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공지 : 호 아저씨의 모순
=마르크스주의는 정치경제철학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를 떠올릴 때 가장 잘 넘어지는 부분이 ‘경제주의’입니다. 생산양식(하부구조)이 이데올로기(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마르크스는 어떤 정치경제학 용어도 생산하지 않았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정치경제학의 해결책도 대안도 아닙니다. 차라리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사'로만 생산양식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비판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이라는 체계 안에 이미 투쟁(모순)이 있다는 것을 분석하고, 이를 '계급 투쟁의 역사'로 풀어냅니다. 이 계급 투쟁은 단순히 물질적인 문제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생산이 일어나는 과정 안에 이미 착취가 내재되어 있고, 그것은 기술의 문제(물질적 생산력이 구성하는 토대)와 노동에 대한 관념(상부구조: 학교교육, 문화, 법률)과 함께 갑니다. 생산양식이 '경제사'로 환원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생산양식의 분석은 사회적 형태, 생산관계를 분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유물론은 역사를 주체, 원리로 환원하는 ‘본질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어떤 주체가 추동하는 힘이 아니라 배치의 역동적 과정으로 역사를 사유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죠. 생산 ‘관계’, 규정된 무수한 관계의 분할선을 묻는 과정과 갈등. 가치의 생산 과정이 아니라 가치는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사유하는 역사입니다.
=호 아저씨의 모순
8년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이 드디어 끝났습니다. 프랑스는 물러갔고 호치민은 하노이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럼 드디어 베트남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고, 외세의 압력에도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점령한 남부는 공산주의 정부인 하노이에 적대적인 정권이 세워졌고, 호치민이 있는 북부 베트남 역시 중국의 개입으로 여기저기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노이는 남부의 응오 딘 디엠에게 총선거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호치민과 동료들은 ‘일단 북부를 혁명하고 통일을 하자’고 마음먹고 1954년부터 북베트남의 토지개혁을 단행합니다.
토지 개혁의 과정에는 폭력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호한 성품의 추옹 친이 총서기장을 맡고 단행된 토지 개혁은 베트남 농민들에게 토지를 부여하기도 했지만 무고한 사람의 희생도 도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당 간부들도 고발되면 약식재판에 불려갔고 최악의 경우 처형까지 당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과거 지주들을 ‘중국식’ 혁명 노선을 따랐습니다. 중국에서 보낸 ‘일꾼’들은 베트남 현지 사람들의 맥락과는 무관하게 지주 계층을 비롯해 온갖 사람들을 적으로 낙인찍었습니다. 호치민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일단 그는 지주라고 해서 모두 반혁명세력이라 규정할 수 없으므로 폭력을 자제하라고 권고합니다. 하지만 토지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합니다. 이 시기 호치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편입니다. 토지개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진 않았기에 폭력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평가. 또 한편으로는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중국이 보낸 관리들을 차마 막을 수 없었다는 평가.
당시 호치민의 의중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호치민의 발언이 이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트남 하면 호치민을 떠올립니다. 호 아저씨야마로 베트남의 간판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호 아저씨’의 이미지를 형성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호치민은 정치에 직접 관여하기 보다는 의전 역할을 주로 맡습니다. 모든 직업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사진을 찍은 호 아저씨. 화려한 관저를 뒤로하고 소박한 오두막을 고집한 호 아저씨. 전쟁을 반대하고 폭력을 지양하는 호 아저씨... 이상한 일이죠. 소싯적 호치민은 계속 혁명에 관여하고 전쟁을 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지는 소박하고 선량한, 혁명의 폭력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그런 것에 눈살을 찌푸리는 호 아저씨입니다. 호치민은 이제 호전적인 젊은이들이 잡은 정권의 얼굴마담이 된 것일까요? 베트남은 이제 더 이상 호치민의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이 된 것일까요?
아직 절반의 독립이 이루어진 시기, 호치민의 독립에 대한 염원이란 무엇이었을까요?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호 아저씨의 시선이 국내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호치민은 베트남 혁명을 세계 정세 속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국제적 감각을 발휘한 호치민은 미국의 베트남 침공 때에도 발휘되어, 미대선을 전후하여 베트남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전황을 내다보았고요. 이런 그의 국제 감각은 그가 한 나라의 주석과 국제적 혁명의 일개 요원이라는 정체성 사이를 오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호치민의 ‘노선’은 무엇일까? 민족주의? 국제주의? 아니면 스탈린에게 호치민이 대답했던 것처럼 둘 다? 이 사이의 모순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러 궁금증을 안고 <호치민 평전>을 마무리 합니다. <호치민 평전>을 읽고 생긴 질문은 각자의 글로 풀어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마이너 세계사는 한 주 쉬고(물론 쉴 수는 없습니다...에세이를 써야 하기 때문이죠), 3월 22일 금요일 각자가 만난 호치민에 대한 글을 발표합니다. 호치민을 읽어내는 도구는 바로 <주역>입니다!(야심만만!) 호 아저씨의 생애...그를 관통한 무지막지한 국제정세! 이걸 어떤 괘로 풀어낼지, 기대해 봅시다!
이번 혁명사를 공부하면서 온갖 낭만적인 편견들을 모두 다 걷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호치민의 모든 행보가 과연 옳았는지, 그는 모든 순간에 과연 '성인'과 같았는지 생각한다면, 분명 아니었습니다. 존경스러운 순간이 훨씬 더 많았지만, 논란이 될 만한 지점과 문제들도 적지 않았죠. 그럼에도 호치민을 따라가면서 혁명이란 게 단순히 선과 악으로 판별될 수 없고,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건 혁명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적용되는 사실인데, 언제부턴가 그걸 모르게 된 것 같아요. 다시 정신 차리고 호치민을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