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대학에 이어 중용을 읽고 있는데요. 대학은 격물치지에서부터 평천하로 나아가는 틀이 짜여져 있는 반면에 중용은 天命에서 시작하여 中, 和로 연결되어 다른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읽다보면 대학과 연결되는 지점도 있었는데요. 33장까지 읽으면서 대학과 연결되는 지점을 생각해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선 중용 13장의 내용을 저희에게 풀어주었습니다.
道不遠人- 도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 도는 사람하고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막 초월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도는 인간이 먹고 마시고 살아가고 관계 맺고 있는 그 모든 것에 세상의 이치가 다 있다는 뜻입니다. 그 세상의 이치가 다 인간의 삶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진다면 그건 도가 아닙니다.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사람을 멀리하면 안된다라고 당위로 읽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인간은 가장 인간하고 가까운 건 그래도 인간이라는 말로 풀어주셨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제일 중요하다는 말은 제일 비슷한 게 제일 가깝잖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막 한가운데를 지나다가 뭐라도 만나면 반갑습니다. 근데 혼자 사막을 지나는데 뭐라도 만날 때 그 뭐가 돌인 것보다는 동물일 때가 반갑겠죠. 동물일 때보다 인간일 때가 더 반가운 이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이제 우리가 가까운 존재서부터 도를 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뒷구절은 시를 인용하는데요 . 저는 대학을 읽거나 중용을 읽을 때 시가 나오면 뜬금없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이 시가 이 구절 뒤에 나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요. 13장에는 도끼로 나무를 베는 시가 나옵니다. (伐柯伐柯) 그러면서 其則不遠 - 내가 도끼를 가지고 지금 나무를 자릅니다.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자르는데 어떻게 자르는지, 그 원리가 멀지 않습니다. 어떻게 도끼를 사용하지? 도끼로 어떻게 나무를 자르지 그건 어디 있을까요? 지금 도끼를 자르는 순간에 있습니다. 내 손에 도끼가 있고 내 앞에 나무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자르려고 하면 똑바로 눈을 뜨고 보면서 잘라야 되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서 본보기는 어디 있지? 어떻게 나무 자르지? 이 구절은 이치를 내가 하고 있는 것, 내 삶이 구체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장 바깥에서 찾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공부방법의 예를 들어주셨는데요. 데카르트는 우리가 진리에 도달하려 그러면 정확한 방법을 알아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방법이 정확하지 않고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쪽이죠. 공부의 순서를 강조하는 주희와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데카르트는 공부를 어디서부터 해야 되는지 차근차근 그게 먼저 알아야 우리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말한 도구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좋은 도구라는 건 그럼 뭘까요? 이게 도구하고 그 도구로 만들어지는 것과 분리가 될까요? 좋은 도구라는 것도 원래 있는 건 아닙니다. 내가 그릇을 만들려고 그러면 나무를 가지고 그릇을 만들고 이만큼을 파내야 됩니다. 그럼 이거를 파내는데 뭐 파내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칩시다. 그럼 처음부터 우리한테 날카로운 딱 적합한 도구 같은게 있지 않습니다. 옛날 석기 시대에는 돌로 팠겠죠. 그 돌 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그러니까 이렇게 하다가 사람들이 쓰다 보니까 이게 좀 더 뾰족하면 좋겠는데 더 갈아서 씁니다. 그리고 이게 나중에 쇠 같은 게 나오니까 이게 날카롭다는 걸 더 알게 되고 그러면서 도구가 나왔겠죠. 그러니까 사실은 도구와 그 도구로 인해 만들어지는 건 분리가 안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철학을 할 때도 철학을 하기 위한 좋은 방법 같은 건 없다고 하셨어요. 내가 지금 여기에서 철학을 시작하면 됩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저도 데카르트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쉬운것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것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수능이랑 임용 공부할 때도 시기마다 기초-개념-기본문제-심화문제 풀이처럼 단계를 밟아나갔기에 은연 연중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대학 중용을 읽는다는 점에서는 다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그걸 읽을 때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 그거에 따라서 이끌어내고 그걸 접속하고 연결시키는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요. 그러나 그걸 읽는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다 각자 그걸 다르게 풀 뿐이에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결국 도끼를 잘 쓰는 것은 내가 나무를 잘라보면서 몸으로 터특하는 것입니다. 則(방법)은 내가 이렇게 해보니까 도끼가 잘 들더라 이렇게 해보니까 힘을 어떻게 줘야 되더라.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이제 조금 그게 자기의 칙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면서요. 힘을 너무 많이 줬을 때 힘을 너무 안 줬을 때 도끼가 나무를 찍어야 되는데 날라가고... 온갖 거를 다 경험하면서 그 경험 속에서 도끼질을 어떻게 하는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면서 터특하는 則, 지금 내가 쓰는 글이 마음에 안 들때, 과제를 외우는데 잘 안 외워질 때 어딘가 좋은 방법이 있을거라고 지금 내 모습을 보기 싫어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공부와 삶을 직시하면서 항상적으로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구절이었습니다.
則 자의 용법이 재미있지요? 방법이자 법칙이기도 하지만, 곧 하는 것 그 자체가 법칙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요 . 즉의 의미를 도구로 풀어주니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뜬금없이 시 읽는 것이 꺼려지는 은정샘~~ 같이 시 읽을까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