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가 끝나간다. 아프리카에 대해서 잘 안다고는 못하지만 그들의 다양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와 비슷하게 식민지도 겪었고 독립도 했다. 책을 읽으며 우리의 현대사가 떠오르고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었다. 마지막 8부는 자유의 첫걸음 1900년대 이후에 일어난 아프리카 상황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부족간에 내전이 있고, 불안정한 상황이다.
엘리트의 형성:“교육은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도록’ 자극했다. 해외에서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을 만큼 여유 있는 아프리카인은 해외의 정치 활동가와 접촉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꿈꾸게 되었다. 그들의 수는 적었으나 교육은 아프리카 엘리트와 다수 대중 사이의 간격을 매우 넓게 벌려놓았다.”(<아프리카 대륙의 연대기>781쪽>
가봉의 평족은 갓난아기를 씻을 물에 예전에는 창을 담갔지만, 지금은 연필을 담을 정도로 교육을 중요시한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도시에서는 다양한 기회가 주어졌다. 농촌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났다. 교육받은 농촌 사람들의 이농으로 아프리카 농촌 공동체는 교육의 단기적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영국 식민지 행정부에서 1927년에 최초로 대학을 아프리카에 설립했다. 교육의 내용은 유럽의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프랑스의 식민지에서도 조상은 갈리아인이라고 배웠다. 이런 교육으로 아프리카 현실 사이의 모순이 점점 커졌다.
교육의 기회는 매우 소수에게만 가능했다. 교육받은 소수는 재능을 더 발전시키려면 해외로 나가야만 했다. 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과목은 법학이라고 추측된다. 그것도 식민지 행정부가 사회정의의 토대가 된다고 보는 인권과 재산권에 강조점을 두는 유럽의 법학이었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아프리카인 중에서 해외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엘리트라면 제안과 견해를 표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과제는 자치와 국가 독립이었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직후에 레닌은 모든 식민지 민족을 지원한다고 약속했다. 소련이 보기에 아프리카는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기 좋은 환경이었다. 아프리카는 농촌인구가 다수라서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좋은 나라들이었다.
아프리카에서도 공산당이 창건되었다. 크와메 은쿠루마, 은남디 아지키웨, 헤이스팅스 반다, 조모 케냐타는 공산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고 독립된 아프리카 정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식민지 농업 서비스로 농작물을 개선하고 기술을 지원했다. 도로망이 확충되어 식량을 쉽게 제공할 수 있었다. 교육으로 보건이 개선되어 아동 사망률이 줄어들어 인구가 급증했다.
아프리카에서 식민 통치의 불공정은 민족주의 운동을 촉진해 다양한 민족집단을 독립운동으로 결집시켰다. 독립을 이룬 뒤에는 민족주의 운동으로 인해 자기 민족에만 혜택을 줌으로 극심한 분열이 생겼다.
전리품:“제2차 세계대전은 아프리카에서 식민주의의 종식을 예고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자치정부가 자리를 잡으려면 수십 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결국 그 준비가 미처 갖춰지기 훨씬 전에 민족주의의 압력과 불안(이를테면 케냐의 마우마우반란)이 독립을 더욱 앞당겼다.”(같은책, 796)
1930년대에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에 맞서 파시즘이 나타났다. 대전으로 반식민지주의 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식민지는 망명정부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고 병력으로 충원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과의 전쟁의 승리는 콩고에서 나온 우라늄의 역할이 컸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대서양헌장을 작성했다. 이 헌장으로 미국은 군사 장비와 보급품을 공급할 수 있었다. 미국은 대서양헌장 제3조에 명기된 과제를 영국이 실현할 것을 주장했다. 전쟁으로 미국은 기술, 산업, 재정이 크게 향상되었고, 전쟁 뒤에는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수출 시장이 확장되어야 했다.
아프리카의 활동가들은 영국 맨체스터에서 범아프리카대회를 열었다. 미국 흑인들의 불참으로 아프리카의 젊은 지도자들이 주도한 대회가 되었다. 최초의 독립된 국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네 개의 식민지가 모여 남아프리카 연방의 네 주가 되었고, 중앙정부는 다른 주보다는 법적으로 상위를 차지했다.
1946년에 영국은 아프리카를 아프리카인에게 맡길 계획을 추진했다. 영국의 아프리카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전담하는 정부 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 발전을 도모했다. 1947년 5월 위원회의 보고서는 아프리카 정책이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마찰은 최소화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이양하려고 했고, 각각의 식민지의 사정에 맞춰 단계적으로 자치를 준비하려고 했다. 이러한 계획은 간접 지배의 종식이었고, 추장들은 교육받은 엘리트로 진화해갔다.
프랑스는 두 개의 정부로 구성되어 국내 사정이 복잡했지만, 브라자빌 회의로 대서양헌장에 맞섰다. 브라자빌 회의에 충실했던 프랑스는 강제 노동과 앵디제나(행정부가 프랑스 시민의 자격이 없는 프랑스 ‘국민’에게 형법상의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 같은 악습을 철폐하고, 아프리카 식민지의 모든 주밀들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했다. 각 지방에 지방의회를 설치하고, 연방의회도 설치했다.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하는 24명의 대표를 선출하여 프랑스 제헌의회에 참여했다.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정치활동에 무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렇지만 파리에서의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자유의 첫 춤:“벨기에령 콩고는 1960년대에 독립을 이룬 나라들 가운데 가장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독립기념식이 끝나고 불과 며칠 뒤에 혼돈과 반란이 분출했다. 그러나 콩고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미국이 콩고 사태에 간섭한 것은 아프리카 나라들이 냉전의 볼모가 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CIA요원들은 친소련적인 콩고의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를 암살하려 했다. 미국이 지지하는 조제프 모부투는 이 지역에서 소련의 야심을 좌절시킬 계획이었다.”(811쪽)
이 장은 콩고가 독립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콩고는 대전에 필요한 자원이 많은 나라여서 전쟁으로 부유해졌다. 전쟁으로 행정까지 효율적으로 변화되었다. 벨기에는 식민지인 콩고를 관리, 성직자, 기업가들이 관리할 뿐 국가적 차원에서 감독하지 않았다. 1950년대 초 반 빌젠이란 국제문제 교수가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통해 식민지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의 호소는 벨기에 국민에게 경멸과 비난을 받았다.
1948년에 벨기에는 모범시민증을 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는 아프리카인에게는 유럽인의 사회· 경제적 세계에 참여가 어렵고, 벨기에인들은 자신들과 동등한 지위에 오르게 하는 모든 제도에 반대했다. 벨기에는 선의로 제도를 도입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벨기에 식민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을 에볼뤼에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유럽식 특권을 얻으려고 했으나 대부분은 성공하지 못했다. 좌절한 에볼뤼에는 적극적으로 아프리카 민족주의 구호를 외쳤다. 그들 중에서 카리스마가 강한 파트리스 루뭄바가 1958년에 콩고국민운동당을 창립했다.
콩고의 민족주의 물결이 고조되자 벨기에는 식민지 정책에 변화를 도입하려 했다. 그렇지만 계획을 발표하기 하루 전날 레오풀빌에서 격렬한 폭동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벨기에는 자기의 정책을 고수했다.
1959년에는 콩고 전역이 정치적 과열로 혼란스러웠다. 이 과열을 멈추고자 1960년 1월에야 벨기에 정부는 처음으로 콩고인들과 콩고의 미래를 협의했다. 벨기에는 4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려 했고 콩고인들은 1960년 1월에 독립을 원했으나 마침내 6월 30일에 독립했다.
갑작스런 독립과 권위의 붕괴는 폭력과 무질서를 불러왔다. 벨기에 군인들은 혼란을 잠재우고자 동원되었고, 벨기에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콩고 군대를 무장 해제해 축출했다. 본토에서 증원군까지 콩고로 들어왔다. 이에 루뭄바는 벨기에와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국제연합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국제연합의 도움에도 만족하지 못한 루뭄바는 소련에 원조를 요청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로 인해 미국도 콩고에 상황에 참여, 결국 대통령과 루뭄바와 일레오 나뉘어 서로가 서로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제프 모부투 대령이 집권하게 되었다. 모부투는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를 콩고에서 몰아냈다. 결국 소련은 국제연합에서 사무총장 직책을 폐지하고 세계를 서구, 사회주의, 중립권의 세 블록으로 나눠 대변하자고 주장했다. 소련의 트로이카 제안은 거부되었으나 미국은 큰 부담을 느꼈다.
미국은 국제연합을 빌미로 아프리카에 발을 디밀면서 소련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분으로 아프리카에 튼튼한 기반을 마련했다.
모부투는 1965년에 2차 쿠데타를 일으켰다. ‘참아프리카 되찾기 운동’을 전개하고 콩고를 ‘자이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지리의 명칭을 아프리카 식으로 바꾸었다. 자신의 이름도 모부투 세세 쿠쿠 응벤두 와 자 방가로 바꾸었다.
루뭄바의 죽음은 정확히는 모른다. 죽고 난 다음에 모부투도 그를 찬양했고, 범아프리카 사회주의자로 통합의 우상으로 격상시켰다.
꿈과 악몽:“아프리카를 평화로운 민주주의 국가들의 대륙으로 만드는 꿈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독립 이후 30년 동안 70여 차례의 쿠테타가 발생했다. 1990년대까지도 민주주의의 기미를 보이는 나라는 드물었다. 1당 국가, 종신 대통령, 군부 통치가 일반적이었다. 엘리트가 부를 쌓고 인구 대다수가 고통에 시달리면서 자원이 탕진되었다. 나이지리아와 르완다가 그 악몽의 전형이라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그나마 꿈을 현실로 바꾸는 일말의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829쪽)
1960년 국제 연합 총회에서는 비록 준비가 되지 않았어도 독립할 수 있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16개의 식민지가 독립 국가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신생국은 전후의 호황과 물가 상승으로 생활수준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새 지도자들은 ‘아프리카성’의 힘을 믿었다. 세네갈의 지도자인 레오폴 상고르는 ‘흑인성’을 찬양하는 시를 썼고, 탄자니아 지도자인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아프리카적 의미의 정체성 공유와 유럽의 개인주의를 대비시켰다. 나에레레는 아프리카 합중국을 목표로 삼았다. 1963년 30개국 대표들이 에티오피아 수도에 모여서 아프리카동일기구(OAU)를 결성했다.
보츠와나는 1966년 독립 이후에 다이아몬드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했다.
르완다는 1961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후 국민적 정체성을 공유하지 못했다. 벨기에의 잘못된 개입으로 생긴 투치족과 후투족의 대립으로 일어났다. 압도적 우세인 후투족 엘리트는 화해와 통합이 아닌 절대적 패권을 실행으로 내전과 학살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르완다의 혼돈과는 상관없이 인도주의의 희망을 보여주었다. 1990년에 넬슨 만데라는 대통령이 되었다. 남아프리카 인구는 아파르트헤이트 상황에서도 3배가 증가했다. 백인은 감소하고 흑인은 증가하는 추세다. 인구의 균형이 달라지면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어려워졌다. 경제적인 이유와 국가 예산의 필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해야 했다. 더불어 백인의 지배도 끝났다. 아프리카민족회의의 강력한 저항운동도 도움이 되었다. 국제 사회의 압력도 백인에게 압박이 되었다. 1994년 흑인이 투표에 승리하면서 백인 지배의 흔적은 사라졌다. “넬슨 만델라와 그가 대표하는 정치권력의 이동은 경제적 실용주의가 세계 무대를 지배하는 시대에 통합과 이념의 가치를 확인시켜준다. 그와 남아프리카는 전 인류에게 희망을 준다. 그것은 바로 오랫동안 절망 이외에 아무것도 낳지 못했던 대륙에서 솟아난 희망이다.”(854)
주로 농경사회였고 식민지를 거쳤던 나라들이 겪은 현대사의 참상은 비슷한 듯하다. 넬슨 만델라가 보여주었던 희망이 아프리카에 계속 시도되기를 바란다.
다음주 마무리에 대한 얘기
주제에 맞게 정리한 내용을 아프리카 지도 위에 표시한다.
채운샘 강의
‘세계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세계는 무엇일까? 지구의 역사인가? 역사는 무엇인가? 세계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각 나라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인가? 모두 포괄하는 것이 역사인가? 세계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세계사는 가능한가? 개별 국가들의 역사를 모아놓은 세계사가 있고, 전체 세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조망할 수 있는, 세계를 서술할 수 있을까?
처음 들어본 ‘서발턴’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의 하층 계급을 지칭하던 말이다. 하위주체라고도 번역하는데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들이란 뜻이다. 1982년에 인도의 라나지트 구하라는 <서발턴과 봉기>(1983)를 썼다. 역사학에는 결코 등장하기 어려운 민초의 역사를 기록하려는,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려는 역사학적 기획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으로 농민들의 의식을 되살리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이들은 인도뿐 아니라 식민지 역사를 서술하는 데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스피박이란 문예학자의 개입으로 인문사회과학의 근본적인 화두가 되었다.
“하지만 스피박이 던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칸트식의 용어법을 빌린다면, 사실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권리에 관한 질문이다. 곧 스피드박은 식민지 시대 인도 농민 및 사티라고 불리는, 순장에 희생당한 인도 여성 같은 실제의 서발턴들이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을 한다면 어떤 근거에서 말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들이 말하는 것이 가능한지 질문하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만약 서발턴이 말을 할 수 없다면, 그들은 왜 말을 할 수 없는지, 그들이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메커니즘은 어떤 것인지 질문하려는 것이 스피박의 목적이다.”(진태원, ‘서발턴’은 정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발턴은 말을 할 수 있는가’란 질문을 ‘있다, 없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받아들인다. 서발턴이란 존재들, 목소리를 갖지 못한 존재들이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말할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질문이라고 채운샘은 설명하신다.
우리가 좋아하는 커피나 초콜릿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아주 어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은? 그들은 왜 말할 수 없는지? 말할 수 없는 그들이 목소리를 내도록 어떻게 싸워야 할지? 제3세계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질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스피박의 질문은 ‘식민화된 서발턴의 주체가 돌이킬 수 없이 이질적’이라는 주장을 전제한다. 조금 더 일반화한다면, 피억압 대중은 환원할 수 없이 이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진태원, ‘서발턴’은 정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세상의 문제들은 계급, 인종, 남성, 젠더 이처럼 하나로 환원할 수 없이 너무나 복잡하다. 개체의 삶 자체가 그런 모든 힘의 선들이 관통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기에 누구의 삶도 함부로 단죄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서술할 때도 자기가 어떤 위치에서 상대를 보고 있는지?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는 자가 될 것인가? 아프리카의 역사를 공부했으니 인터넷에 아프리카 기사를 검색해보라. 채운샘은 우리에게 글을 쓰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아프리카가 묵직하게 가슴에 자리잡았습니다. 근대를 관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것이 한국에도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그러나 그리 많지 않은 시간이 흘러, 우리는 아프리카의 고통을 잊고 서구인의 생활과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건 아닌가 싶은 자괴감도 듭니다. 후... 참,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공부로군요! 그나저나 이번에는 인용이 꽤 많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