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을 지나 <장자>로, 김형효 선생님의 <사유하는 도덕경>을 지나, <장자, 나를 해체하고 세상을 해체하다>로, 해체론에서 ‘지속’으로 넘어왔습니다. <도덕경>은 여전히 난해했고, 해체론은 벌써 가물가물합니다. ㅋㅋㅋ 이리저리 헤매며 한 학기를 보냈는데, 신기하게도 함께 헤매며 공부하는 게 심란하지만은 않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덕분에 이번 학기에 <장자>로 어떻게 헤맬지 기대됩니다!
공지부터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장자> 소요유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59쪽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장자> 공통과제를 쓰실 때는 특정 에피소드에만 집중하기보다 몇 개의 단편을 재구성함으로써 각 편의 핵심을 정리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은 따로 발제가 없습니다. 암송은 간단하게 5줄 정도로 외우시면 됩니다!
오후에 공부하는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의 일정도 바뀌었습니다. 채운쌤께서 3주, 5주, 7주, 8주에 정리 강의해주실 거고, 2주, 4주, 6주에는 토론으로 책을 꼭꼭 씹을 예정입니다. 발제가 없는 만큼 각자 질문이나 풀리지 않는 것들을 준비해주세요. 간식은 제가 준비할게요!
<장자>를 읽을 세 가지 키워드 : 마음(心), 언어(言), 변화(變化-道)
간단하게 토론과 강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장자>를 독해할 키워드로 마음(心), 언어(言), 변화(變化-道)를 꼽을 수 있습니다. 으음... 사실 이 키워드들은 지난 <도덕경>에서도 반복된 어려운 주제입니다.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다시 만나게 됐네요.
마음(心)
‘마음’은 고대 중국의 사유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마음’을 도외시하는 학파는 없을 만큼, 고대 중국의 독특함이 ‘마음’에 대한 사유입니다. <장자>를 읽는 우리도 <장자> 안에서 마음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자>에서 마음은 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떤 점에서 마음과 몸을 구별하는지 등등.
전용선 선생님의 책에서는 <장자>에서 마음의 문제를 성심(成心)에서 허심(虛心)으로의 이행, 그러니까 세계를 실체화하는 소유적 사유를 해체함으로써 변화를 긍정하는 미러링(mirroring)으로 제기하셨죠. 그런데 아직 본격적으로 <장자>에 들어가지 않은 저희로서는 ‘미러링’이 도대체 무엇인지, <장자>에서 말하는 ‘사물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과 같은 마음’이 ‘이데아’ 같은 실체적인 무엇을 인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아직 잘 모르는 상태입니다. 일단 읽으면서 해석하기로 남겨놨습니다.
언어(言)
‘언어’에 대해서는 채운쌤의 강의에서 흥미롭게 읽을 만한 얘기가 나왔죠. <장자>의 말하기는 우언(寓言)과 중언(重言), 치언(巵言)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아주 거칠게 정리하자면, ‘우언’이란 은유 혹은 남유처럼 기의로부터 미끄러지는 언어의 운동이고, ‘중언’이란 특정한 구절과 인물을 상식적 맥락으로부터 탈구시키고 새롭게 맥락화하는 기술이고, ‘치언’이란 언어의 초과적 작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우언’과 ‘중언’, ‘치언’이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읽어 보니 언어에 관한 <장자>의 독특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더라고요. 괜히 ‘우언’, ‘중언’, ‘치언’을 사용한 게 아니었습니다. 지난 학기에 읽었던 해체론적 사유가 다시 생각나기도 했고, 이제야 ‘우언’, ‘중언’, ‘치언’이 <장자>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지도 조금은 더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를테면, 소요유편에 나타나는 끊임없는 이야기의 전복적 연속이 일종의 ‘치언’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이건 공통과제로 풀어보겠습니다. ㅎ
변화(變化-道)
‘변화’는 ‘마음’만큼이나 어려운 주제입니다. ‘변화를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막막합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변했다’는 말을 하지만, 아주 다양한 뉘앙스로 사용합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할 때는 ‘변절’ 같은 부정적 의미로, ‘10년 전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다’라고 할 때는 성장 같은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죠. 공부할 때도 마치 ‘변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주 말하는 것 같은데요. 여기서는 ‘변화란 좋은 것’이란 생각이 전제된 것 같아요.
하지만 변화는 ‘저절로 그러한(自然)’ 운동이고, 우리가 기쁘거나 슬프다고 생각하는 사건을 모두 포괄합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변화를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좋고 나쁨의 분별이 작동하지 않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용선 선생님은 이를 위해 세계 혹은 마음을 실체화하는 사유를 해체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고,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소’라 하셨죠. 이 이야기는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의 서문에서 베르그손이 말한 것과도 통합니다. 베르그손은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기만 하더라도 우리가 ‘문제’라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자연스레 해소될 것이라 했죠. “비연장적인 것을 연장적인 것으로, 질을 양으로 부당하게 번역함으로써, 제기된 문제의 바로 한가운데에 모순을 자리잡게 했을 때, 제시된 해답들 속에서 그 모순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 놀라운 일일까? (…) 그러한 혼동이 일단 걷히기만 하면, (…)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의 문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저희는 뭔가 이것만으로는 뭔가 찝찝하더라고요. 토론에서는 좋음과 나쁨의 분별적 사고를 넘어서더라도 여전히 어떤 종류의 분별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가령, ‘타자’에 대한 사유가 모든 타자에 대한 열림이 아니라 중요한 타자를 선별하는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변화에 대한 사유 역시 분별을 넘어서 또 다른 분별로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무분별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분별의 해체를 얘기하는 데서 그치면 ‘모든 것은 변화다’ 같은 어떤 윤리도 도출하지 못하게 되니까요. 말하고 보니 ‘분별’을 강화하는 것 같아 뭔가 이상한데, 이걸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흐음...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번 학기에 저희가 배울 유머러스한 장자와 지성 넘치는 베르그손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마천에 따르면 장자가 어느 고을 산지기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이 젊어서 어떻게 학식을 쌓았고 산에서 동물들이나 불구들을 관찰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시간이 재미있었습니다. 중언을 채운샘께서는 '중첩' 개념으로 보셨는데, 공자나 안회, 자기 친구 혜시 등을 등장시키면서 키득거리면서 이야기의 효과를 이리저리 조작해보고 있을 산지기-작가 장자를 더 애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노자보다는 슬픔이 덜하고 맹자보다는 비장함이 덜하지만 누구보다 유쾌한 장자와 세련되고 부드럽기가 견줄 데 없는 천재 베르그손은 어떤 케미를 보여줄지!
분별은... 일단은 별 수 없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만 '잘' 분별하기. 분별이 해체되는 경지를 향한다는 의미에서 '잘'...
문제제기만이라도 잘 하면 많은 문제가 해소된다는 말에 저도 생각이 많이 머물던데요, 장자와 베르그손은 모두 탁월한 문제제기 자들인 것 같아요. 한 겹 한 겹 벽돌 쌓듯 문제에 다가가는 베르그손과 화두를 던지듯 문제를 비틀어버리는 장자 , 두 사람의 글이 다른 방식으로 유쾌함을 주던데요, 두 사유 속을 거닐면서 문제제기 하는 법을 한 수 배워볼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