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마지막날, 벌써 1학기 7차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는데 뭘 알게는 되었는지 헷갈립니다. 외우면 까먹고 또 외우고 또 까먹고... 수업시간에는 다음주에는 꼭 열심히 공부해야지 생각을 하지만, 아니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역부족인 듯 느껴집니다. 글쓰기는 채운샘의 꼼꼼하신 코멘트에 현장에서는 찌르는 찔리는 자극을 받지만 다시 써보려고 하면 머리가 또 하얘집니다. 그럼에도 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일단 만나서 먹고 웃고 떠들고 자극받으면서 미세한 변화라도 일어나고 있다고 믿으며 산만함 가운데서 또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합니다.
- 명리 강의
명리 강의를 들으면서 정말 음양오행을 배쌤처럼 비근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삶이 참 여유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쌤은 많은 예시와 비유로 털털하면서도 밀착적으로 강의하시는데, 들을 때는 뭔가 이해되는 듯도 하지만 돌아서면 연결이 안됩니다. 그래도 일곱 번째 강의를 들으니 모르는 중에도 조금씩 아는 것이 생기는데요, 저는 이번 학기 명리 강의를 들으면서 어줍잖게 알고 있었던 생극(生剋)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보게 된 것이 가장 큰 획득입니다. 화극금이라고 해서 화가 금을 제련한다, 단련시켜서 보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금이 화를 가두어서 마무리시켜 주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는 것이 크게 흥미로웠습니다. 토까지 포함해서 보면 퍼져 나가는 화의 기운을 먼저 토의 힘으로 가두리하여 금이 딱 마무리시켜 준다는 것이었고, 목극토라는 것도 나무가 흙을 뚫고 올라오는 단편적인 해석이 아니라 목이 토의 엉김을 풀어주고 볼만한 땅으로 만들어서 토의 존재감을 가치있게 해주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극(剋)이 이겨내다는 의미보다는 살려낸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화생금, 목생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공부를 하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가 나의 보살이라고 반복해서 듣지만 현실과 부딪히면 여간해서 그리되지 못하는데 오행의 원리로 보니 그게 이해가 좀 됩니다.
오늘은 천간을 공부했는데 천간은 하늘의 기운입니다. 이 천간은 땅의 작용이 세력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기운으로 작용하므로 사주에서 흔히 말하는 충(冲)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지 극의 작용만 있는데 이것도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 조절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는 게 천간을 이해하는 기본인 듯합니다. 천간은 우리에게 생각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진 기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천간의 글자들에서 보여지는 생각의 흐름, 즉 어떤 기(氣)를 갖고 있는지를 먼저 해석해 낼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천간의 글자들이 어떻게 세력으로 나타나느냐는 다음 시간에 지지(地支)에서 알려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주에서 또 중요한 것이 조후를 보는 것인데요. 이는 물론 우리가 가진 여덟 글자 외에 대운과 세운의 글자들도 포함해서 보아야 합니다. 조후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환경입니다. 주역으로 보자면 주역의 괘, 곧 우리가 처한 조건, 상황으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사주에서는 또 이 환경의 조건들을 조절하기 위해서 병화와 계수가 아주 중요한데요, 병화는 가장 양기가 강하고 계수는 가장 음기가 강하므로 이 둘로 일단 조후가 조절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채운샘은 오전의 명리의 수업 내용을 대학, 중용의 강의와 우리의 글쓰기에 마구마구 인용해서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서 놀라곤 합니다.
- 중용 강의
1) 성, 도, 교
이번 강의에서는 중용1장의 엄청난 개념들이 나왔습니다. 조별 토론에서 ‘인과 예의 창조적 긴장’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인과 예는 모두 추상적 개념으로 다가와 이해가 어렵다는 우리들의 호소에 채운샘은 우리가 추상적 개념들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건 우리가 개념들을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럼 중용의 중요 개념들을 채운샘의 강의를 따라서 조금이나마 추상성을 깨도록, 우리의 실천 윤리와 연결될 구체적 지점들을 찾으려는 자세로 채운샘의 강의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명리학에서 자신의 여덟 글자들을 풀어내는 것도 구체적인 실천으로 가기 위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중용 1장)
모두들 외우셨을 이 구절에서 먼저 하늘이 명한
性의 개념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먼저 하늘이 명한 것이 성이다. 이 때의
性은 본성이기도 하고 생명, 생명력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性이 본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생명이라고 확장하지는 못했었는데 생명이라고 하니 이 개념이 훨씬 살아있는 느낌이 듭니다. 서구에서 말하는 자연으로 볼 수 있는데요, 서양의 자연 natura(나투라)도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양태들에 깃들여 있는 생명력이라고 합니다. 이 본성이자 생명력인 성은 내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이건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내 삶도 내 것이 아니며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여받은 성은 모든 인간에게 일률적으로 똑같지 않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만들 때 기로써 형체를 만들어 성으로 부여한 것이므로 우주가 계속 운동 속에 있으므로 만물에는 차이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계속 운동하는 우주 속에 살아가므로 이 성이 결정론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성이 사람마다 다르게 부여된 것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오전에 공부한 사주이며 이는 여덟 글자의 운동성이고, 여기에 대운, 세운은 우주의 계속적인 운동성으로 우리에게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우주속에서 생명을 부여받아 이 꼴로 태어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성을 따라 바르게 사는 일입니다.
솔성(率性), 일상 생활에서 성(性)에 따라 실천해야 할 도(道), 걸아가야 할 길입니다. 앞으로 중용에서 계속 도 얘기가 나올테니 살짝만 도 얘기를 하고 가렵니다. 각자가 살아가는 시대적 상황, 공간적 조건 속에서 성을 따라 사는 방식은 구체적으로 다르게 보여질 것이며, 계속 조건이 변화하고 있으므로 천지와, 사물과,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군자의 도는 때에 맞게(시중(時中)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중용의 도는 우리와 한시도 떨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비근한 일상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다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이를 12장에서 君子之道 費而隱 이라고 말해줍니다. 더 이해를 돕자면 여기서의 費는 wide and far, 보편적임을 말하고 隱은 secret, 숨겨진 게 많은 비가시적인 것인데 비가시적이다는 것은 이는 계산이나 예측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이 은미함, 주역에서의 기미(幾)를 알고자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군자의 도는 보편적인데 부부의 너절한 일상에서도 그 지극함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인이라고 끝까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일상적인 부부의 도에서도 있고 성인도 알수 없는 일체만물에도 있으며 극대와 극미를 아우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초월적이지는 않습니다. 추상성을 깨보고자 하지만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시를 인용해서 저 높은 곳에서 무한하게 하늘을 나는 솔개와 연못 속에서 잠깐씩 비약하는 물고기의 움직임 속에서 그 생명력을 드러내 준다고 합니다. 계속 공부하면 시에서 말하는 이른 감흥을 느낄 수 있겠죠?
그리고 이 도를 잘 닦아 가는 것, 조절해가는 것이 교(
修道之謂敎)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적 차이로 과(過)와 불급(不及)함이 발휘되는 부분도 각자 다릅니다. 아마도 고대에는 이것을 남녀의 차이, 신분의 차이, 역할의 차이 등으로 구별함의 근거가 된 건 아닌가 싶네요. 개인적으로 차신의 치우침을 잘 판명하고 이를 조절하면서 조건과 상황에 행하는 것이 교(敎)이고 배움입니다. 지난 시간에 도끼로 나무를 베는 바로 그 과정 속에 방법을 찾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하는 일 속에서 자신의 도를 상황에 맞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명리 시간에 배운 여덟 글자와 대운, 세운을 바탕으로 치우침과 과불급을 조절해 나가는 것도 교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회속에서 살아가므로 우리의 행동에는 일정한 틀이 요구됩니다. 이것 역시 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희는 교(敎)란 예악(禮樂), 형정(刑政)과 같은 것을 말한다고 하는데요, 이것이 <<뚜에밍의 유학강의>> 토론에서 나온 인과 예의 관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채운샘은 강의 중 인은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 살아 있다는 마음, 다른 존재를 살리고 싶은 마음,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양명은 인을 ‘생의(生意)’로 해석했다고 했구요. 그렇다면 인을 중용 1장의 성(性)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이 인한 마음, 하늘이 준 본성대로만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이 마음을 사회에 확장하여 발현되게 하는 것이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늘, 인한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죠.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틀로 가두어서 가시화시켜 것이 예라고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은 비슷하겠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항공기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국적에 따라 그 슬픔을 다르게 표현하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장례식의 풍습만 봐도 지금은 조선시대와도 현저히 다르고, 다른 나라와도 많이 다릅니다. 예는 인의 발현을 사회적 코드로 만든 것이고 이를 교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학은 이것은 통치의 이념으로 삼아, 예로 통치하는 것이 하늘이 준 성(인)을 지키는 것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는 주희가 교를 해석한 예악 형정과 바로 연결이 됩니다.
2) 치중화(致中和)
성, 곧 생명을 부여받은 우리는 성을 따라서 살아야(率性)하지만 형질을 부여받은 우리는 외물과 부딪히면서 살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감정이 발생합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어떻게 우주적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를 치중화(致中和)로 말해줍니다. 감정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가(喜怒哀樂之未發)를 중(中)이라 하고 감정의 발함이 상황에 딱딱 맞을 때(發而皆中節) 화(和)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다르려고 해야 하는 것 화이겠죠? 화(和)는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을 말하는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천지의 움직임 속에서 태풍과 번개 등이 일어나듯 인간의 삶에서도 때에 따라 소리지르고, 분노하고, 벌을 주고 하는 것도 화가 됩니다. 중화를 지극히 하면(致中和)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된다(天地位焉 萬物育焉)고 합니다. 여기서 치(致)에 대해 채운샘은 극단의 상태를 말하는 태(太), 극(極), 치(致)는 모두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절로 하는 건 의식과 무의식이 일치하는 상태, 간극이 없는 마음이 고요한 상태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학이 지향하는 바라고 합니다. 의식이 자신을 지배하게 되면 당위로 행하게 되고 또 반성을 하면서 피로해진다고 합니다. 저 자신의 실천으로 가져오면 치중화한 마음과 행위가 상황에 맞게 행해져 마음이 요동치거나 끄달리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크게 확장될 수 있다고 해석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리고 글쓰기...
치중화하기 위한 아주 기초적 단계이자 우리의 당면 과제입니다. 채운샘의 과제 코멘트 중 가장 와 닿은 것은 글을 쓸 때 본문이 돋보여야 한다는 것, 이미지나 비유는 본문을 찾아가는 입구를 내는 것이나 마무리를 하는 것으로는 좋은 방법이지만 짧은 글에서 본문 그 자체가 되어서는 좋은 글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글쓰기에서 질문을 던질 때 ‘@@는 무엇인가’ 보다는 ‘왜 @@하지 못하는가’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용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치중화에서 ‘중과 화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왜 중과 화로 살아가지 못하는가’, ‘중과 화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 글을 써 보라고 하셨습니다. 말처럼 쉽진 않지만 어쨌든 해 보입시다.^^
저도 이번 시간 剋 개념이 다양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生하는 것 만큼 한정을 지어주는 힘이 필요하고, 극이 일방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몸에서도 상생과 상극을 모두 생리이듯이, 공부에도 적절한 생극과정이 필요한 것 같지요? 중용의 도도 생극의 적절한 힘의 발휘라는 생각이 드네요.
엄청나게 꼼꼼한 후기 덕분에 복습 잘 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