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세계사도 이제 마지막 시간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마이너 세계사를 홍보하던 게 어제 같은데, 참 시간이 빠르군요.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죠!
다음 시간에는 한 시간 앞당겨서 8시 반에 만납니다. 2시간 동안 작업하고, 2시간은 르완다 내전을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를 보기로 했지요. 2시간만에 작업이 끝날 수 있도록 모두들 각자 맡은 걸 잘 마무리해와주세요~
근대 아프리카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이번에는 채운쌤의 강의도 있었고,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도 끝까지 다 읽었죠. 아무도 읽지 않을 이 두껍고도 훌륭한 책을 읽다니! ㅋㅋ 여러 질문이 남는 시간이었죠. 일단 간단하게 책 내용부터 정리해볼까요?
근대 아프리카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사실 아프리카의 역사를 묻는 것부터가 매우 서구적인 시선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대략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자주성을 확립하고자 ‘아프리카’가 노력한 시기를 아프리카의 근대라고 규정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이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시도는 식민지 교육에 소외감을 느낀 아프리카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식민지 교육은 아프리카인을 유럽인으로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의 지형과 역사를 배우지 않고, 유럽의 강과 산의 이름, 역사, 기후를 배웠죠. 그것은 아프리카에 살면서도 아프리카에 속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극소수의 교육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아주 소수만이 관리로 발탁이 됐을 뿐 나머지는 지식을 활용할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지식인들의 이러한 소외감, 괴리감, 위화감이 점점 심화되다 나중에는 자치와 국가 독립을 요구하게 됐습니다.
이때 아프리카의 독립 운동과 더불어 같이 봐야 할 것은 소련의 움직임입니다. “아프리카의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고 발전한 것은 소련이 세계적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과 때를 같이했다. (…)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레닌은 소련이 모든 식민지 민족을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 레닌은 제국주의, 민족주의, 식민지 문제를 말할 때 자주 아프리카를 언급했다. 실제로 산업화가 뒤처지고 농촌 인구가 압도적 다수인 아프리카는 공산주의자들이 전 세계에서 근절하려 애쓰는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유사봉건제에서 곧장 공산주의로 이행하기에 이상적인 무대로 보였을 것이다.”(787)
분명 1960년대부터 아프리카의 독립이 활발하게 진행되긴 했지만, 여기에는 아프리카인들의 노력만이 아니라 식민지들을 독립시키고, 공산주의 실험을 하고자 했던 소련의 입김도 있었던 것이죠. 실제로 일부 아프리카 나라들에 공산당이 창건되면서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프리카인들은 공산주의적 이념과 실험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코민테른이 유럽과 미국에서 끌어들이려 했던 아프리카인들은 사실 아프리카의 부르주아 엘리트였다. 그들은 특권층이지 피억압 민중이 아니었던 것이다. (…)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 제도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수입에 의존했을 뿐 아니라,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국민들은 80퍼센트 이상이 농민이고 거의 다 문맹이며 전반적으로 권력자의 독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788~789) 아프리카는 엄밀히 말해 독립이 필요했고, 생존을 위한 식량과 의료품이 필요했던 것이지 그밖의 어떤 사상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독립 과정에서 성장한 엘리트의 존재, 식민지 교육은 아프리카인들 내부적으로 어마어마한 갈등을 낳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르완다에서의 후투족과 투치족이죠. 원래부터 후투족과 투치족이란 원주민의 구분이 첨예한 것도 아닌데, 벨기에에서 용이한 통치를 위해 두 부족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죠. 이때 형성된 갈등 관계가 너무 심각해서 나중에 벨기에가 철수한 뒤에도, 아직까지도 둘 사이의 내전이 종식되지 않았습니다. 이 얘기는 영화 <호텔 르완다>를 보면서 좀 더 정리해보죠.
누가 아프리카의 역사를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아프리카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공부하는 아프리카의 역사는 아프리카를 대상화해서 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미 여러 번 공지에서 반복한 질문이지만,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문제는 단순히 ‘인종’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모든 흑인이 고통받은 게 아니고, 모든 백인이 칼자루를 쥐었던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흑인들과 백인들, 그리고 흑인들 사이에는 매우 복잡한 맥락이 얽혀 있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인종으로 축소시킬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모든 맥락이 소거되죠. 그런데 아프리카의 아픔에 주목하면 어쩐지 문제를 자꾸 ‘인종’, ‘피부색’으로만 환원하게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아프리카의 역사를 얘기할 수 있을지, 이 아픔을 대상화하지 않고 말할 수는 없을지 참 어렵습니다.
이번에 채운쌤의 강의를 들으면서 길이 보인 것 같습니다. 강의 핵심을 제 식대로 왜곡하자면(ㅋ), 역사는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서술되느냐에 따라 상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말 자체는 거의 상식처럼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서술되는 동시에 우리의 인식에서 지워지는 목소리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세계사를 쓸 때, 동양 혹은 서양을 중심으로 쓸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쓸 수 없습니다. 무엇을 쓰는 동시에 무엇을 쓰지 않는 선별 작업이 자연스레 이뤄지는데요. 그렇게 완성된 역사는 과연 무엇을 말할까요?
가령, 지난번에 본 <알제리 전투>는 실제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알제리 전투의 초기 양상을 매우 상세하게 그려준 것 같았지만, 사실 그건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관점에서 재현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 누군가의 관점에서 기억을 재현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쓰는 것과 엄밀한 의미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채운쌤은 식민지의 시기를 겪은 나라들이 갖게 되는 두 가지의 대표적 시선이 있다고 하셨죠.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의 내면화’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 같이 ‘식민지 이전의 순수한 무엇에 대한 향수’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어떻든 두 가지 시선 모두 민족이나 이념 같은 걸 추구해야 할 선(善)으로 실체화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실체화된 관점을 가질 때, 거기에는 그러한 실체화된 목표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이 모두 배제됩니다.
인도의 가야트리 스피박이 바로 이러한 배제에 주목해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글을 썼죠. 서발턴은 스피박 이전에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창안하고, 라나지트 구하가 본격적으로 인도에서 사용한 개념인데요. sub(하위=under)와 altern(=other)를 합성한 개념으로서 주로 실체화된 담론 속에서 배제되는 목소리를 복권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스피박은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정말로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여부보다 권리상 서발턴의 말하기를 좌우하는 구조적 문제들을 문제를 지적한 것이었죠. 실제로 인도에서 독립 운동을 전재할 때 서구화에 반대 가치로 민족 문화가 부상했다고 하는데요. 이때 인도 문화 중 하나가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같이 화장 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립 운동을 진행하더라도 과연 이러한 문화를 인도 여성들도 원하는지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저 독립 운동을 위해, 인도의 문화를 복권하기 위한 명분 속에서 인도 여성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역사를 공부할 때도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의 문제는 재현보다 권리를 묻는 문제로, 목적보다는 배치를 분석하는 문제로 다뤄져야 합니다. 단순히 핍박받는 쪽과 착취하는 쪽으로 구분하는 것은 문제를 너무 단순하고 순진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누군가는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며, 아예 말하고자 하는 필요조차 허락되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는 지금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경제적 압박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받는 압력이 엄연한 착취라고 얘기할 권리조차 갖지 못합니다. 한 번도 말해진 적 없는 목소리는 ‘재현’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역사로 담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저는 멈칫합니다. 이제 역사는 '당사자'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은 조금 이해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쓸 수 있을까요? 채운쌤은 그들과 연대하는 문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무기로서 글쓰기를 강조하셨는데요. 아직 저에게 연대와 글쓰기의 동력이 확고하지 않은 탓인지, 이런 서발턴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습니다. 역사를 고민하는 건, 수많은 서발턴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이 다음은 일단 괄호를 쳐놔야겠어요.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