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이너 세계사도 거의 끝이 보입니다. 올 초에 ‘지도 그리기’로 어떻게 공부할까, ‘지도 그리기’가 공부가 될 수 있을까 저도 반신반의했는데요. 지금은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방식인 것 같아요. 다만 어떤 지도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 어떤 효과를 노릴 것인지 계속 고민해야겠지만요. ‘지도’ 자체에 대한 세미나를 해봐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듭니다. ^^;;
다음 주에는 마지막 8부를 읽고 옵니다. 그리고 채운쌤의 세계사에 대한 강의가 있습니다. 일정은 1시간 <아프리카의 역사>, 1시간 지도 점검, 2시간 채운쌤 강의로 진행될 계획이에요. 참고해주시고, 그럼 다음 주에 만나요~ 간식은 현주쌤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또, 우리의 결과물 지도 그리기를 위해 각자 준비해 와야 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죠? 이우는 아프리카 각 국가들의 독립 선언과 정부 수립일, 빈형은 ‘다이아몬드’ 채굴지와 그곳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서양의 기업들/ 희망봉의 지정학적 의미, 현주쌤은 여러 지형도(생태적 조건, 대표적 지형 등), 영님쌤은 ‘식민주의’ 같이 아프리카에 덧씌어진 여러 오해들을 정리해 와주세요. 그럼 마지막까지 마무리 잘 하죠!
선한 의도를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합법적’으로 서양인들이 아프리카에 깃발을 꽂기 시작한 이야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존 리더의 구분에 따라 우리는 아프리카가 어떤 과정을 거치며 침략당했는지를 자세하게 알 수 있죠. 그런데 어찌 하나같이 경악스러운지 모르겠어요. 특히 이번에는 유럽의 ‘좋은 의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볼 수 있어서 더 경악스러웠고요.
1885년 5월 벨기에의 왕 레오폴 2세는 콩고 자유국을 차지한 것에 대한 국제적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벨기에의 왕이자 콩고 자유국의 군주라는 두 개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죠. 이때 레오폴 2세는 ‘국제아프리카협회’, ‘국제콩고협회’ 같은 것을 세웠는데, 매우 그럴듯한 이 회사는 사실 자신의 회사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국제적 여론은 레오폴 2세가 선한 의도로 아프리카를 원조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바보였기 때문이라기보다 아프리카를 차지하는 게 자신들만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정말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876년 브뤼셀에서 열린 지리학 학회에서 레오폴 2세가 연설한 일부에 그게 잘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인도주의를 애호하는 분들의 관심을 촉구할 만한 중대한 사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계에서 아직 문명이 침투하지 못한 지역을 문명의 길로 인도하고, 많은 인구를 감싸고 있는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이 진보의 시대에 걸맞은 십자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십자군을 지지하는 공공의 원망이 대단히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무척 기쁜 마음입니다. 시대는 우리의 것입니다.”
여기서 “인도주의”, “문명의 길로 인도”, “진보의 시대에 걸맞은 십자군” 같은 단어들이 특히 눈에 띄었는데요. 지금 이 사람들은 자신의 문명화가 정말로 좋은 것이고, 그것을 위한 피해는 ‘아프리카인들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관점에 전제된 계몽주의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매우 손쉬운 논리라는 걸 다시 알게 됐습니다. 철학적, 역사적으로 계몽주의는 단순히 위계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얘기할 수 없지만, 정치적으로는 분명 폭력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레오폴 2세는 콩고를 아주 제대로 착취하는데, 그 결과 레오폴 2세는 아주 많은 돈을 벌었고 콩고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아주 황폐해졌죠. 현지 초병들을 압박해서 폭력을 써서라도 할당량을 채우도록 강제했고, 초병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어떤 폭력을 쓰더라도 용인한 것은 분명히 레오폴 2세를 비롯한 ‘선한 의도’를 가진 백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잡음의 원인을 ‘콩고에 사는 원주민의 관습 탓’으로 돌렸고, 계속해서 인종적 차별이 견고해지도록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이 공작이 실제로 잘 먹혀 들어서 개혁가들이 직접 가서 비극을 사진으로 찍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분별한 고무 자원의 착취는 콩고 전역의 조차지에서 되풀이되었다. 최대의 수익은 벨기에와 레오폴의 몫이었고 대가를 치른 것은 콩고였다. 단지 환경 파괴의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인력 손실도 컸다. 사회적 붕괴와 파괴 속에서 학대, 만행, 살인이 자행되었다. 초병들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주민들을 상대로 온갖 범죄를 저질렀고 사리사욕에 눈이 먼 직원들은 그 범죄를 용납했다.
공코 자유국의 인권 학대는 1890년대 초에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여론은 여전히 레오폴 2세를 관대한 박애주의자로 보았다.
(…) 그 가운데 한 끔찍한 사진은 은살라라는 남자가 선교사 집의 현관에 앉아 슬픈 기색으로 앞에 놓인 작은 손과 발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로 그의 다섯 살짜리 딸의 손과 발이었다. 그의 아내와 아들, 딸은 함께 초병들에게 살해되고 사지가 잘리고 조리되어 먹혔다.”(683, 685)
근대 문명의 세례가 불러온 것
아프리카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지그재그 국경선입니다. 이 국경선을 유럽이 그었단 것은 대부분 알겠지만, 정확히 언제, 어떻게 그어졌는지는 대체로 모를 겁니다. 왜냐하면 저도 몰랐었거든요. ㅋ 언제 이런 식으로 국경선이 갑자기 세워진 건 아닙니다. 대략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약 40년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주인 없는 땅’인 아프리카를 차지하기 위해 유럽이 아프리카 내륙을 식민지화했고, 국경선은 나중에 이때의 경계선을 기점으로 형성됐습니다.
문제는, 유럽인들이 국경을 나눌 때 아프리카 사회의 독특한 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인들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식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정교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는데요. 유럽인들이 세운 국경선은 이러한 문화적 구분을 모두 다 무화시켰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177개의 민족적 ‘문화 지역’이 국경선으로 갈라져 있다. 모든 육상 국경선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 문화 지역을 가른다. 나이지리아-카메룬 국경선은 14개를 가르며, 부르키나파소의 국경선은 21개를 가른다. 그러나 이 분할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혈족, 민족, 경제적 연계가 국적의 소속감보다 훨씬 더 크다.”(720)
이때 철도가 세워지고, 학교나 병원 같은 근대적 문물이 도입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하지만 대등한 외교관계에서 아무리 요청해도 응해주지 않았던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문화를 도입하고 그 혜택을 보더라도 이미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어떤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이런 혜택을 준 나라들을 위해서 싸우기도 했죠. 그 결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인들을 위해 대리 전쟁을 수행했죠. “가나인과 다호메이인은 토고인과 싸웠고, 나이지리아인은 카메룬인과 싸웠으며, 서아프리카인은 배로 대륙 여러 곳에 수송되어 케냐인과 합동으로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싸웠다.”(758) 어떻게 보면 아프리카인들에게 내려진 근대 문명의 세례는 그저 쾌적한 일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아프리카인들과 싸워야만 하는 동기였을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