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을 한번에 정리했네요. 덕분에 후기가 길어졌어요.
28장을 공부하면서 다음 학기는 아프리카의 역사에 대해서 진하게 공부하기로 결정했지요. 규창샘이 보여준 책이 두꺼워 베개로 사용해도 될 정도입니다. 제본은 세 권으로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9장은 세계 대전에 대한 설명이고, 30장은 한국 전쟁이 나오는 장입니다.
그동안은 1000년 단위로 넘어가던 세월이 우리가 살았던 시대여서인지 더 관심이 가고 나의 상식이 달라지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28장은 우리가 잘 모르는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1850년에서부터 1945년까지를 알아본다. 오세아니아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태평양에 있는 섬들을 말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안가는 작은 환초들로 둘러싸인 섬들이 흩어져 있어서 접근하기 어려웠다. 대륙은 대부분 사막이었고 강수량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해안가는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어서 선박의 접근이 어려웠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안선을 측량하던 중에 남쪽에서 양질의 토지를 발견하여 1788년에 영국 정부는 국가에 부담을 덜기 위해 죄수들을 시드니로 보냈다. 그곳에서 죄수들은 새로운 삶을 개척할 기회를 얻었다. 1840년에는 영국의 빈곤과 인구 밀도를 줄이기 위해 뉴질랜드로 본국 국민을 이주시켰다. 하와이제도는 미국의 선교사와 포경원 선원의 영향을 받았다. 오세아니아와 뉴질랜드를 비롯한 폴리네시아에 살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옮긴 질병들에 대한 저항력이 없어서 원주민이 많이 죽었다.
아프리카는 지중해에 접한 동북아프리카는 문명을 일찍 받아들였다. 에티오피아나 서아프리카의 강 유역에서도 문명국가와 제국이 번영했다. 아프리카의 해안지대에서는 인도나 아시아, 유럽의 상인들과 교역을 했고, 많은 항구가 발달했다. 내륙에도 왕국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유럽이나 아시아에 뒤처졌다. 그것은 지리적 요인 때문이다. 첫째, 아프리카는 농사를 짓기에는 강우량이 부족한 지역이 많고 토양과 기후도 적합하지 않았다. 둘째, 자생하는 작물은 생산성이 낮았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근채식물과 아메리카에서 온 옥수수 재배로 인해서 인구가 증가할 수 있었다. 셋째는 수송과 교통이 나빴다. 대륙 대부분이 높게 융기되어 하구에 이르면 급경사를 이룬다. 강을 이용해서 물자수송이 어렵고 기차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외부와 교류가 적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서 다양한 언어와 문화, 체질적 특성이 형성되었다.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가의 일부지역은 지중해 인종의 신체적 특징은 남유럽인이나 서아시아의 아랍인과 비슷하다. 열대우림은 수렵채집인으로 살아가는 피그미족. 호수지역에서 가축을 기르며 모여 사는 마사이족, 산족이나 코이코이족은 대륙과는 다른 종족이다. 아프리카는 흑색인종이 다수다. 아프리카 대륙도 고립되어 있고 공동체들도 서로 고립되어 있어서 특징적인 신체적 형태가 발달했다. 1850년 이후에는 외부와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자연히 유전자가 혼합된다. 아프리카의 부족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곳에서는 마호메트의 성스러운 언어를 배웠다. 아랍어는 학문적인 언어와 부족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한 공통어가 되기도 했다. 언어 변이의 폭이 좁은 반투어족은 아프리카에 널리 퍼져있다. 스와힐리어는 교역용 언어인데 아랍어와 반투어의 혼합으로 생겨났다.
19세기에 아프리카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아프리카의 북쪽과 동쪽은 이슬람이 서쪽과 남쪽은 유럽이 압력을 가했다. 두 가지 경제적 변화로 국가 건설의 열풍이 시작된다. 첫째는 새로운 작물의 도입으로 인한 식량 생산의 증가이다. 식량 생산이 늘면 인구도 증가한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국가 건설을 위한 다방면의 전문가를 지원할 수 있는 자원이 증대된다. 두 번째는 노예무역은 1807년에 제한이 되었고 1833년에는 거의 금지되었다. 노예무역의 쇠퇴는 아프리카의 원료와 맞바꾸는 교역으로 대체되었다. 아프리카의 특산물에 대한 높은 수요로 상아 무역이 성행했고, 총을 수출해서 유럽인들은 돈을 벌었다. 변화의 요인에는 종교도 있다. 무슬림의 영향은 20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슬림과 유럽인과의 충돌로 인해 광적인 무슬림 운동이 일어났다. 예로 사누시라는 수도승형제회가 있다.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현지어에 의한 교육을 통해서 서양문명의 지적·기술적 기반이 도입되었다. 미션스쿨에선 서양의 제도와 이념을 정식으로 교육 받은 아프리카인 집단을 배출했다. 이것은 사람들의 삶이 전통적인 생활양식으로부터 유리되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문화적 영향력이 약화 되었다.
1914년이 되면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극적으로 변한다. 수송과 교통의 장애를 해결할 수 있는 증기선과 철도의 연결이다. 이 운송체제로 벨기에는 내륙에서 구리광산을 개발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풍토병은 과학의 발달로 위력을 상실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유럽 문명에 개방시킨다는 명분 아래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먼저 시작했고 뒤이어 독일과 이탈리아와 벨기에까지 합세했다. 아프리카에서 영토분쟁을 벌이던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아프리카인들은 새로운 시각과 경험을 했다. 이들은 서양의 지식과 기술을 획득한 소수의 집단이었지만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제국주의 정부들이 아프리카를 떠났을 때 유럽 행정관의 지배권을 인수했다.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은 백인과 함께 온 질병으로 사회구조가 붕괴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 전역과 뉴질랜드를 영연방 자치령으로 만들었다. 하와이제도는 토착 왕조를 무너트리고 미국이 병합했다. 필리핀은 1571에는 스페인이 1898부터는 미국이 점령했다.
동남아시아의 고지, 시베리아 북부, 브라질의 열대우림지역 같은 곳들은 19세기까지 고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수송과 교통수단이 인류를 균질화시켰다. 균질화의 필수 조건은 문화, 지리, 유전자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인간과 물자의 장거리 이동이었다. 문명사회는 그런 이동을 요구하는 동시에 실현했다.
1919년에서 1945년의 서양 세계는 두 차례의 대전으로 인간사회를 계획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가시화되었다. 1815년과 1914년 사이는 부르주아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과 자유주의적 헌법 제정을 통해서 정치제도란 결코 자연적이거나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며 다수의 인간이 원하면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융통성이 없는 양 진영에서 우연히 일어났다. 두 번째 요인은 국가의 군대가 세운 동원계획이 경직되고 졸렬했다는 점이다. 독일의 승리를 우려한 미국은 소련이 혁명 쿠데타로 전쟁에서 철수하자 참전했다. 이 무렵에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러시아와 미국의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국가와 군대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윌슨은 민족자결이라는 민주적인 과정에 의해 전쟁을 종결하고 싶었다. 승전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1919년 1월 파리에서 강화화의를 했고 패전국가들의 강화조건을 결정하는데 급급해서 국경선을 확정하는 문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강화회의는 전승국들간의 동맹관계를 와해시켰다.
전간기에 미국은 1920년의 선거에서 하딩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이것은 전전의 상태로 돌아가서 국제문제는 신경 쓰지 않고 개인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이다. 이탈리아는 쿠데타로 1922년에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권이 탄생했다. 러시아에서는 레닌에 의해 제3인터내셔널을 조직했다. 독일은 1919년에 바이마르에 의한 연립정부가 세워졌다.
1941년 6월 22일 밤, 독일은 소련을 기습공격했다. 12월 6일에 독일군은 퇴각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1942년에 11월에 영미의 반격이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1943년 7월에 이탈리아는 전쟁에서 손을 뗐다. 1942~43년 내내 소련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1945년 5월 1일에 히틀러의 자살로 항복문서에 독일군 최고사령부의 대표단이 공식적으로 서명했다. 독일은 독일 연방공화국과 독일 인민공화국으로 나뉘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유럽의 도시들은 파괴되었고 황폐해졌다. 1949년 이후 경제회복은 가시화되었고 대부분 전전보다 더 높은 생산성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1920년대에 라디오와 영화가 영향력을 키우고 1930년대부터는 정치에도 영향을 주었다. 텔레비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실용화되었다. 매스미디어 네트워크의 힘은 모든 사상이 평균적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광고는 정서적으로 강렬한 이미지로 상품과 연관시켜 시청자의 잠재의식적인 반응을 자극하고 있다.(히틀러의 라디오 연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행동이 비이성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마음의 무의식적 수준을 설명하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었다. 사진기술의 발전으로 시각예술에 방대한 영역이 제공되었다. 공산주의에서 예술은 당의 지시를 받았고 도구 취급을 받았다. 1920년대 중반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에르빈 슈뢰딩거에 의해 양자역학을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과 소련은 초강대국이 되었다. 소련은 공산주의 운동을 원조해줘야 한다고 의무감을 가졌고, 미국은 윌슨의 민주적 민족자결을 옹호하기 위해 공산주의가 전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냉전이 확립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열강의 합의라는 것도 어렵다. 1947년에 미국 정부는 소련의 야욕이 봉쇄될 때까지 유럽과 일본에 군대를 주둔하기로 한다. 스탈린은 1944~1945에 동유럽에 연립정권을 세웠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1947년 3월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하고 그리스를 도와주었다.
1947~1973은 냉전 시대다. 이 시기에 소련의 5개년계획인 경제계획이 시행되어 동구권에서 빠른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국가 간의 협력은 원활하지 못했다. 이유는 소련과 미국의 견해가 현실에 부합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운동이 침체된 것은 압도적인 다수가 농민이고 근대산업이 막 발달하기 시작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혁명이 성공했는데도 국제적인 형제애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측명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해체되는 방식이었다. 영국은 1947년에 인도에서 자진 철수했다. 프랑스는 알제리 투쟁으로 내전 직전까지 갔다. 국민투표를 통해 알제리를 독립시켰다.
이쯤해서 대한민국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맥닐은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북한에서 남한을 공격했다고 말한다. 미국은 공산주의 팽창계획의 또 다른 행보로 간주해서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제재하기로 결의한다. 미국은 UN군과 같이 군사적으로 개입한다. 북한이 패하기 직전에 중국군이 참전한다. 1953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이 결과에는 남북한이 모두 만족하지 못한다. 한국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일본이다. 우리의 전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폐허에서 회복된다. 36년 일제에 지배를 받은 것도 억울한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우리의 전쟁으로 독일을 능가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는 부분에 격한 감정이 일어났다.
냉전 시대에 신무기 경쟁으로 인한 원자폭탄은 수소폭탄을 개발하게 만든다. 다시 미사일 개발로. 이런 군비경쟁으로 생신 부산물은 우주개발이었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데도 이용될 수 있었다. 다른 부산물은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였다. 이 공포는 두 강대국이 대결을 피하는 자세를 보인다. 여기에 프랑스가 나토에서 탈퇴하고 중국이 소련을 비난하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미국 정계가 어수선해졌고 닉슨은 재임 중에 사퇴했다. 곳곳에서 국지적 분쟁이 발생했다.
1973~1974년 아랍의 석유수출국들이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에 대한 보복으로 대미 석유수출을 금지했다. 석유수출기구(OPEC)는 유가를 4배나 인상한다. 이 충격으로 새로운 유전을 개발하고, 대체 연료를 사용하고 효율적인 난방기구와 내연기관을 만들어 석유 소비를 줄여서 1982년부터는 다시 석유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시장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4년에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합의했다. 유럽은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설립되고 북아메리카에서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었다.
중국은 1961년 소련에 반기를 들었고 미국과 1972년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혁명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문화대혁명’(1966~1976)이란 무력을 행사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981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을 세계시장에 개방하는 새로운 정책을 전개했다. 1989년 베이징의 천안문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한 대규모 집회가 발생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출생률이 급격히 하락했다. 산업은 성장을 멈추고 농업생산도 실제로 줄었다. 1973년 이후 몇 년 동안은 OPEC이 주도한 유가급등에 의해 완화되었다. 소련에는 석유가 많이 매장되었기 때문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982년부터 유가의 하락으로 두 가지 난관에 직면했다. 군비경쟁으로 인한 어려움과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의 패배였다. 1987년에 핵미사일을 철거·폐기하는 협정에 조인했고 198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1991년 12일6월에 옐친이 국민투표로 새 대통령이 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사라졌다.
시대에 뒤떨어진 내셔널리즘적 애국심의 약화와 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의 강화로 국가통합의 약화도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내부의 종교적·민족적 도전에 직면한 국민국가는 다종다양한 초국적 조직의 발달에 의해 한층 약화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계획에 의해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변화의 길이 활짝 열려 있는 미래에는 엄청난 가능성과 엄청난 파국이 잠복해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사는 언제나 그랬듯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영광과 좌절의 모험이 될 것이다. " 맥닐과 함께 했던 세계의 역사 모험을 다음 학기엔 아프리카로 같이 해보아요. 저 두 권의 책을 언제 다 읽을까 싶었는데, 벌써 다 읽었네요. 같이 세미나를 한 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방대한 양이었을 텐데, 아주 꼼꼼히 정리해주셨군요! 근대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대략 따라갈 수 있는 장이었죠. 따져보면 유럽을 빼고 거의 모든 대륙에서 인종의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유럽은 이념으로 자기들을 묶고 정의했지만, 다른 곳에 사는 민족들을 분열시키고 강제로 혼합시키고... 아주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지 않은가 싶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와중에 학문은 아주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 마치 춘추전국시대에 사상이 급격하게 비약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개괄적으로 따라갔을 뿐이지만, 거기다 유럽중심주의자의 시선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기까지 어떤 일련의 흐름이 있었는지 대략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시간을 함께 훑다니, 참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