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첫 시간이다. 오전엔 사회사의 이정표를 세운 로렌스 스톤과 사건의 역사를 기억의 역사로 쓴 중세사가인 조르주 뒤비를 공부했다. 스톤은 10대에 찍은 사진으로 중세 영국 조각에 대한 광범한 개설서를 완성했다. 그의 멘토인 토니의 중요 논문에 자극을 받아 젠트리의 부상에 몰두했다 그는 영국 혁명의 원인을 사회적 요인에서 찾았고 17세기 영국 혁명의 다양한 원인을 16세기까지 추적하면서 유럽 근대의 최초의 대혁명으로 제시했다. 스톤은 위험한 변화를 택하여 항상 새로운 주제와 방법론을 택해서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역사의 황제’라고 칭송하지만, 그의 반대자들은 통계적 계산에서 엉성하고 일반화에서 사변적이고 논박에서 무책임해서 ‘역사의 괴물’이라고 말한다. 조르주 뒤비는 중세 농촌 세계를 다룬 역사가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랑스 역사가이다. 지리학에 매료된 뒤비는 지리학에서 “사람들이 무리 짓고 사는 현상들을 정확히 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에 가시적인 생명을 부여하는 것”을 배웠다. 1944년에는 『역사가의 즐거움』이란 책에서 길에 따라 구분한 생의 단계가 시작되었다. 대학을 통해서 올라가는 길이 있었고, 자신의 전집의 특징이 될 것을 발견한 ‘엑스’로부터의 길, ‘브르델의 길’, 1958년에 제네바의 출판가 스키라가 중세 예술을 위한 총서를 만들고 예술과 사회의 관련성을 서술해달라는 요청을 함으로써 시작되는 길이 있다. 너무 열심히 달려서 오전에 세계의 역사까지 공부했다.
21장:이슬람의 영역과 그 지배하의 힌두교와 그리스도교 사회, 1500~1700과 22장:동아시아의 같은 시기를 공부했다. 서유럽이 대항해를 통해 신대륙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해서 그리스도교가 더 번창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슬람도 역시 아메리카를 뺀 다른 대륙에서 영토와 신민을 확장했다.
인도는 북부 산악지대에서 유입된 도망자와 모험가들을 전투 인력으로 수용하여 1565년에 인도의 힌두 제국인 비자야나가르 왕국을 제압하고, 1658년에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가 인도의 거의 전부를 통일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1513~1526년에 연안지방 무슬림 국가들의 연합이 힌두화된 자바 제국을 무너뜨렸다. 이때부터 상인과 주유하는 수피 성자들에 의한 포교 활동으로 동남아시아의 항구와 해안지방을 따라서 필린핀의 만다나오 섬과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까지 이슬람이 전파되었다.
아프리카는 대상의 활동으로 육로로 전파되었다. 교역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이슬람은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시골과 외딴 지역에는 군사작전이 전개되고 행정적 압력이 가해지면서 자연스레 무슬림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다. 보르누, 모로코, 팀북투, 소코토와 같은 서아프리카 나라에서 이슬람이 번성했다.
유럽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저항이 조직적이었다. 그렇지만 1543년까지 대부분의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었다. 1699년 이후에도 루마니아는 오스만 사회의 지역적 변종이 발전을 거듭하여 뿌리를 깊게 내렸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 및 중부 스텝 지대에서 유일하게 이슬람이 약해진 곳이다. 러시아는 킵차크한국, 카잔한국, 아스트라한, 시비르한국을 정복했다. 스텝지역 동쪽에서는 티베트 라마교 ‘황모파’(黃帽派)가 몽골의 이슬람을 제압하고 이리강 주변의 중앙아시아 일원을 차지했다. 스텝 지대는 장래성이 없는 빈약한 곳이어서 교역로가 북쪽 시베리아 하천과 남쪽의 대양으로 변경되자 이곳에는 무슬림 상인이나 성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라마교가 이곳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해상, 즉 인도양과 지중해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는 했지만 무슬림을 축출할 정도는 아니었다. 16세기 말이 되자 포르투갈인은 항만이용료를 받아 수입을 올리기 위해 무슬림 선단의 입항을 승인하는 결정을 내렸다. 1600년 이후에는 네덜란드, 잉글랜드, 프랑스 선단이 신흥 해상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조약을 체결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다졌고, 선교활동을 자제했다. 신흥세력의 경제활동으로 무슬림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이 약해졌다.
흑해와 에게해 북부의 연안 지방인 오스만 제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옥수수와 담배, 인도에서 목화 같은 환금작물을 생산하는 상업적 농업이 발달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나톨리아의 농민들은 옥수수를 자신의 식량과 가축의 사료로 삼기 시작했다. 신종작물은 높은 생산성으로 많은 양의 밀과 소를 수출할 수 있었다.
인도양에서는 유럽의 상인들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면서 아시아 경제를 변화시켰다.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상인들은 물자수송을 확대해서 즉 물자를 수송한 수익으로 아시아산 상품을 구입하고, 유럽에서 상품을 판매한다.
잉글랜드인은 서부 인도에서 면직물 제조업을 시작했는데 직물의 양을 계획 생산하였다. 판매는 주로 상업적인 가치를 지닌 물건이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해안지방에서 물물교환식으로 이루어졌다. 덕분에 버마와 태국의 해안지대, 필리핀 제도, 자바와 수마트라는 급속한 상업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동아프리카 해안에서는 이슬람 세계에 노예를 공급했다. 우리는 “사람을 수출하는”과 “노예를 공급”했다는 표현으로 서양 사람들의 시각에 언성을 높였다. 이것은 약하다. 22장에서 중국, 다음으로 일본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한 줄도 없다.(흑흑흑~ 슬프다!)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은 향료 제도는 플랜테이션으로 체계적인 경제적 변용을 체험했다. 지역의 유력자는 플랜테이션의 관리자로 경작자는 반농노가 되었다. 자바인은 아라비아의 커피와 중국의 차, 인도의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네덜란드의 정책은 최고의 상품을 조합하여 극도의 이윤을 만들도록 치밀하게 계산한 것이다.
무슬림은 중세의 십자군이나 이베리아의 십자군을 물리쳐서 이슬람의 영역은 계속 확장되었다.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뉜다. “극단적인 파벌 싸움으로 다수의 분파가 생겨났다. 일부는 아바스 왕조는 물론이고 타협의 여지가 없는 자신들의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는 모든 기성 체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집단은 시아파로 부른다. 이에 반해 아바스왕조의 정책에 의해 결정된 틀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대다수는 수니파라고 불린다.”(『세계의 역사 1, 312쪽) 수니파와 시아파에 대한 간략 정의. 현주샘의 궁금증, 더 자세한 것은 다음 학기에 공부해보기로 했다.
1502년에 투르크의 지도자 이스마일 사파비가 자칭 왕(샤)임을 선포했다. 이스마일은 1508년에는 바그다드를 우즈벡을 점령하여 동부 국경지대의 안전을 확립했다. 1514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찰디란에서 전투를 벌였다. 사파비왕조의 등장이 이슬람 세계에 불안감을 준 것은 왕의 부하들이 왕을 알라의 화신으로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광신적으로 되고 군대의 승리가 더해지자, 이슬람의 세계에 혼란을 초래했다. 1514년에 이스마일의 지지자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오스만의 권위에 도전했다. 이스마일은 종교혁명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껴 시아파의 주요 분파인 십이파의 율법학자를 소집하여, 종교상 모순을 제거하는 작업을 했다. 이 목적을 위해 수니파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시아파 집단을 탄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자신의 권력 기반을 정통에 가까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면서 짧은 교리문답서을 널리 배포하였다. 이스마일은 십이파의 교의를 널리 주입시켰다.
오스만의 술탄 셀림은 아나톨리아 반란군을 진압했고, 계속해서 군사원정으로 시리아, 이집트, 아라비아를 병합해서 이스마일과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하고, 메카와 메디나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술탄 슐레이만은 수니 정통파를 조직화하여 시아파 이단을 타도할 수 있는 힘을 키웠다. 수니파의 종교 교육기관을 국가에서 후원하고, 모든 도시의 성직자를 국가의 관리 아래 두었다. 슐레이만의 규제는 이스마일의 종교혁명에서 일어난 광신과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과 국가에서 준 봉급에 의해 이의를 제기당하지 않았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결은 모든 무슬림 국가와 민족들에게 곤혹스러운 선택을 강요했고, 종교의 원리가 충성의 지표가 되기도 했다. 인도의 무굴 제국은 두 분파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사파비 국가의 아바스대왕 시기에는 국가의 힘은 절정이었고 종교적 혁신은 잠잠해졌다. 1638년 술탄의 정부는 과거의 적과 지속적인 휴전협정을 체결해서 종교적 긴장은 많이 완화되었다. 1656년이 되면 콘스탄티노플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신임관리인 모하메드 쿠프릴리는 시아파가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시기에 크레타, 알바니아, 남부 불가리아에서 대규모 이슬람교로 개종이 이루어졌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로 페르시아의 시상이 메말라버렸다. 수니파의 학자들은 자기의 사회적 책무를 지지 않았다. 그들은 시아파의 도전을 종교상의 교의로 받아들이지 않고 속세의 무력에 의존해서 모든 경쟁자와 비판자를 힘으로 억압했다. 그리고 공동체 내부로부터 종교적인 공격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 코란을 되풀이해서 읽고 율법에 관한 주석서를 암기하며 알라의 은총을 확인하려 했다. 이들은 무슬림이 군사력을 제공할 수 있을 때는 가능했지만, 힘이 쇠약해지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적 무기력증이 예술의 쇠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건축가와 예술가에 대한 충분한 후원으로 아바스 대왕은 이스파한이라는 정원도시를 건설했고 타지마할이라는 웅장한 규모의 왕궁도 건설했다. 페르시아 미술은 인도에서 페르시아의 기법을 사용해서 힌두의 종교적 테마를 묘사하는 새로운 발전으로 이어졌다.
“지적 무기력증”이라는 상황에서 예술이 발달할 수 있었을까? 그리스도교적인 시각에서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이슬람 학문을 그렇게 표현했나?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슬람을 잘 모르는 우리는 역시 다음 학기에 이슬람, 중동을 공부해본다는 생각을 만들었다. 오늘의 결심이 꼭 그렇게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인도는 1500~1700년에 힌두교가 성자 차이타니아로부터 되살아났다. 힌두교는 국가에서 지원하지는 않지만, 전통적인 의식을 행하는 것은 묵인해주었다. 수르 다스와 툴시 다스도 힌두교 부활에 공헌했다. 힌두의 시를 사용하여 힌두의 신화와 전설에서 따온 주제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종교 축전에 적합한 성가와 찬가를 힌두어를 사용하는 북부 인도의 일반 대중을 위해 창작했다. 1565년 이후 인도가 쇠퇴한 후에도 종교의 형식은 변하지만, 인도인 대다수는 힌두교에 언제나 충실했다.
불교는 실론의 신할리족, 버마의 버마족, 태국의 타이족 사이에서 국가종교가 되었다. 이들은 유럽인의 존재가 자신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위협한다고 판단되자 쇄국정책을 제도화했다.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사람은 이슬람에 갖는 것과 같이, 서방 라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졌다. 의학자들은 이탈리아와 유럽의 과학 중심지에서 전해오는 사상을 계속 접했다. 그리스의 의학자들은 파도바 대학에서 수학했고 이들은 정교회와 라틴 그리스도교의 교류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중요한 전달통로였다.
오스만 정부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중대한 변화는 그리스교도의 마을에서 노예를 징발하던 조치를 중단했을 때이다. 농민들에 대한 동정심이 오스만의 행정에 전반적으로 반영되는 시기와는 전혀 다른 경향으로 제국의 고관들이 농촌주민들을 착취해서 그들의 생활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그리스도교의 불만이 커졌다.
맥닐은 무슬림의 쇠망을 안팎의 도전에 대해 직면할 능력과 의지가 없었다고 본다.
1513년에 포루투갈 상인은 남중국 연안에 도착한다. 이때 중국은 명나라였고 당파싸움이 있고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스텝 지대와 해안에는 습격이 심각했다. 명나라는 해군을 허가하지 않았고 해산된 수병이 해적에 가담함으로써 뱃사람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만주족이 청을 건설하고 청에 대항한 명조의 망명자는 타이완으로 가서 1683년까지 청의 권위에 불복종했다. 만주족은 만주족 수비대를 중국 전역의 전략적 요지에 배치했다. 만주족은 고유한 의상과 독특한 풍습을 고수했다. 행정에는 한인도 기용했고 과거제를 시행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횡단해 중국과 모피무역을 시작했다. 두 나라는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외몽골과 중앙아시아 극서의 스텝 지대 대부분은 무인지대가 되었다. 이 조약이 잘 지켜지지 않았고 몽골인과 칼미크족이 티베트와 종교적, 외교적 관계를 맺는다. 중국은 이들이 새로운 야만족 연합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해서 다시 전진정책을 폈다. 티베트는 순순히 무릎을 꿇고 칼미크 연합군은 천연두에 1727년에 캬흐타 조약으로 일단락된다.
청의 해상방위는 일본의 외양항해 금지와 선박의 건조도 중단시켜 중국 연안지방의 해적 약탈이 근절되었다. 중국정부의 지방관과 포르투갈의 상인공동체의 대표들 사이에 비공식적인 협정의 체결로 해군을 건설하지 않아도 해적으로부터 안전했다.
중국 전역에서 행정기능의 회복으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인구는 증가하고 아메리카에서 온 고구마와 옥수수로 농촌사회는 직인에 의한 제조업이 성장하고 상업활동의 확대와 보조를 맞추며 발전했다. 유럽 상인과 교역도 활기를 띠었다. 중국의 사업가들은 저렴한 도자기의 대량생산체계를 발전시켰다. 덕분에 중국의 전통을 강화했다. 그들은 견고한 보수주의자였다. 전통과 학문에는 불만이 없었고 유럽인들의 흥미롭고 신기한 것들만 관심을 끌었다. 새로운 지리학적 정보, 진보된 천문학 기술, 자명종과 같은 재미있는 기구는 가치를 인정받았다. 1601년에 이탈리아의 마테오 리치가 궁정에 입궐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아서 교류가 있었지만, 중국의 지식인에게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다.
일본은 16세기 초까지 만성적인 내란을 겪고 있었다. 1540년에 도착한 포르투갈인으로 인해 정세가 변했다. 유럽식 의상과 그리스도교로 개종이 유행했다. 대포와 소총이 유입되자 군사비를 댈 수 있는 대영주로 정치적 통일이 이뤄졌다. 일본은 1598년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었다.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우수한 지도력으로 권위를 얻었고 무가 사이에 체결된 동맹에 기반을 두어 다스렸다. 조선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다 사망해서 그 뒤를 도쿠가와가의 이에야스가 이었다. 이 신중한 지도자는 정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체계적인 작업에 착수했고, 이것은 해적의 통제를 말한다. 해상 활동을 규제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금했다.
1609년에 네덜란드 선박이 일본에 나타났다. 무기를 받을 수 있는 다른 창구가 생기자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 1637년에 규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발본색원하기로 작정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200년 이상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을 지배했다. 전쟁이 끝나자 사무라이들은 파산을 했고, 이들의 권리를 사들인 상인들로 인해 활발한 시장경제가 농민과 지주계급 사이에 끼어들고 일본사회에 깊이 침투하여 거의 전인구에게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도시의 활기찬 서민생활과 엄숙한 예법을 중시하는 사무라이의 공식문화로 뚜렷하게 나뉘는 이원화 양상을 보였다.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지금의 세계사가 얼마나 유럽 중심적으로 서술되는지를 확인하게 되고, 하나의 중심으로 뭉쳐지지 않으면 '발전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매 시간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또 세계사를 까니까 얼른 다른 관점에서 서술된 세계사를 읽고 싶기도 합니다. 으음... 다음 학기를 무엇으로 공부할지 계속 고민이 되네요! ㅋ
그나저나 "우리나라는 한 줄도 없다.(흑흑흑~ 슬프다!)" 여기서 웃어버렸네요. ㅋㅋ 뭐, 그만큼 한국이 세계적으로는 '마이너'하다는 거겠죠? 마이너한 곳에서 마이너한 세계사를 공부하는 건 매우 바람직한 방향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