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로 느슨해졌던 공부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우당탕 무진장 수요반이 일등으로 개강했습니다. 한 번 수업에 세 권의 책을 살펴야 하고, 문장을 외우고, 과제를 쓰려니 눈코입귀가 쉴 틈이 없었습니다. 심원한 ‘도道’에 대한 가르침을 허겁지겁 읽으려니 머리가 뻐근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미리미리 했으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기대대로 세미나는 충만했습니다. 다만, ‘좋은 말씀’에 훈훈해지는 영성 충만이 아니라, 구절마다 질문들이 솟아올라 ‘대체 이게 뭔 말이다냐?’가 난립하는 의구심 충만이었습니다. 뭐 하나 뾰족해지지 않고 끝났지만, 마이크는 빈 적 없었고 웃음은 그친 적 없어서 좋았습니다. 돌아보니 파편적인 몇 가지 단어만이 둥둥 떠다니네요. 도가도 비상도, 불언지교, 상선약수, 천지불인, 실기복, 탁약, 추구 등등. 그것들 중 몇 개를 붙잡아 엮어서 간단히 후기를 적어봅니다.
도덕경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는 걸까?
곤란한 점이 참 많은 도덕경은 어디서 어떻게 끊느냐에 따라 해석의 길이 쭉쭉 갈라집니다. 1장부터 그렇습니다. <신역 노자독본>에서는 ‘無, 欲以觀基妙’라고 끊었던 것을 <사유하는 도덕경>에서는 ‘無欲, 以觀基妙’로 끊어버려서 의미가 확 달라집니다. 그래서 무/유와 별도로 무욕/유욕을 개념화해서 풀어가게 되는데요. 무욕은 무의 오묘함이고 유욕은 유의 왕래라고 정리하게 됩니다. 유와 무는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 발생적인 파도와 바다, 무늬와 장 같은 관계였으니 유욕과 무욕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유욕 역시 자연의 상보적인 에너지이자 활동력이죠. 그렇다면 문제는 그러한 유욕과 인간적 욕심은 뭐가 다른가로 좁혀집니다. <사유하는 도덕경>에서는 소유의 욕망, 제한 경제, 이윤추구, 집착, 부자유 등의 표현으로 욕심을 규정하면서, 유욕이라는 자연적인 주고받음과 분리합니다.
하지만 자연적인 욕망과 자연적이지 않은 욕망의 그 경계는 대체 어디서 그을 수 있을까요? 저희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식을 보호하는 것, 맛있는 음식을 찾는 것, 재산을 모으는 것, 누군가가 내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 내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 등은 유욕일까요 욕심일까요? 만약 표상을 만들고 동일자를 설정하는 인식의 기제가 문제라면, 그것은 이미 단세포생물과 같은 유기체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언가가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욕심이라면, 우리가 성인이 되기를 바라거나 혹은 성인이 다른 이들이 번뇌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를(무사무욕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요? 노자를 공부하며 이 질문은 어쩐지 여러 번 반복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무위와 인위,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성인과 성인이 아닌 자의 경계 대한 물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계속하되, 노자를 도식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존 관념들을 고장내기 위해서 즐겁게 질문을 다듬어가고 싶어집니다.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行不言之敎.
참 생각거리를 많이 남기는 문장입니다. 음 상당히 감화력 있나 보군, 하고 슥 지나갈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이상합니다. 여기서 행위자는 성인이라고 명시되어 있긴 한데, 과연 가르침의 대상은 누구이며, 그 내용은 무엇이고, 그 목표는 뭘까요? 성인은 ‘무위로 일을 처리하는’데 무엇을 왜 어떻게 가르치는 걸까요? 다소 산만하게 질문이 제기된 탓에 세미나에서도 통합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만, 재미난 생각 하나가 남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不言’은 진짜 발화가 아니라 우리가 언어에 대해 전제하는 특질이나 기대를 버린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언어가 대상을 지시한다/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 그에 일대일대응하는 효과를 불러와야 한다는 기대 없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죠. 그럴 때 말은 발화되긴 하겠지만 다른 몸짓들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의미 없이 수많은 해석들을 불러일으키는 방편이 됩니다. 노자의 성인은 예언자나 목자가 아니기에 그의 말은 신의 진리가 아닙니다. 말은 그 자리에서 펼쳐지는 그의 신체, 표정, 기운, 일상처럼 펼쳐지는 파동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런 성인의 여러 파동들을 신호로 읽고 접속해 배울 수 있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불언’의 범주에는 도가나 선불교 같은 역설과 유머, 부처님과 같은 대기설법,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불언과 관련된 또 한 가지 재미난 생각은, 이것이 가르침이라는 행위에 항상 끼어드는 위계와 계몽의 구도를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자는 과연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는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백성들도 무사, 무욕, 무의해져서 무위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느꼈을까요? 현재 백성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진단했을까요? 어떤 바람과 이상이 떠올랐을까요? 이런 현실은 그를 안타깝고 사명감을 느끼게 만들었을까요? 말 없고 욕심 없는, 무위적 가르침/배움이란 무엇인지 계속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강의 때 채운샘께서는 성인을 꼭 인물이 아니라 자연의 인격적 면모personality로 보는 방법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도가에서 성인은 한 번도 실제 인물을 모델로 가진 적 없이 애매한 묘사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인을 태고적 왕과 같은 역사적 영웅으로 제시하는 유가와 상반됩니다. 그러니까 도덕경의 성인은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셈이죠. 그래야만 ‘불언지교’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교’의 의미가 상당히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약속된 기호로 현시되지 않으니 배우려는 자의 해석 역량과 능동성이 무척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 없이는 가르침이 성립하지도 않을테니까요. 가르침을 행하는 자가 말도 없이 무사무위한 존재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배움을 행하려는 자의 존재가 필수적이게 됩니다. 유유히 걸어가던 노자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제발 몇 자 가르침을 남겨달라며 죽백을 들이밀었던 누군가처럼요.
근본적인 질문들이 더 이어졌습니다. 8장에서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말하며, 물은 다투지 않는다(不爭)고 말합니다. 제현샘께서는, 어떻게 선이 다툼 없이 이뤄질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좋다는 것은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듯 보이고, 선택은 언제나 다툼을 전제하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선택하고 분별함 없이 존재할 수 없을 터인데, 그렇다면 부쟁하는 상선이란 결국 좋음도 싫음도 없는 비(非)존재에 가까운 것일까요? 물과 같은 상선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건 우리에게 어떤 모습일지 고민하게 됩니다. 강의에서 채운샘께서는 물이 자기 동일성을 고집하지 않는 능동적 수용성이라고 설명하셨는데, 유기체인 우리가 그런 물의 덕을 어떻게 닮고 구현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아마도 과제를 쓰고 세미나를 하면서 뜬구름 잡는 듯한 기분이 들 거라고 채운샘은 말씀해주셨는데요. 이는 사실 노자 텍스트 자체의 독특함 때문이기도 합니다. 의미심장한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무엇보다 도덕경은 저자도 없고 화자도 없습니다. 문장에는 주어가 없어서 우리는 매번 당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노자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우리 인식의 습관을 드러낼 뿐입니다. 어쩌면 동양철학은 인식론을 결여한 게 아니라 그것을 정립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보는 자’를 특권화하지 않았기에 대상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자리가 문제시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서양철학이 21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시도할 수 있었던 탈주체론/신유물론과 공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해체론과 함께 읽는 것이 더 보람있게(?) 생각되네요. 간명하게 쓰려던 목표와 이야기를 균형 있게 전하려던 목표를 둘 다 놓친 채, 부쟁하는 마음으로 공지를 드리며 물러나겠습니다.
▶ 읽을 책
<노자 독본> 10~18장
<사유하는 도덕경> 10~18장
<해체론 시대의 철학> 1부 2장
▶ 과제
1) 노자 구절을 암송합니다.
2) 암송문을 중심으로 개념을 풀어 써옵니다. 질문을 예리하고 명료하게, 자기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로부터 구성해 봅니다.
▶해체론 발제는 인영샘, 간식은 규창샘 부탁드립니다.
김상환 선생님의 <해체론> 서문에서 "현대의 헤체론은 가령 기호를 기호학으로부터, 언어를 언어학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하셨죠. 확실히 도덕경은 온갖 것을 그것이 규정된 것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해체론적 사유가 관통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성을 기존의 이성으로부터, 가르침을 기존의 가르침으로부터 등등 우리 자신의 습관적 인식으로부터 인식을 해방시키기 위한 온갖 시도가 이뤄지고 있죠. 채운쌤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금 시대에 적확한 텍스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도덕경 읽기가 참 재밌네요. 앞으로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