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의 진도는 어느새 <덕경> 파트로 넘어가서 쭉쭉 나아갑니다. 몇 구절 몇 단어가 둥둥 떠다니며 남아 있는 것 같다가도, 매주 업데이트되는 문장들과 뒤섞여 혼돈의 카오스를 이루는 듯합니다. 이 홀황하고도 묘한 머릿속을 보아하니 우리는 점점 더 도의 본성에 다가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덕上德과 하덕下德 그리고 인仁, 의義, 예禮
<덕경>이 시작된다는 38장부터 덕의 위계와 덕의 개념들이 쫙쫙 나옵니다. 그 전까지 도를 말할 때는 그 애매모호함과 양가성이 강조되며 우리에게 ‘비택일적이고 포일적인’ 사고를 요청하는 느낌을 줘 놓고, 이렇게 덕의 상하를 나누니 조끔 당황스럽다는 이야기도 나왔는데요. 사실 이런 구분 역시 무위로서의 덕을 강조하기 위함임을 생각하면 분명 일관성이 있습니다.
노자는 도를 잃으면서 덕이 나오고, 덕을 잃으면서 인, 의, 예가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란 성실과 소박이 엷어진 것이요 어지러움의 시작이다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라고 합니다. 저희는 노자가 말하는 예가 어떤 것인지, 공자(유학)가 강조하는 예와 같은 것인지를 논의했습니다(만약 예가 불교의 계행 같은 것이라면, 부처가 하염없이 강조했던 것이 계인데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사서를 공부하시는 분들이 많다보니, 유학의 예를 신독愼獨(홀로 있을 때 삼간다), 즉 자기 뜻에 성의 있게 임하며 고민하고 나아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는 틀에 잡힌 도덕규범을 고집하는 태도와는 다르죠. 노자의 예 비판이 도그마화된 규범에 대한 비판이라면 유가의 가르침과 맞닿는 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화해 지점을 찾는 것보다 타협불가능한 지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노자의 비판이 그렇게 얄팍할 리는 없을 터, 그것은 규범의 고착화만을 꼬집는 게 아니라 예를 필요로 하게 되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배치 전체를 문제 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돌아가려면, 먹고 살려면, 뭐가 어쩌려면 그래도 현실적인 법이나 규정 같은 예가 필요해(정당한 전쟁도 필요하고)’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노자는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 그런 ‘현실’을 문제 삼자고 하는 것 아닐까요? 소국과민의 윤리도 여기서 따라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노자의 철학은 근원적 차원에서 반反전주의이며, ‘주의’의 당위성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탈脫전주의(不箏)이 아닐까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고孤 과寡 불곡不穀 : 높음의 척도는 낮아짐?
39장과 42장에 두 번이나 나오고, 공통과제에도 등장한 단어가 있습니다. 고, 과, 불곡인데요. 이는 고독하고(고아), 부족하고(홀아비나 과부), 멋있지 않음(노예)을 의미합니다. 노자는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 세 가지를 왕공은 자신의 칭호로 삼는다고 말합니다. “귀함은 천함을 뿌리로 삼고 높음은 낮음을 터로 삼는다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라는 노자의 지혜가 왕이라는 구체적 자리에는 낮아짐으로 실천되는 걸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왕은 실제 직책인가, 아니면 인격의 수준인가(예를 들면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보인 자부심처럼)하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의 불행과 괴로움을 사무치게 이해하는 자가 바로 왕다운 왕이라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높음이 수많은 낮음을 뿌리로 삼고 있음을 이해할 때만, 왕다울 수 있다는 것. 왕공이 왕공이 아니게 될 때에야 진정한 왕다움이 이룩된다는 것. 이런저런 흥미로움이 뻗어나가는 구절입니다.
도 듣기聞道와 상사, 중사, 하사
41장은 참 얘깃거리가 많았던 구절입니다. 일단 상사(도를 듣고 힘써 행하는)는 아니고, 그렇다고 하사(도를 듣고 비웃는)이기는 싫은 저로서는 어떻게는 중사(긴가민가 고심하는)의 수준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세미나와 과제에 의존해서만 텍스트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걸 보면, 혼자있을 때일랑은 영락없는 하사요, 머리를 맞대고 모여야만 중사 언저리가 되는 것 같아(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멋쩍기도 했습니다. 많이 나왔던 이야기는 상사, 중사, 하사의 수준이 타고난 근기로서 먼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한 사람에게도 여러 면모가 합쳐져 있을 수 있는가 였습니다. 도를 듣는 강렬도 혹은 그때 촉발되는 마주침의 결이 그를 상사, 중사, 하사의 태도로 출현시키는 것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지요. 그렇기에 신분이나 지위나 학식의 수준이 어떠하든 현재 도와 맺고 있는 관계와 거기서 야기되는 행으로부터 상중하의 경지가 따라나오게 되는 것이죠.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다不笑不足以爲道라는 구절을 가지고도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笑를 비웃음이 아니라 기쁨의 미소로 해석할 순 없을지, 도는 모두가 아는 앎보다 못하게 보이는 것인지(희극의 메커니즘) 등의 이야기였습니다. 도는 언제나 도덕-상식-정상성-규범성을 빠져나간다는 말일 텐데요. 지금처럼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많아지는 시대에 ‘선 넘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도를 생각하는 건 무척 흥미롭습니다(‘천지불인’만 해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듭니까!). 장자 <지북유> 편에 나온다는 도의 예측불가능성 묘사와 연관시키켜 보면 재미있을 듯합니다.
울타리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해체론 시대의 철학>은 본격적으로 데리다 이야기에 들어섰습니다. 앞에서 진행되던 논의의 반복과 보강인데요. 무엇보다도 해체란 반드시 탈구성-재구성의 운동이라는 구절이 깊이 남았습니다. 어떤 철학보다도 꼼꼼하고 철저하게 철학사로 빠져 들어가 정리하고 헤집으며 진행되는 게 해체론이었죠. 이미 충분히 말해진 것 속에서 아직 불충분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미쳐 말하지 않았던 것을 끌어오는 작업. 강의에서는 미래는 그러한 과거로의 여행에서 발명되는 것임이 강조되었습니다. 미래가 진취적이고 저 멀리서 온다는 생각이야말로 관념적이고 신학적인 상식이죠. 미래는 옛 것을 데우고 달구고 뒤흔드는 작업으로서만 발생합니다. 온고지신이죠. 과거에 완료된 것으로서의 미래, 즉 전미래라는 개념은 온고지신으로 요약됩니다. 우리의 공부도 그렇죠.
데리다에 의하면 해체란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종종 아무런 문제없이innocemment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 개념들과 사유의 제스처들에 대하여 그것들간의 체계적 및 역사적 연관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216쪽) 이러한 해체론의 여정은 데리다에게서 ‘울타리’라는 개념으로 표현됩니다. 울타리는 안을 없애지도 않고 밖을 차단하지도 않습니다. 역사적 지평을 잃어서도 안 되지만 거기에 갇혀서도 안 되죠. “해체하는 사유는 여전히 과거의 역사를 한정하는 그 동일한 테두리의 바깥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안쪽에 또는 그 경계에 가까스로 머물러 있다. 그 경계에서 그 사유는 과거에 없던 새로운 풍경을 본다.”(215쪽) 이러한 울타리 그리기 작업은 고도의 세밀성을 요합니다. 울타리는 과거를 총체화하고 그 경계에서 미래라는 틈을 훔쳐보는 일이기에 위험합니다. 언제나 중심으로 당겨질 위험이 있지요. 울타리에서는 구심력이 작용합니다. 채추락을 무릅쓰고 중심과의 관계를 약간씩 이탈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40장에서 노자는 反者가 도의 움직임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반을 반대나 역설보다는 돌아옴이나 돌아감으로 해석하면 영원회귀의 이미지가 나옵니다. 도덕경은 통나무, 뿌리, 아이, 계곡 등 근원으로의 회복의 뉘앙스가 자주 나오는데, 이 때 돌아가는 것은 완전한 무화가 아닙니다. 언제나 다시 나타나고 분화되는 것들이 함께 이야기되지요. 그런 점에서 도의 운동은 동심원이 아닌 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회귀하지만 중심과의 관계를 약간씩 약간씩 비틀고 이탈하며 달라지는 운동이지요.
다음 시간(3.20) 공지입니다.
-<신노자독본> 46~54장(231~262쪽)까지 읽고 도덕경 구절 한 장을 외워옵니다.
-<사유하는 도덕경> 46~54장(363~411쪽)까지 읽고 공통과제를 적어옵니다.
-<해체론 시대의 철학> 4장 ‘해체론과 은유’(237~291쪽)를 읽어옵니다. 발제는 윤순샘이 맡아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