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제는 발표됐고, 이제 저희는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할 때가 됐습니다. 크게 ‘해체’와 ‘은유’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키워드로 《도덕경》을 읽는 게 좋을지 한 번 생각해보시죠. ㅋ
《도덕경》 읽기의 어려움
여전히 어렵습니다. 시(詩)처럼 함축적인 《도덕경》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56장에 나온 “색기태 폐기문 좌기예 해기분(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이 구절만 하더라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참 난감하죠. 김형효 선생님의 해석에서도 뭔가 찝찝합니다. “감각과 입으로 말하는 모든 기관의 통로를 막고 안으로 마음을 관조하면, 마음은 외물에 의해 감각적 자극을 가장 덜 받고 그것에 끄달리는 유혹을 가장 덜 갖게 된다.”(417~418) 여기서 걸리는 건 ‘마음’인데요. 도대체 마음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는 저로서는 이런 해석들이 나올 때마다 멈칫합니다. 비슷하게 토론 중에서도 ‘판단 중지’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이조차도 저에게는 쉽지 않았습니다. 경험적으로는 판단을 중지하려고 해도 이미 내 마음은 모래성을 쌓고 무너트리기를 반복하니까요. 오히려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판단이 중지되는 것 같은데... 참 어렵습니다. 확실히 《도덕경》은 ‘마음(心)’에 대한 이해가 있지 않으면 읽기 어려운 텍스트인 것 같은데요. 마음과 관련된 지점에서 자꾸 넘어지게 됩니다.
일단 저희가 토론 끝에 도달한 물음은, ‘무위(無爲)’에 대한 해석이었습니다. 《도덕경》을 관통하는 핵심 중 하나로서 ‘무위’를 ‘하지 않는 것’이란 소극적 해석에 남겨두는 한에서는 어떤 것도 ‘해체’할 수 없겠더라고요. 물론 ‘무위’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도덕경》 전체를 ‘해체’해야 할 것 같긴 하지만요. ^^;; 게다가 해체적 사유를 익히기 위해 더욱 고생할 것 같고요!
강의 중에 채운쌤께서 던지신 단서 중 하나는 ‘동사로서의 도(道)’였습니다. 여기서 ‘동사’란 의미는 끊임없이 이산하고 분산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으로 《도덕경》에 나오는 성인(聖人)이 그렇습니다. 성인은 일상 속 인간이라기보다 ‘도’의 화신(化神)에 가깝습니다. 유가와 비교해보면, 유가에서 말하는 성인은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들입니다. 공자는 요 임금, 순 임금, 주나라의 문왕, 무왕, 주공을 성인으로 자주 얘기했죠. 비슷하게 묵가에서는 우 임금을 성인으로 내세우죠. 하지만 《도덕경》에서는 성인이 실재했는지, 역사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전혀 얘기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실존 인물을 참고해서 성인을 설명한 게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여기서 중요한 건 ‘도’가 이산ㆍ분산을 반복하며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인’뿐만 아니라 ‘무위’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떤 점에서 그런지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어쨌든 ‘도’가 자신을 닮지 않은 자신을 끊임없이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도덕경》의 파편적인 구조, 하나의 단일한 의미로 총체화되지 않는 것은 ‘해체’적 사유와 붙여서 읽어볼 만합니다. 채운쌤은 “해체적으로! 노자를 닮지 않은 노자의 사유를 낳아라!”고 하셨죠. 후우... 저희도 그러고 싶죠..! ㅠ
여전히 어려운 해체론
《도덕경》 읽기가 어려운 건 《도덕경》을 읽기 위한 매뉴얼이 따로 없기 때문이죠. 텍스트에서 전달하고 있는 일관된 의미도 없고요. 뭔가 약함, 부드러움, 낮음 같은 테마가 자주 반복되지만, 이러한 비유의 사용만으로 어떤 의미를 이끌어내기에는 부족하죠. 그래서 해체론의 관점으로 읽는 것이 이번 학기의 테마였는데, 사실 해체론조차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번에 채운쌤의 강의에서 ‘해체론’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대략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면, 서양 철학의 역사를 해체하는 것은 음성중심주의의 역사를 해체하는 일입니다. 보통 우리는 텍스트를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로 이해합니다. 텍스트의 구절들을 이해할 때 저자가 어떤 의도로 이러한 구절을 담았는지, 저자의 생각 속에서 텍스트를 대합니다. 이런 식의 독해에는 언어의 물질성이 배제되고, 불멸하는 저자의 의도만이 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어떤 언어도 ‘기원에 가지고 있었던 의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언어는 그것이 원래 가지고 있던 기원적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의미로 번식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ousia라는 말은 ‘재산’, ‘소유’ 같은 경제학적 의미를 뜻하는 단어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존재’ 같은 철학적 개념으로 탈바꿈했죠. 비슷하게 고대 중국에서도 천(天)도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로 번식하고 확장했습니다. 어떤 때는 ‘조상신’ 같은 인격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고, 세계가 작동하는 법칙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세계를 움직이는 초월적 존재를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언제나 고유한 진리를 포함하는 불변하는 정신적인 무엇이 아니라 언제나 무수한 흔적들 속에서 작동하는 사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의미를 가진 언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 언어의 어떤 흔적들을 작동시킴으로써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도덕경》은 언어의 이산ㆍ분산하는 특성을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령, ‘도’는 곡(谷), 빈(牝), 박(樸) 같은 비유들로 설명되지만, 어떤 것도 ‘도’ 자체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노자는 ‘도’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 일원적 의미를 거부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도’를 가장 많이 수식하는 현(玄)이란 글자는 ‘실이 꼬인’ 모습, ‘규정 불가능한 오묘함’이란 뉘앙스를 가지고 있죠. 해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도덕경》의 논의를 충분히 곱씹어봐야겠습니다.
다음 시간 공지입니다~
《도덕경》은 64~72장, 《해체론》은 3부 1~2장을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윤순쌤께 부탁드릴게요. 틈틈이 에세이 주제도 고민하시고,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