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마이너 세계사가 드디어 개강했습니다. 역사론을 공부하는 한편 ‘혁명’을 주제로 세계 이곳저곳의 역사를 바삐 읽어갈 생각을 하니 슬슬 집 나갔던 긴장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입니다. 첫 시간은 에티엔 발리바르의 <역사 유물론 연구>와 <호치민 평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역사 유물론도, 호치민도 모두 생소합니다. 무엇보다 이 두 책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혁명’이라는 말이 지금 우리에게는 가장 낯선 단어 같습니다. 세계를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지, 왜 혁명을 말할 수밖에 없는지 계속 물으며 읽어가야겠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수입’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말은 많이 들었는데 어쩐지 연이 없던 영역입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만 갖고 있는 역사관처럼 보여서일까요? 그런 ‘주의’를 갖는 사람이 생각하는 역사의 방향성.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역사 유물론 연구> 1장에서 마르크스의 생애를 추적하며 공산주의란 단지 특정 엘리트의 ‘주의’에 불과한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마르크스주의자가 걸려 넘어진 역설을 계속 생산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죠. 그 역설은 이렇습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자율적인 이론은 프롤레타리아에게서 나와야 하는데, 그럼 마르크스의 이론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운동에 적용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발리바르는 이런 ‘상식’에 걸려 넘어지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즉 프롤레타리아가 만든 이론이라 해서 꼭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죠. 당시 프롤레타리아 이론의 대변자들은 사실 프티-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대표자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결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계급적 자율성 속에서 지니는 프롤레타리아 이론이었고요. 즉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계급적 자율성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지배하는 조직화의 형태들”을 발견했고, 그것을 노동자계급 안으로 수입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였던 것이죠.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특별히 노동자를 고려하고 노동자운동에 이식하기 위해 고안된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자운동이라는 실천과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이 만나는 역사적 과정이 있을 뿐이죠. 실제로 1864년 결성된 제1인터내셔널(국제 노동자 연합)은 <공산주의자 선언>의 구호를 인용하긴 했지만 ‘공산주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정부주의적이었다고 합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이런저런 시도 가운데 마르크스주의가 ‘수입’된 것이죠. 이렇게 볼 때 어떤 사상이 특정 계층만을 위한다고 간주하는 건 얼마나 단순한 생각인지 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그 사상이나 이론이 어떤 실천과 만나 펼쳐지는지, 그 관계 자체가 아닐까요.
식민지 문제와 혁명
사회주의와 만나 독특한 결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 바로 호치민(1890~1969)이 아닐까 싶습니다. 호치민이 태어났을 때 베트남은 이미 프랑스의 식민지였습니다. 프랑스는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베트남을 수탈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주입시켰습니다.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호치민은 어려서는 유교 경전을 읽었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프랑스식 교육제도에 따라 교육받았습니다. 당시 베트남 지식인들은 식민지라는 문제 상황을 두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 골몰하고 있었죠. 유교 정신에 따라 베트남의 황제에게 충성을 다 해 싸워야 할지(그러나 그는 프랑스 식민지의 꼭두각시였습니다), 프랑스에 협력하면서 타협할지, 아니면 일본이나 미국 같은 외세의 힘을 빌려야 할지.
호치민은 바로 자신의 노선을 정하지 않습니다. 1911년, 호치민은 일단 ‘바깥’의 상황을 알기 위해 프랑스행 배를 탑니다. 그리고 호치민의 방랑이 시작됩니다. 선박에서 주방장 보조 일을 하며 파리에 도착한 호치민은 처음으로 전차를 보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화려한 파리의 모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도 함께 포착합니다. “왜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를 문명화한다고 하기 전에 자기 동포들부터 문명화하지 않는 거지?” 그는 프랑스가 표방하는 문명이 사실 허울만 좋은 수탈의 기제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카페에 들어선 자신에게 예의를 차리며 친절하게 구는 프랑스인이 식민지에서는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도 함께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프랑스의 프랑스인들은 선량하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아주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이다. 고향에서는 판 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프랑스인들은 우리 동포들이 그들을 위해 일하다가 익사하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식민주의자들에게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의 목숨은 한 푼의 가치도 없다.
호치민은 식민주의가 ‘친절한’ 프랑스인의 본성을 가리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베트남인 공동체를 만들고 식민지 체제에 대응하는 효율적 세력으로 전환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또 조선이나 튀니지인 등 식민지 통치에서 독립하기 위해 활동하는 다른 민족 단체와도 접촉하고 있었죠. 그의 활동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최초의 사건은 1919년 베르사이유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 베트남 독립에 관란 8개를 청원한 것이었습니다. 베트남인의 정치적 자치, 민주적 자유, 정치범 사면,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의 동등한 권리, 강제 노동 폐지, 소금·아편·주류의 세금 철폐 등의 내용을 담은 이 8개조는 그 후 당국의 감시를 받고 종종 회유를 목적으로 한 식민국과의 면담에서도 일관되게 언급됩니다.
그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열강의 ‘좌익’ 진영은 식민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식민정책으로 고통 받는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당연히?) 말합니다. 제2차 인터내셔널(1889~1916)에서 레닌은 제국주의 정책에 대항해야 한다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원칙을 선언합니다. 아예 제3차 인터내셔널(코민테른, 1919~1933)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호치민은 프랑스 좌익이 보인 식민지에 대한 미적지근한 반응에 실망합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은 식민지 해방에서 시작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1923년 모스크바로 넘어간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그는 1924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5차 대회에 참가해 식민지 문제를 끈질기게 언급합니다.
여러 동지들은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식민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달걀이나 돌을 깨고자 할 때에는 깨고자 하는 대상에 상응하는 힘이 있는 도구를 신중하게 골라야 합니다. 그런데 왜 여러 동지들은 혁명을 하겠다면서 여러분이 싸워 이기고자 하는 적에 상응하는 힘을 기르고, 선전을 해나가지 않는 것입니까?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보양하고, 자신을 방어하고, 여러분과 싸우는데, 여러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
인터내셔널 정신과 결합한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변모 안으로 ‘수입’되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사상이 되었다면, 호치민의 마르크스주의 혹은 레닌주의는 식민지 해방의 역사 속에서 활용 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역사상의 조직이나 인물을 ‘~주의’로 환원하는 것은 얼마나 단편적인 사고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또 혁명 하면 단순히 계급의 전복을 떠올렸는데, 사실 시대와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사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호치민은 자신의 시대에 맞는 혁명은 무엇보다 식민지의 해방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혁명이란 어떤 것일까요? 호치민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생각해볼까 합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호치민 평전> 5장~8장
<역사 유물론 연구> 78쪽~97쪽 읽어옵니다.
<역사 유물론 연구> 발제는 규창입니다.
금요일에 만나요!
호 선생님의 여정을 따라가 보면 그의 엄청난 활동력과 담대함에 놀라게 됩니다! 그는 대체 어떤 생을 펼쳐낸 걸까요? 아직, 1/4밖에 읽지 않았지만 그의 삶은 어떤 삶보다도 밀도가 높아 보입니다. 저도 이번에 <호치민 편전>을 읽으면서 호 선생님이 식민지 문제 상황에서 프랑스를 배우겠고 모험을 결단하는 장면, 프랑스에 가기 위해 온갖 잡일을 꿋꿋하게 하는 장면,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들과 만나는 장면, 그리고 인터내셔널에서 식민지 문제를 끈질기게 언급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호 선생님의 다음 발걸음은 어떨까요? 벌써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