그릴 수도 있겠죠. 아프리카를 소개할지에 따라 어떻게든 그릴 수 있습니다. 기대되지 않나요? ㅎ
인종차별의 기원
아프리카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 중에 계속 반복되는 논쟁 중 하나는 노예무역에 관한 관점입니다. ‘대서양 노예 무역은 아프리카의 문화‧정치가 그것에 의존적이도록 만들었다’vs‘아니다. 노예 무역의 파급력은 대단했으나,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확산되었으므로 아프리카 사회를 변화시켰다고 볼 수 없다’. 어느 주장이 맞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저희가 지난번에 읽은 <아프리카의 역사>의 저자 존 아일리프 같은 경우에는 후자에 가깝고, 이번에 읽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의 저자 존 리더는 전자의 주장을 채택합니다. 일단 지금까지 두 주장은 서로 접점도 없이 대립할 정도로 증거가 둘 다 명확하다고 합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두 주장을 아우르는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단 저희는 존 리더의 책을 읽고 있으니 그의 주장을 따라 노예 무역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 리더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눈물은 대서양 노예 무역을 기점으로 시작됐습니다. 아마도 “1502년 이전이었던 것은 확실하다”고 하는데요.(475) 포르투갈의 엔리케가 1430년부터 아프리카를 탐험하기 시작한 걸 생각해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리카인들의 운명이 확 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이 아프리카에 깃발을 꽂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나름 대등한 관계에서 무역을 진행하다가 나중에는 ‘노예가 아니면 너희들과 거래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강압적으로 나왔죠.
문제는 이런 식의 위계적인 관계가 근대 아프리카 국가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입니다.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는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시장에 불과했고, 흑인은 그저 상품일 뿐이었습니다. 덕분에 처음부터 인종차별적 시선이 있었던 건 아닌데, 노예 무역이 진행될수록 점점 확고해졌죠. 이 시선은 노예 무역이 폐지될 때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됐기 때문에, 당연히 극복하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초반, 실제 일상적 변화와 무관하게 갑자기 제도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자는 흐름이 만들어졌습니다. 책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단순히 인권의 신장이나 아프리카인을 동등하게 보자는 선언 때문이 아니라(그건 한 세기 뒤인 20세기에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인들과 같은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인종차별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죠. 즉, 흑인들과 같은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배타적 시선이 흑인을 해방시키는 제도에 힘을 실어준 것이죠. 실제로 흑인들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같은 곳으로 해방됐습니다. 물론 다시 대서양으로 건너 아프리카로 돌아오게 됐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해방된 노예들은 본인을 토착 흑인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인종차별의 문제가 피부색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정치적 관계망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죠.
“프리타운이라는 명칭은, 영국과 미국이 각각 1807년과 1808년에 노예 무역을 금지한 이후 노예무역선을 단속하러 서아프리카의 해안을 순찰하던 영국 함대가 노예들을 해안에서 풀어준 데서 생겨났다. 고향은 다양했으나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해방 노예들은 자체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토착 주민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자부했다. 실제로 그들은 영국의 권유를 받아 노예가 되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신속하게 그리스도교, 문자, 교육을 발전시켰다. 거기서 비롯된 사회적 차이는 결국 시에라리온의 정치적 미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라이베리아도 같은 길을 걸었다.”(470)
“만약 아프리카가 침략당하지 않았더라면?”
아프리카의 역사를 설명할 때, 대체로 두 가지 관점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 서문에서 남경태 선생님도 지적하긴 했는데, ‘유럽의 주변부로서의 아프리카’와 ‘유럽에 의해 수탈당한 아프리카’가 그 두 가지죠.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유럽을 중심으로 아프리카를, 혹은 아프리카의 아픔을 실체화한 것이라서 자칫하면 너무 일방적 이야기를 쓸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고 이 두 가지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아프리카의 역사를 말하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저희가 읽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는 이 두 관점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고는 하는데, 이번에 읽은 바에 따르면, 후자의 관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어쨌든 존 리더는 유럽인들의 수탈이 없었어도 아프리카인들이 자체적으로 문명을 발명해온 것처럼, 근대 문명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유럽이 간섭하지 않았더라도 아프리카는 토착 역량에 기반해 성장할 수 있었을 테고, 독자적인 경로를 걸어 현재까지 왔을 것이다. 밖으로부터의 본보기보다 안으로부터의 동력을 바탕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15세기에 그 계기를 놓쳐버렸고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그때부터 아프리카의 역사는 고대의 대륙과 그 주민들이 현대인의 자만을 수용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그 현대인의 조상은 10만 년 전 고향을 떠났으나 500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마치 그곳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했다.”(458)
분명 유럽과 미국은 아프리카에 되돌릴 수 없는 흔적을 새겼습니다. 시에라리온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여러 광물 약탈과 노예들을 무책임하게 해방시킨 것, 나이지리아에서의 원유 생산 과정에서 일어나는 환경 오염 등 읽으면서 이게 사람인가 싶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난 것과 별개로, 어떤 외부적 압력 없이 문명의 성장을 그리는 게 가능한가도 싶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어떤 문명도 외부와 아예 단절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문명들, 가령 이집트나 중국을 보면, 누비아 같은 이웃한 문명과의 갈등이나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략 속에서 자신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전쟁과 침략의 경로가 곧 문명 간의 교류가 일어나는 경로이기도 했습니다. 외부와의 교류 속에서 수정하고 형성되는 것이 문명의 기본적 속성이라면, 유럽과 미국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상상하는 건 오히려 아프리카의 아픔을 대상화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아픔을 대상화하지 않고 어떻게 아프리카의 역사를 말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존 리더가 보여준 것처럼, 아프리카의 아픔은 분명히 있었고, 현재진행형으로 새겨지고 있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를 참고하면, 노예 무역의 탈을 벗었을 뿐이지 아직도 경제적 수탈이 진행되고 있더라고요. 여기서 저의 생각은 막히는데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어떤 사건을 조명하는 식으로 역사를 그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에 이러저러했다면’ 같은 식의 가정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런 작업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면 너무 무책임할 것도 같아서요. 음... 이 부분은 지도 그리기와 연결해서 좀 더 고민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