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 이 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는데요. 적어도 아프리카를 공부하는 한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아프리카를 공부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만약 아프리카를 공부한다면 그곳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역사적으로 유럽을 가해자로 놓고 아프리카를 피해자로서 위로하는데, 모든 아프리카인이 눈물을 흘린 건 아니었죠. 사실 ‘아프리카인’에 누가 들어갈지 아직도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어요. 남부 아프리카의 근대를 살펴보면, 그곳에 유입된 수많은 백인들도 어딘가에서 쫓겨난 “찢어지게 가난한 자들”이었죠. 이제 겨우 존 아일리프의 <아프리카의 역사> 한 권 읽었을 뿐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얼마나 많은 관념으로 퉁치고 있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꼭 아프리카 공부하세요!
다음 시간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1~2부를 읽어 옵니다. 보다 쉽게 읽힐 거예요. ㅋㅋ 간식은 현주쌤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프리카의 분할
아프리카에서 본격적으로 눈물이 흐른 시기는 언제일까요? 아프리카를 공부할 때 이걸 찾으려고 했는데요. 사실 공부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제가 생각했던 억압당한 아프리카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노예를 들이고 흑인을 차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노예를 팔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대륙이 자로 잰 듯 분할될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을 원하는 아프리카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유럽 열강들도 아프리카 대륙을 맘대로 좌지우지할 만큼 무력을 소유하지도 않았고, 그렇다 할지라도 말라리아나 매독 같은 병 때문에 한 곳을 오랫동안 통치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정부의 통제에 대해 적대적이었죠. 유럽이 아프리카에 침입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아프리카인들이 그것을 원했다고밖에 얘기할 수 없어요. 역사를 공부해버린 이상 이런 것을 빼놓고 일방적으로 아프리카가 착취당했다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유럽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하면서 온갖 보호령과 식민지령을 세우던 시기, 그러니까 19세기 후반부터 아프리카를 해방하는 20세기 중반까지를 살펴보면, 확실히 유럽 열강들 자신의 이익 때문에 어떻게 착취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이 분할되기 시작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영국에 대한 당시 유럽의 경계 때문입니다. 당시 영국은 ‘팍스 브리타니카’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적으로 강력한 해군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해상 무역로에 대한 장악력은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든 그러한 영국을 제재하기 위해 1884~1885년 베를린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여기서 결정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의 아프리카에 대한 주장은 여태껏 영국이 해군력과 상업력을 통해 누려 왔던 비공식적인 지배보다 훨씬 본질적이어야 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337) 이후 영국의 주도 하에 아프리카를 본격적으로 분할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아프리카 나라들의 지도자들은 여기에 호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초창기에는 유럽의 보호령에도 저항했지만, 이를 폭력으로 진압한 뒤에는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떨어지는 현지인 엘리트들을 고용하면서 간접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죠.
아이러니한 것은 유럽의 통치에 저항하다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죽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도입한 근대적 시설 덕분에 생산량과 생존율 등이 일정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유럽 열강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학살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도 기근이나 질병 같은 것보다는 덜 파괴적이었습니다.(371) 실제로 역사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을 괴롭힌 것은 이웃부족이나 유목민의 침략보다 부족한 식량과 고질적 풍토병이었습니다. 따라서 아프리카인들의 인구가 증가하고 감소하는 패턴이라 할 만한 게 없었죠. 여기에 일정한 상승 곡선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유럽 열강들이 철도를 깔고, 말라리아를 치료할 병원을 세우는 등 본격적으로 수탈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아일리프에 따르면, “단일한 인구변화 패턴의 확립은 식민지시대의 가장 중요한 유산”이었습니다.(375)
‘아프리카’라는 정체성
유럽의 침입은 아프리카 대륙에 큰 변화를 몰고 왔습니다. 인구 증가만이 아니라 문화 전반을 바꿔놓았죠. 아일리프가 주목하는 아프리카인들의 탁월함은 외부의 것에 빠르고도 유연하게 발맞춰 순응하고 활용한다는 것이었죠. 아일리프에 따르면, 식민주의는 아프리카의 전통을 파괴한 시기가 아니라 아프리카가 자신의 문화를 재정립하는 하나의 시기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인’이라는 통합된 정체성을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前) 식민지시대의 아프리카인들은 몇 가지 사회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종족, 씨족, 촌락, 도시, 수장국, 어군(語群), 국가 그리고 이런 것이 결합된 어떤 단위에 속했을 것이며, 그런 상황에 걸맞은 적절한 정체성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도 다른 수장국에 속할 경우 정체성은 서로 다르게 변해 갔던 반면, 하나의 수장국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포용했을 것이다. 이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사회질서였다.”(411)
이런 대목을 보면, 아프리카의 정치적 역량이 매우 뛰어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어쨌든 아프리카는 하나로 통합될 수 없을 만큼 매우 다양한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 형성은 식민지시대 도중에도 일어났습니다. “근대의 부족들은 종종 노동하는 도중에 태어났다. 이민노동자들은 집단적 연대를 필요로 했을 뿐 아니라 식민지의 변화에 대한 독특한 접근방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도시의 다른 민족들을 범주화할 하나의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412) 에메 세제르가 주창한 ‘네그리튀드’라는 문화 운동도 이러한 흐름에서 발명된 것입니다.
새로운 부족을 고안한 흐름이 있는가 하면, 이와 달리 부족성을 벗어난 공동체를 만들려는 흐름도 있었습니다. 주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앞장섰는데요. 이들은 자신들도 유럽 제국이나 미국 같은 국민국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아쉽게도 이러한 시도는 모두 실패했는데요. “국민성의 표준이 될 만한 근거와 공통의 언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죠.(416)
갑자기 근대 국가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재정립에서 출발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시즌에 읽은 <역사학의 거장들>을 상기해 보면, 근대 역사는 근대 국가의 성립과 함께 탄생했고, 역사는 자신들의 뿌리를 명확하게 정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가령, 프랑스는 민족을 벗어나는 것으로 역사를 시작한 데 반해, 독일은 민족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거의 모든 근대 국가는 이런 역사적 작업과 함께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그런 게 딱히 없어요.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를 출발점으로 잡긴 하지만, 정치적으로 강조할 만한 민족성이나 국민성을 정리한 적이 없죠. 북한과 한 민족이라고 하지만, 무엇을 근거로 한 민족이라고 하는지 따져보면 딱히 없어요. 그저 민족성만 강조하면 재일조선, 고려인, 조선족 이런 사람들도 같은 민족이라고 해야 하는데, 또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새삼 다른 나라들의 역사와 비교해보면 한국은 아직 역사적으로 밟아야 할 중요한 작업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점에서는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입니다. 1950년 내셔널리즘 조류에 올라타서 아프리카에서도 독립이 우후죽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양상은 매우 다양했죠. 어느 지역에서는 혁명을 통해 군사정권을 실각시켰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총선을 통해 정권을 교체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이 독립하면서 아프리카인 정부를 세우면, 거기서 소외된 백인들도 또 ‘독립’을 선언하면서 자기들만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각 정권은 자신들의 지지세력에 따라 이후의 정치적 주안점도 달라졌는데요. 생각보다 꽤나 ‘선직적’(?)이었습니다. 가령, “기니에서는 여성이 아프리카민주연합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독립 후 아프리카민주연합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결혼의 최소연령을 높이고, 신부값을 제한하고 일부다처제를 불법화했으며, 아내와의 이혼을 금지했다.”(445)
물론 아직도 아프리카는 민족성과 국민성을 확립하느라 진통을 겪고 있죠. 최근 리비아 내전만 해도 그렇습니다. 통합 정부와 이슬람 세력, 군벌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죠. 게다가 여기에 민족성, 어군, 인종 등을 고려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집니다. 아프리카가 어떻게 정리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지금 아프리카에 살면서 자신들의 터전을 정리하는 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프리카인’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지만, 이 정도로만 정리하겠습니다. ㅋ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또 얘기할 기회가 있겠죠. 후! 공부할 게 참 많아요.
1. 유럽의 식민지 지배를 "아프리카 대륙의 분할"로 미화하고 있는 거 같아요.
... 남부 아프리카(남아공?)로 간 백인들도 "찢어지게 가난한 백인들"이라고 해서 아프리카에서 한 행위들이 합리화될까요?
2. "아이러니한 것은 유럽의 통치에 저항하다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죽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도입한 근대적 시설 덕분에 생산량과 생존율 등이 일정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유럽 열강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학살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도 기근이나 질병 같은 것보다는 덜 파괴적이었습니다.(371) "
요 내용은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거의 흡사해 보여요. 어떻게 봐야 할까요?
3. 지금도 여전히 유럽인이 아프리카에서 자원을 개발한답시고 식수에 원유를 흘려 보내고, 열대림을 파괴해 주거지를 파괴하는 등으로 아프리카의 생존을 위협하는데 말이죠. 어쨌든 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내용들과 다른 점들이 많아 호기심은 생기네요~
오호! 댓글 달린지 몰랐었습니다. ㅎㅎ;;
1. 식민지 지배가 이뤄졌다고 하지만 모든 아프리카 흑인이 눈물을 흘린 건 아니었고, 모든 아프리카에 들어온 백인이 착취하는 쪽이었던 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였어요. 뭉뚱그려서 모든 아프리카인이 착취당했고, 모든 백인이 착취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관계망이 있었더라고요. 분명 아프리카에 들어온 백인들 중 일부는 유럽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아프리카가 독립하는 과정에서도 소외됐기 때문에, 우리는 착취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 일본의 식민지배와 유럽의 식민지배는 그 결과가 매우 상이한데요. 가령, 일본이 설치한 근대 설비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다 파괴됐지만, 유럽이 설치한 근대 설비는 아프리카의 생존율과 출산율을 높이고, 문맹율을 낮추는 데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에요. 사실 유럽인이 오기 전에도 아프리카는 이미 바람 잘 날 없던 곳이었던지라, 유럽인이 쳐들어오는 것은 많은 아프리카 부족들에게 있어서 으레 있었던 외부와의 전쟁 중 하나였습니다. 대상이 유럽이냐 이웃부족이냐 아니면 여기저기 노예를 사냥하는 유목민족이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고,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서 이들 스스로 인구를 조절하기도 했고요. 문제는 이 조절 과정을 압도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그건 대개 질병, 기근이었어요. 물론 수치상으로 모든 걸 정당화할 수 없지만, 전쟁이나 침략보다 질병과 기근으로 인한 사망률이 어마어마한 아프리카에 유럽 열강이 설치한 근대 설비의 도움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게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일단 왜 아프리카에 식민지배가 일어났는지는 또 따로 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3. 아직도 유럽이 아프리카를 착취한다고 할 때는 동서남북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에 따라 구분할 필요가 있겠고요. 유럽이 착취한다고 해도 거기에 발맞추는 아프리카 지도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서 단순히 유럽만 모든 책임을 떠안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때 아프리카 지도층으로 어떤 세력이 있는지, 어떤 유럽 국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같이 살펴봐야 될 것 같아요.
이제 아프리카를 공부하고 있어서 아마 틀린 내용들도 있을 텐데요. 지적해주신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봐야겠네요. 부족하지만,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사합니다!
역시 정랑쌤. 하트 뿅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