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 읽기 4주차(3/6) 공지 및 후기
노자를 새롭게 해석해 보라 하시는데 쉽지 않네요. 해체론과 함께 노자를 읽고 있는데, 글쎄요, 습관적인 사유의 해체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해체론> 읽은 부분에서 들뢰즈의 사유가 해체적이라는 것은 해석학적 전통과 결별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요. 해석학은 텍스트에 완전히 드러나 있지 않은 숨은 의미를 찾는 걸 중요하게 본다고 해요, 고전일수록 권위에 굴복해 전통적 해석을 깨지 않으려 하기에 새로운 해석이 어렵다고 했는데, 어느 책이든 읽는 사람의 자기 질문 만큼이 숨어 있는 주름 한 겹을 풀어내게 된다고 하셨죠. 들뢰즈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때 창조는 질문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주목하는 것이겠고요. 동양 고전들을 읽으며 저도 해석학적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께 토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가치의 위계에 갇혀 있는 걸 깨닫게 되거든요. 사고방식의 일대 전환이 필요한데, 이번 강의가 많은 아이디어를 던지고 있습니다.
지구에 제대로 착륙하기
사고의 전환,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죠. 이번주 해체론에서 만난 철학자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인데요. 두 철학자는 ‘형이상학’, 즉 어떻게 현실화 되지 못한 잠재성과 관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의 사유 조건’을 떠나지 않는 한에서 형이상을 고민했다는 것도요. 우리가 어떤 지평 안에서 사유하는지 우리 사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하지요. 사유든 신체든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이걸 취약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요. 우리는 다른 존재로부터 끊임없이 침투당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의 차이를 만드는 조건이라고 합니다.
화이트헤드는 “형이상학을 사유한다는 건 다의적 의미의 초월이고 애매성을 되돌려 준다.” 형이상학이란 애매성을 제거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죠. 우리는 명확함을 애매성의 제거로 생각합니다. 완전히 이해하고, 정의되길 바라죠. 그러나 명확함은 애매함을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소리를 예로 들면 수많이 군중이 모여 떠드는 소리는 명확히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콘서트장 같은 곳에서 아무리 함성으로 시끄러워도 옆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면 그 말은 알아들을 수 있지요. 애매함 속에서 명확한 소리를 듣는 것이죠.
과학이 애매성과 대결하여 원인을 찾는 것과는 아주 다른 방식입니다. 과학이 아버지의 관점, 태양 중심으로 사유라면, 하이트헤드는 어떻게 어머니, 데메테르에서 출발할까를 고민한다고 합니다. 노자와도 매우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道를 생각할 때, 초월적, 지고한 것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워낙 하늘의 개념이 강해서이겠죠. 그러나 도는 한자에서 길을 의미합니다. 지상에 난 길. 채운샘께선 우리가 지구적 존재라는 걸 강의내내 계속 환기하셨죠. 인간이란 존재는 지구에 착륙해서 살고 있죠. 도를 생각할 때도 하늘로의 상승, 초월적 개념보단 중력이 작동하는 지구라는 공간을 배제하지 않고 사유해야 자기 지평을 떠나지 않고 초월을 실재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래서 도는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하로 하강하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실제 지구의 멘틀 아래는 물과 불로 요동치는 세계이니 이게 수사가 아니라는 말씀도 덧붙였죠. 이런 사유를 배워야 하는데 말이죠...
들뢰즈는 이걸 ‘무인도’ ‘영토화되지 않은 땅’ 이라고 표현합니다. 들뢰즈가 그의 철학을 전개하는 방식도 고전적 기호에 갇히지 않으며, 그렇다고 자기 환경 세계와 분리하지도 않습니다. 들뢰즈는 “생명의 의미를 천착하고 옹호”하면서 모든 존재자는 입이든, 몸이든, 대지든,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든 욕망을 ‘생산하고 산출하는’ 생명체로서의 기계라고 합니다. 생산하고 작동하는 것을 기계라는 것으로 물질화하죠. 물질화는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게 해줍니다. 요즘 유물론에 대한 새로운 담론들이 생겨나고 있던데요, 이런 고민의 연장으로 보입니다. 그 중 인간의 정신 역시 진화의 산물, 즉 사고도 물질이라고 보는 것인데요, 우리의 사고가 물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아야겠네요.
인간은 지구의 리트머스
이번에 <도덕경>에도 인간의 사유와 정신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과 아랑곳하지 않고, 굳건하게 있는 지구의 사유를 유감없이 보여준 대목이 있습니다. 도덕경의 모든 대목이 그렇지만 유물 혼성으로 시작하는 25장입니다. 도덕경의 기본은 모든 것이 섞여서 존재 한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라고 표상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자연으로 대체하게 되는데요, 자연을 말할 때 상대적으로 인간 대두된다는 거예요.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만, 이 말에도도 이미 인간이 상정되죠. 도덕경의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리학적 공간과는 다릅니다. 채운샘은 자연이든 도든 도덕경에서는 표상 가능한 것을 벗어난다고 하셨죠. 화이트헤드나 들뢰즈의 형이상학이 표상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사유할까를 철학적 질문으로 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자도 표상 불가능한 과정에 대한 사유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희(希) 미(微), 황홀(恍惚) 등으로 표현하죠. 언어에 갇히지 않으려는 시도들이죠.
이번엔 우리가 본받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은 땅은 본받고,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天法道 道法自然). 法자는 얽혀있다고 풀면 좋겠죠, 人法地는 인간이 이 지구와 섞여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샘께선 ‘사람이 지구의 리트머스지’가 아닌가, 풀어주셨는데요, 사람을 통해 지구의 상태와 상황이 드러난다는 거죠. 우리의 마음 작용, 우리의 신체가 지구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자, 우리의 몸과 마음의 병리가 지구의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 거죠. 인간이 겪고 있는 문제가 지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라는 설명에 우리의 태도를 숙고해보게 됩니다. 인간이 ‘비인간’ ‘비생물’과 맺는 경계를 흐리게 하고 관계를 재설정하는 감각들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멸망을 실제적으로 고민하게 되었죠. 들뢰즈는 감각할 수 없는 것을 감각하라고 했는데, 공부하며 계속 질문으로 들고 가려고 합니다.
강의 중 장애 문제도 노자적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장애문제도 지구에 발 딛고 사는 우리들이 겪는 문제입니다. 중력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지구인은 아픈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 몸은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완결한 몸은 정신에서나 가능한 사유이죠. 우리는 자유롭게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두 발이 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걷는 행위 역시 잃었던 균형을 계속 바로잡는 과정이라는 것인데요, 우리는 절룩거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란 관점에서 문제를 재설정해야 합니다. 아주 많은 생각들이 더 많이 얽혀버린 시간이었습니다. 배움, 언어와 문체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는데, 후일로 미룹니다.
다음 주 공지입니다.
<도덕경>은 28-~35장을 읽으시고, 과제와 암송 준비해 주세요.
<해체론>은 2부 1-2장 읽어 오시고요. 발제는 규창입니다.
간식은 문영샘께 부탁드릴게요. 그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우리가 지구에 발딛고 살아간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 자신의 유한함을 더 적극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기 위해 '한계'라는 단어에 다양한 뉘앙스를 부여하는 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을 나타내는 '선'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바깥과 면해 있다는 점 혹은 발생의 근거라는 점을 강조할 때 다른 의미들을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칸트의 작업에 힘입어 생각하면 '조건'이라고 풀 수도 있을 것 같고, 노자에 기대면 '얽혀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우리의 공부가 여러모로 시의적절한 것 같네요! 되든 안 되든 계속 해보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