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그리기는 이제 아시아로 넘어왔습니다! 지중해를 그리느라 한동안 고생 좀 했는데, 이번에는 동남아시아를 그리느라 고생 좀 할 것 같습니다. 미얀마와 말레이시아를 그렸는데 왜 지렁이 2마리가 겹쳐진 것처럼 보일까요? 흠...
그리고 이 지도는 1979년 호주의 맥아더란 사람이 호주를 중심으로 뒤집은 세계지도입니다. “우주에 떠 있는 지구는 실제로 위아래가 없기 때문에 이 또한 잘못된 지도가 아니다”라고 했죠. 저희는 아직 저희만의 세계지도를 그리지도 못하고 있지만, 시즌을 거듭하면서 특정 대륙을 중심으로 삼거나 돌려서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이번 그때는 좀 더 수월하게 그릴 수도 있겠죠?
다음 시간에는 《역사학의 거장들》에서는 필립 커틴과 라인하르트 코젤렉을, 《세계의 역사2》은 23~25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과 입발제는 은주쌤께 부탁드릴게요!
로렌스 스톤, 사회사의 이정표를 세우다(1919~1999)
역사학은 아무래도 ‘역사적 사건’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읽는 책에 따르면, 역사학이란 학문은 독일의 랑케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랑케는 국가(nation)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학이란 학문 분야를 요청했죠. 여러 거장들을 거쳐왔지만, 여전히 역사학은 지금의 사회에 이르기까지의 혹은 지금의 사회가 나아갈 변곡점들을 어떻게든 제시하고 설명하려는 성향을 크게 떨쳐버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혁명을, 러시아에서는 인민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했죠. 당연히 영국에서도 영국혁명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역사학자가 바로 로렌스 스톤이죠.
정확히 말하면, 로렌스 스톤은 영국혁명을 분석하기 위해 젠트리 계급에 대한 해석에 좀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다른 선생님들도 젠트리 계급이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요. 인터넷에 쳐봐도 ‘귀족으로서의 지위는 없으나 가문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받은 유산 계층’ 정도의 설명만 나옵니다. 아마 프랑스에서 부르주아 권력의 형성이 기존의 귀족 계급을 전복시킨 것과 유사하게 영국에서는 젠트리 계급이 세력을 형성함에 따라 기존의 권력 구도를 엎어버린 효과를 냈던 것 같습니다. 스톤의 저작에서 ‘정신의 젠트리화’, ‘~형 젠트리’ 같은 표현들이 나오는데, 아마 어떤 식으로 젠트리 계급이 등장해서 어떻게 사회적 변곡점이 됐는지를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이미 당대에 순순히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저희는 이 논쟁 자체를 따라가기보다 왜 로렌스 스톤이 ‘사회사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업적으로 얘기되는지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스톤은 자신의 작업을 ‘헌법사’, ‘심리사’, ‘계랑사’와 분명히 구별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역사를 “지적 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요인에서 찾았”는데, 이때 그가 주목한 사회적 요인이란 ‘가족의 형태’였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전통적인 ‘개방적 혈통가족’으로부터 근대의 ‘폐쇄적 가정 중심의 가족’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370) 그는 이러한 분석을 통계적으로 진행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J곡선’ 같은 모델도 썼다고 하네요. 그는 한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가정’에 주목했고, 가정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영국혁명이 일어나거나 사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죠.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스톤은 역사를 분석함에 있어서 새로운 관점, ‘사회학’이라는 다른 학문 분야의 개념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저작들은 아직도 논란에 붙여졌다고 하는데 아마 그건 그만큼 그의 역사학이 여전히 유효한 점이 있기 때문이겠죠? 실제로 스톤은 동료들에게 “범죄, 일탈, 마술, 대중문화, 노예, 농민, 노동자, 가난한 자를 연구하라고 끈기 있게 힘주어 추천했”다고 하죠.(366) 영국의 최초의 사회사학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사를 연구한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모델을 제시한 사회사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조르주 뒤비, 사건의 역사를 기억의 역사로 쓴 중세사가(1919~1996)
저희가 이름이라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거장 중 한 명이네요! 규문각 한 구석에 꽂혀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로 이미 저희는 세미나 첫 시간 때부터 ‘조르주 뒤비’를 기다려왔습니다. 하지만 기다려온 만큼의 이해는 없었습니다. ^^;; 그가 왜 지도로 세계사를 보게 됐는지는 이 텍스트에서 별로 다뤄지지 않았거든요. 대신 뒤비에게는 지리학과 역사학이 매우 밀접하게 다뤄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뒤비는 다른 대부분의 거장들과 달리, 처음부터 역사학에 뜻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그는 지리학에 매료되었습니다. 책에서는 그가 지리학에 매료된 것이 후에 그의 역사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역사가로서 뒤비가 지리학으로부터 영구적으로 배운 것은 “사람들이 무리 짓고 사는 현상들을 정확히 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에 가시적인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풍경과 지도제작 작업의 분석을 통해 배운 것은 “모든 인간 활동이 물질의 관할 아래 있는 것과 그 아래 있지 않은 것, 즉 자연에 속하는 것과 문화에 속하는 것을 불가분하게 연결시킨다”라는 것이었다.”(377)
뒤비는 자신의 역사학적 탐구가 결코 지리학적 연구와 별개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구를 진행했는지는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지리학적 증거들을 통해 역사를 분석한 덕에 그는 사건 중심의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리란 모든 환경을 동등하게 독특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역사적으로 접근한 뒤비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환경과, 다른 사람들과, 그들이 형성한 자연환경 등과 맺는 관계가 어떠한지를 실타래를 풀 듯이 추적하게 되죠. 그는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계속해서 기존의 정치사로부터 거리를 둘 것을 강조하죠.
지리학과 더불어 뒤비는 사람들의 인식 조건을 분석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그가 살고 있는 ‘실제’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그것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 아닌 그것에 관해 떠오르는 상에 따라 규정한다. 인간은 문화의 결과요 역사의 경과 속에서 되는 대로 물질적인 실제에 따라 형성되는 행동형태에 이 상을 적응시키려고 노력한다.”(381) 즉, 그는 인간이 ‘실제’를 인식하는 표상의 체계와, 그러한 표상과 더불어 행동과 태도, 물질적 여건이나 제도 같은 조건 이 세 가지 차원이 어떻게 서로 협력하게 되는지를 연구합니다.
이 중에서도 뒤비는 특히 우리가 실제를 인식하게 되는 표상 체계를 분석하는 데 힘을 쏟습니다. 이때 그의 표상 체계란 블로크의 ‘심성’ 대신 사용한 ‘상상’이란 개념입니다. 그것은 랑케로부터 비롯된 객관주의와 실증주의로부터 벗어나 ‘증인’의 위치에서 실제를 바라보는 역사관을 세우려는 시도였는데요. 이 지점에서는 확실히 프랑스 아날학파의 색깔이 났습니다. 그는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하여 과거를 가로질러 파악할 뿐 아니라,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는 것이 기억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어떤 과거가 기억되는지조차 이미 역사적으로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죠.(384)
특기할 만한 점은, 그의 역사 서술 자체도 대단하지만, 독일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서로에게 조금씩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확실히 나라별로 색깔이 분명했습니다. 아날학파가 아무리 혁신적으로 사유를 전개해도 모든 나라의 역사학 전통을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부족했죠. 그러나 뒤비의 저술은 실증주의에 입각한 정치사적 전통이 강한 독일에도 번역이 되면서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아직 독일의 역사학계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독일인에게도 읽힌다는 점에서 뒤비의 작업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