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방학이 지나고 벌써 개학이다. 규창샘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찐 고구마, 떡, 딸기, 떡볶이와 암송으로 얻은 무료쿠폰으로 커피까지~ 풍성한 간식으로 즐거운 공부, 모처럼 모여서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지도 그리기도 했다.
오전엔 『역시학의 거장들』에서 프랑코 벤투리과 에릭 홉스봄을 공부했다. 벤투리는 이탈리아의 학자이며 반파시즘 저항운동과 비마르크스적 시회주의 역사가이다. 벤투리의 질문은 크게 세 가지로 첫째는 정치적·종교적 자유가 자유에 적대적인 정치세력에 의해 억압당할 때 그것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가? 정치적 논쟁 속에서 작은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든 이에게 관용을 보장하는 정의로운 정치체제를 세우는 일에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정치적 엘리트들이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키고 문화적·지적 진보를 보장하는 일에 민중과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홉스봄은 시대 시리즈의 책을 내면서 장기 19세기와 단기 20세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든다. 영국 공산당 당원이기도 했던 그는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특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인류애를 지향한 이상주의, 당의 노선이 학문적인 설명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합리주의, 어떤 개인적 희생에 대한 보상이 없음에도 희생할 각오를 가진 비타협이다.
오후에는 『세계의 역사 2』에서 서양의 우위가 시작되는 대항해와 대항해로 유럽이 달라진 모습을 보았다. 지구본에서 지구를 적도를 기준으로 하여 남쪽과 북쪽을 나누는 가로로 그어진 선은 위도이고 그리니치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위치를 측정하는 세로로 그어진 선은 경도이다. 항해용 크로노미터를 발명하고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어서 항해술이 발달했고 거기에 조선술의 발달로 아시아와 아메리카까지 갈 수 있었다. 대항해로 아메리카에서 온 금은이 스페인의 경제에 영향을 끼쳤고 유럽 전역과 오스만 제국 중국까지도 전통적인 경제관계를 심각하게 교란시켰다. 가격혁명의 위력은 모든 사람이 느꼈고 이로 인해 종교적·정치적 논쟁을 유발했다. 아메리카에서 온 옥수수는 유럽 남서부와 아프리카, 중국까지 퍼졌고 기후의 영향으로 고구마는 중국에 유럽은 감자가 주로 재배되었다. 아메리카의 식용작물로 식량 공급이 늘었고 서아프리카에서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질병의 전파로 아메리카와 태평양의 작은 섬들 같이 고립되어 있던 곳들은 인구가 급감하는 치명타를 입었다. 정확한 의학적 진단을 하기는 어렵지만, 병원균은 배를 통해서 항구에서 항구로 이동했다고 보인다. 유럽은 오히려 전염병이 풍토병이 되면서 인구가 급증했다. 유럽은 대항해로 경쟁 우위에 섰다. 세계 모든 지방에서 수집된 기술과 지식으로 유럽의 문화를 풍성하게 확대할 수 있었다.
1500~1648까지 유럽은 권력이 소수의 중심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유럽은 중앙집권적이고 군주제적인 정부의 지배를 받는 국가의 형식을 갖춰갔다. 프랑스·스페인·잉글랜드·스웨덴 이런 나라에서는 통합이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유럽의 중앙은 작은 단위가 종주권을 장악했다. 폴란드나 헝가리는 귀족과 도시의 특권이 국가 규모의 군주제 안에 있었다. 러시아와 투르크는 정치적인 중앙집권화가 한 민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언어와 종교를 가진 민족들을 단일한 제국의 지배 아래 복속시켰다.
정치적 통합의 과정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최초로 고안된 정치기술을 알프스 북측,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적용한 것이다. 알프스 이북은 이탈리아보다 큰 영토적 규모로 진행되고 영토가 확대되자 유럽 정부의 실력은 엄청나게 증대되고 더불어 국제정치의 전체적인 규모도 확대되었다. 다른 관점은 종교개혁에 수반된 격렬한 행동과 감정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교회를 쇄신하고 성스럽게 만들려는 노력은 정치에 영향을 끼쳤다. 종교적인 힘은 인간의 정신과 행동을 변화시켰다. 교리상의 의견 차이는 유럽을 종교의 진리를 내세워 전쟁을 하게 만들었다. 세 번째 관점은 정치권력이 상대적으로 소수의 중심에 통합된 사실은 군사기술의 급속한 진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중세의 기사는 말과 무구를 갖춰 훈련을 하면 자립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화약과 탄약의 보급, 대포의 수송, 훈련기술 등은 지방 권력자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강력한 정부는 도시가 잘 발달한 곳에서 새로운 군사기술의 복잡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정부였다.
해상에서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강국이 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 개척했다.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는 동인도회사를 세워 인도양과 동아시아 해역에 사업을 벌였다. 네덜란드는 포루쿠칼인을 멜라카와 실론에서 몰아내고 향료무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서는 노예 노동력을 이용해 플랜테이션을 조성해서 설탕을 생산했다. 프랑스는 퀘벡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유럽인의 이주와 무역의 확대는 유럽의 능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경제력과 사업체의 발전은 지적이나 예술적 영역에서도 크게 고취되어 유럽 문화를 다양하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이교도적인 고대의 지식이나 기술을 되살리려는 사람은 그리스-로마적인 요소를 찬미하고 성서에 의해 개혁하려는 사람은 유대-그리스도교적 요소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두 운동은 복잡한 상호교류가 있었다. 르네상스는 1350년 무렵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500년경에 절정에 달했다. 예술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고 정치에 대한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미켈란젤로도 있다. 나라마다 독특한 문학이 발전했고 회화도 나라별 특색이 나타났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다. 콘스탄츠 공회의에서 교황군주제가 부활되어 1417년에 교회의 대분열이 치유되자, 다음 세기에는 이단의 활동이 더욱 어려워졌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의 정당성에 도전했다. 면죄부는 상업적인 정신에서 조직된 것이다. 루터는 성직자가 개인과 하느님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는 즉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만인사제주의를 선언했다. 인쇄기로 인해 루터의 견해는 빠르게 독일 전역에 퍼졌다.
칼뱅은 1541년에 제노바에 본부를 설치하고 활동했다.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파가 득세했다. 프랑스는 가톨릭을 고수했다.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의 절반은 루터파에 합류했다. 1500년과 1648 사이에 유럽의 변화에는 종교적 논쟁이 강력한 영향을 행사했다.
종교개혁 중에도 과학의 진보는 이뤄졌다. 갈릴레이는 물리학과 천문학을 연구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을 르네 데카르트는 철학을 창시했다. 파라셀수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월리엄 하비는 의학을 요하네스 케플러는 수학 공식을 발견했다.
유럽인은 서로의 의견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교회, 국가, 직업이 저마다 달라 자기 나름의 입장에서 진리를 추구했다. 이런 다양성이 유럽 사상을 지속적이고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유럽 주변부인 러시아는 볼가 강변의 카잔이 수도인 킵차크한국의 종주권 아래 있었다. 킵차크한국은 몽골 제국의 분화로 생긴 4한국의 한 나라였다. 이들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타타르인으로 불렸다. 대공 이반 3세는 1480년에 본인을 차르로 자처했다. 교역과 농경에 의존하는 러시아 사회는 보병부대에 총을 지급할 능력이 있었지만, 유목민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이반 4세는 1552년에 카잔을 점령하고 4년 뒤에는 아스트라한을 차지해서 볼가강 하류 지역을 정복했다. 그다음 세대는 오비강 중류 지역에 정착했다. 강을 여행하는 기술을 사용해서 1638년에 러시아 탐험가는 태평양의 오호츠크해 연안에 첫발을 내디뎠다. 시베리아의 수렵채집인에게 공물로 모피를 받아 수출해서 러시아는 국가재정에 큰 도움을 받았다. 모스코바 주교는 아들 미하엘 로마노프를 차르로 1613년에 선언했다. 로마노프왕조는 1917년까지 이어졌다. 러시아에 농노제가 발달한 이유는 일할 농민이 없다면 쓸모없는 땅이어서 법령을 제정해 직업을 물려받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도시는 법률형식과 관계가 스페인적이고 가톨릭에 맞게 재편되었다. 스페인의 법은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았다. 공식 정책은 인디언의 권리를 철저하게 보호했다. 그래서 인디언들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디언들을 빚을 지게 한 뒤에 채무를 강제하고 빚은 세습시켰다.
유럽의 다른 식민자는 포루투칼,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였다. 그들은 사탕수수 재배가 확립되자 플랜테이션 농업을 위해 흑인 노예를 데려와 아메리카 대륙의 토지를 개발했다.
유럽이 힘을 가지자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심하게 수탈을 당한다. 이 부분을 간략하게 서술해서 아쉽다. 지은이는 이렇게 서술한다. 1648년에 그토록 극심한 문화적 풍토의 전환을 겪은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역사 공부를 마치고 지도를 그려보았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그려보려고 하는데 역시 균형을 잡는 것은 어렵다. 위도와 경도를 이용해서 지도를 그리면 더 정확하게 그려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려보니 균형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와우! 영님쌤의 공부가 비약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후기네요! 내용 정리도 훌륭하지만, 그 이상으로 오전 텍스트 토론부터 오후에 지도 그리기까지 정리하실 줄이야... 감동입니다. ㅠ
그리고 지도는 그리면 그릴수록 '우리의 지도'를 그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입체적인 것을 평면적으로 그리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왜곡이 생기는 것 같아요. 도법을 발명한 사람들도 어떤 왜곡을 바로잡으려고 했다는데, 결국 완벽하게, 사람들 눈에 딱 들어오는 지도는 아직까지 없으니까요. 축적이 이상하더라도 옛날 지도들이 과연 비과학적이었는지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고... 지도가 안 그려지니 참 여러 생각이 드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