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차 수업으로 해체론 읽기가 일단락되었습니다. 차연, 울타리, 전미래시제, 은유 그리고 모더니즘까지. 데리다는 다양한 개념들을 통해 해체에 대해 설명하였고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우리는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발제와 강의를 통해 흐릿하게나마 감을 잡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주는 64장부터 72장까지 읽었는데요, 우리가 과제로 선택한 장들이 거의 달랐습니다. 유학 텍스트를 읽는 듯한 느낌의 慈愛부터 儉, 後行, 不爭, 知 등 각자의 관심이 다양하게 드러나서 거의 모든 장을 보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저는 앎과 관련된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65장은 도덕경의 문제적인 구절 중 하나인데요, 도를 잘 행하는 사람은 백성들을 명석하게 하지 않고 어리석게 했다고 나옵니다. 마치 우민 정책을 펼쳐야 하는 걸로 오해하기 쉬운데요, 그동안의 우리가 읽은 노자는 순수한 앎 그 자체로 추구하지 않고 앎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했던 것에 미루어 ‘명석해지지 않아도 장차 앎이 필요 없는 순박함에 머물게 했다’는 해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앎이 필요 없는 순박함이란 정보로 넘쳐나는 우리 시대를 생각할 때 앎과 다르게 관계 맺는 자만이 발휘할 수 있는 특권적 역량으로 볼 수도 있다는 거죠.
70장에서도 성인의 知에 말합니다. 성인의 言과 行은 알기 쉽고 행하기 쉽지만, 천하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도 행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성인의 모든 말과 행에 종지와 근거가 있음에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성인의 말은 함부로 알 수 없다는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베옷을 입고 안으로 옥을 품은 피갈회옥被褐懷玉의 이미지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들을 품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인의 앎은 확언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고요. 안다는 말을 똑같이 사용하지만 하나의 뜻으로 제한되지 않음을 보게 합니다.
모더니즘과 해체
모더니즘과 해체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발제하면서도 저는 감이 잘 오질 않았는데요. 샘은 저희에게 두 기사에 대한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수업이 있던 4월3일 아침에 한국을 떠나는 푸바오에 관한 "푸바오 영원히 기억할게"라는 기사와 “제주4·3사건 76주기 추모”라는 기사가 나란히 포털에 떴습니다. 이 두 개의 기억이 대등하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두 기억 중에 어느 하나가 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이는 해체라는 사유 행위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와 관련해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철학적 모더니즘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공식을 시작으로 보는데요, 인간이 생각하는 자기의 의식을 중심으로 세상을 마주하게 되는 사태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신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자아가 재구성한 주관적 표상의 세계’로 변한 것이죠. 근대적 주체는 이렇게 대상 세계를 내 앞에 세워둘 수 있는(표상) 한에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세계는 의식을 가진 주체인 내가 읽어내는 것이고, 그 이성적 인식은 과학의 담론을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연학 담론이 최고의 원리로 상승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공간은 자연학적 표상 능력이 무력해지는 곳입니다. 자연의 세계를 다룬다고 하는데 자연의 세계를 다루는 거의 궁극은 결국 자연에 있는 거라고 보기는 어려운 어떤 형이상의 차원을 다루는 역설이 발생하는 거죠. 그 역설을 감지하는 게 데카르트의 텍스트에서 보인다는 겁니다.
이를 책을 쓰는 것에 비유해 보면 저자는 논리적으로 글을 써가면서 의문에 부딪치거나 균열이 생기는데도 미처 다 얘기하지 못하고 봉합하기도 합니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기에 어떤 것을 논증해 가면서도 그 논증이 내포할 수 밖에 없는 모순, 한계에 대한 불안함이 있다는 거죠. 하지만 그 불안은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죠. 정말 책을 촘촘하게 읽어낸 독자에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럴 때 독해는 그 모순에서부터 다른 바깥을 향해서 열리기도 합니다.
이를 우리가 노자를 읽을 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노자를 해체한다는 것은 아무 말이나 막 쓰는 게 아니라 노자 안에 하나의 총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지점, 어떤 균열 속에서 노자가 노자로 환원되지 않는 지평으로 열리는가를 보는 겁니다. 우리가 노자를 읽을 때 자기가 문제화하고 있는 맥락 속에서 노자와의 접속이 뭔가 다른 것을 실험할 수 있는 구도로 열어줄 수도 있고, 반대로 중심화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읽든 우리에게 작동하는 방식이어야 노자를 읽을 필요가 있고 그럴 때 해체적 독해가 가능합니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데리다가 한 유명한 이 말은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맥락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달리 말해 텍스트를 해석하는 유일한 어떤 기준이 있다면 텍스트를 해석하는 맥락이라는 겁니다. 텍스트가 쓰여진 시대의 맥락, 그걸 해석하는 맥락, 우리 삶의 맥락, 내 삶의 맥락 등을 보는 거죠. 그러면서 텍스트는 끊임없이 이전의 맥락이 탈구되고 또다시 맥락이 만들어져서 재맥락 됩니다. 탈맥락화와 재맥락화의 운동을 끊임없이 거치면서 텍스트는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떤 맥락 속에서 텍스트를 해석한다고 할 때 여전히 그 좋고 나쁨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데리다가 문제 삼는 것은 타자와 공동체. 다시 말해 정치입니다. 이 부분을 놓치지 말라고 강조하셨죠. 강의 시작할 때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각자의 맥락 속에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다음 시간(4.10) 공지입니다.
- <신노자독본> 과 <사유하는 도덕경> 73~81장까지 읽고 공통 과제를 쓰고 외워 옵니다.
- 에세이 주제를 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도덕경의 구절들을 찾아옵니다.
* 간식은 인영샘께 부탁드립니다~
일목요연하게 그날의 내용을 정리하셨군요. ㅎㅎ 모더니즘의 발생에 모더니즘을 뛰어넘을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든 사유에는 그 사유를 형성하는 중심적인 힘과 동시에 그 사유를 탈구시키는 주변적인 힘이 잠재돼있다고 들뢰즈가 말했었나요? (가물가물...) 어쨌든 해체적 사유와 노자의 사유가 이리저리 교차하면서 아주 어지럽습니다. @_@
'피갈회옥'이라는 표현을 이야기 나눌 때, 확실히 한문이 주는 함축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베옷의 희미함과 옥의 아우라... 확실히 노자 선생님은 비유를 포함해서 언어 사용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사물이라는 텍스트를 기호로 엮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해석과 이미지화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리게 하는 능력이 뿜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