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도덕경>을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처음 읽고 계시는 선생님부터 이미 여러 번 읽으신 선생님 모두 평등하게 <도덕경>의 미묘현통한 구절에 매료되고 있어요. 이 재미난 걸 왜 안하시는지 모르겠군요. _〆(゚▽゚*)
간단하게 <도덕경>과 해체론 이야기를 나눠서 정리해보겠습니다.
<도덕경>의 道, 인식해서 뭐하나!?
사실 이 질문은 공부할 때마다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공부가 어떤 효용을 가지는가?’를 묻는 질문은 거의 모든 세미나에서, 읽는 텍스트마다 반복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질문에 자체에 대해 답변하기보다 이런저런 질문으로 옮겨 받았던 것 같은데요. 가령, ‘도를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도덕경>에서 인식은 어떻게 다뤄질까?’ 등등이 있었습니다.
‘도를 인식한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식’에 대한 이미지부터 건드려야 했습니다. 우리에게 ‘인식’은 애매모호한 의미를 분명하게 확정하는 ‘규정적’ 작업입니다. 그러나 <도덕경>의 성인에게서 그런 인식은 보이지 않습니다. 14장에서 ‘도’가 우리의 인식 혹은 지각으로 명확하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었죠(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윤순쌤은 이에 대해 ‘애매모호’함이야말로 <도덕경>에서 강조하는 인식의 종류라는 내용의 글을 쓰셨죠. 확실히 <도덕경>을 읽으면서 저희는 두 종류의 인식을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인식하는 ‘규정적’인 것과 습관적 인식을 고장내는 ‘분열적(?)’인 인식이 그것입니다. <도덕경> 읽기가 어려운 것도 저희의 습관적인 ‘규정적’ 인식을 계속 고장내도록 촉발시키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 ‘분열적’ 인식을 작동시키는 것은 신체성의 발명과 동시에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때 신체성이란 ‘정신’과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신체’가 아닙니다. <도덕경>에서는 ‘신체’를 말할 때 마음(心), 뜻(志) 같은 비물체적인 것까지 포함합니다. 이런저런 형이상학적인 얘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신체를 이러저러하게 다루라는 얘기죠. 그러나 ‘신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서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욕망을 선별하는 것 아닐까?’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욕망을 선별하는 게 가능하냐?’는 반문도 있었죠. 앞으로 읽으면서 계속 이 질문을 가져가는 것으로 일단 토론을 마무리했습니다.
채운쌤은 이 문제를 해체론과 연관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인식’, 그러니까 ‘앎(知)’의 문제는 ‘알지 못함(無知)’의 극복이 아닙니다. ‘지’와 ‘무지’를 구분하는 한계(혹은 경계)를 넘어 ‘바깥’과 조우하는 가운데 이뤄지는 일에 가깝습니다. <도덕경>에서 끊임없이 선과 악, 미와 추, 장과 단... 대립적인 것들을 넘어가는 사유를 보여주듯, 우리의 이분법적 가치 판단 기준을 넘어가는 순간 ‘도’와 관계하는 거죠. 음... 이렇게 얘기하니까 아주 얄팍한데요. 각자 잘 받아들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상적인 것 몇 가지만 나열한다면, 13장에 나오는 “총욕약경(寵辱若驚)”에서 ‘총’과 ‘욕’을 누군가로부터의 칭찬이나 비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조건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글로벌 노스에서 살고 있는 것을 ‘총’, 글로벌 사우스에서 착취당하는 삶을 ‘욕’으로 본다면, 이에 대한 해체적인 사유로 ‘경’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였고요. 그리고 서양 철학에서는 20세기 후반에 와야 겨우 도달한 논의가 이미 <도덕경>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게 놀랍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주론, 존재론에 대한 이야기에서 ‘신체’에 주목하는 윤리까지 각각의 짧은 장 안에 모두 담겨 있죠. 읽으면 읽을수록 놀라운 텍스트인 것 같아요.
해체, 경계를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작업
하나의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철학이 무엇과 싸웠는지, 이전의 질문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를 공부하는 것이죠. 즉, 역사적으로 그 철학이 놓인 배치를 이해하는 것과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해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해체론을 공부하기 위해 해체론이 나오기까지의 간략한 서양 철학사의 흐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칸트, 하이데거, 들뢰즈, 데리다... 굵직한 사유에 고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채운쌤께서 어려운 부분과 김상환 선생님의 문제의식을 설명해주셔서 숨통이 좀 트입니다.
우리가 <도덕경>에서 볼 수 있는 테마 중 하나가 ‘탈인간중심주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탈-’이란 접미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탈-’이란 ‘부정’이라기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에 대한 사유를 의미합니다. 가령, ‘탈중심’이란 중심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중심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사유하는 것입니다. 시작점 혹은 모든 것의 핵심으로서의 중심이 아니라 그러한 중심 자체가 부재함을 이해하는 것이죠. 현대 철학은 바로 이러한 탈중심적인 사유의 흐름 위에 놓여 있습니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서양 철학은 ‘~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삼아왔습니다. 하지만 칸트에 이르러 인간의 ‘주체로서의 특권적 지위’를 의심하게 됐죠. 그는 사유가 특정한 조건 속에서 가능한 활동이라는 것을 통찰했습니다. 이른바 ‘사유의 조건이자 한계’를 사유하는 흐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채운쌤은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동일자적인 사유를 위협하는 ‘폭력’을 계기로 우리는 그러한 사유가 가능하다고 하셨죠. 우리가 배울 해체론의 사유는 바로 이러한 사유입니다. ‘나’와 ‘타자’,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비생물 등등의 경계가 무너지고 세워지는 변형과 재구성의 작업으로서 해체적 사유입니다. 으음... 쓰고 보니, 알쏭달쏭합니다. <도덕경>도 쉽지 않고, 해체론도 쉽지 않네요! 하지만 공부할 맛이 납니다!
다음 주 공지입니다.
<도덕경>은 19~27장을 읽으시고, 과제와 암송을 잊지마세요~
<해체론>은 1부 끝까지 읽어 오시면 되고요. 발제는 제현쌤이 맡게 됐습니다.
간식은 정옥쌤께 부탁드릴게요.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 재미난 공부를 왜 안 하는지! 도의 효용은 몰라도 도를 공부하는 효용은 알듯도 합니다. 꿀잼 ㅎㅎ
알쏭달쏭한 도덕경은 그 자체로 골짜기(谷)인듯 합니다. 주름이 펼쳐지듯 재미난 이야기들이 솟아나오니까요
총욕약경의 해석 재밌었고요, 강위지용의 실천도 재밌고, 탈중심이나 해체가 발생을 사유하는 일이란 이야기도 재미났습니다.
그 힘들다는 후기 짧게 쓰기가 시도되고 있군요 호호
이 알쏭달쏭함이 재미있지만 도덕경 읽기에 주눅이 들게도 하네요. 신나게 읽다가 어떤 지점에 걸리면, 계속 맴도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노자도 해체론도 자기 중심을 벗어나 쭉쭉쭉 밀어가고 싶은 욕구를 추동하고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