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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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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나-감흥어린 시구』 제6품에는 다양한 견해와 의견을 가진 이교도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불교가 그 당시 융성했던 바라문교와 다른 사문(沙門)들과 존재론에 관해 논리적으로 대립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환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인간이 어떤 상황에 대해 구성해 낸 다양한 이론들을 네 가지의 판단(四句)으로 정리했습니다. 종교와 철학의 다양한 견해들도 사구(四句)중 어느 하나일 뿐이지요. 이는 하나의 판단에 대한 이해방식을 분류한 것으로 기본 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구: 그것은 ~이다. (有)
제2구: 그것은 ~아니다. (無)
제3구: 그것은 ~이면서 ~가 아니다. (有無)
제4구: 그것은 ~도 아니고 ~가 아닌 것도 아니다. (非有非無)
이 중 제3구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것으로 모순된 판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의 부정인 제4구 또한 무의미한 사고이므로 부정됩니다. 결국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이해방식은 제1구인 상견(영원주의)과 제2구인 단견(허무주의)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둘을 양극단의 사고방식(二邊)이라고 하며 이 양변을 쳐내는 것을 중도라고 하였습니다.
외도들은 사구로 배열된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하여 답변을 회피하거나 본질과 현상을 나누고 관점에 따라 어느 하나를 답변으로 선택했습니다. 반면에 부처님은 그렇게 떠올리는 사고방식 그 자체를 문제시하며 이를 부수는 도구로 연기를 설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실체화하는 방식으로 사고를 전개하는 우리 자신을 보라고 한 것이지요. 우리는 이것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을 실체화하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을 실체화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근거한 질문들은 연기실상에 대해 무지한 우리가 잘못 제기한 문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답변 대신 침묵을 선택한 것은 이런 실체화하는 방식을 피해가 위해서입니다, 초기불교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계승하여 중관학파들은 우리의 사유가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판단을 그 대상으로 삼고 논리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사구를 비판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유전(流轉)한다는 것을 어떻게 논증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경험하는 것 외 경험하지 않은 것들은 어떻게 논증할 수 있을까요? 논리적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논리는 언어를 사용하므로 그에 따른 관념을 실체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한계점은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 또한 경험을 실체화하는 위험이 있지만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에서는 어떠한 말이라도 덮어놓고 믿지 말고 의심하고 분석하고 이해하고 습득하는 문사수(聞思修)의 수행법을 가르쳤습니다.
경전을 보면 다양한 이교도들이 각자의 견해에 따라 논리적으로 논증하면서 입에 칼을 물고 싸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자기의 견해가 자기이므로 자기의 견해를 비판 받았다는 것은 곧 자기가 부정당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견해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게 되면 그에 반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두게 됩니다. 아울러 세상 모든 것들을 실체화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자기랑 동일시하는 것은 동시에 그와 다른 것도 실체화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비교하는 순간 이미 견해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렇게 견해에 대한 집착하며 양 극단으로 치달으면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죽음의 선을 타지 않고 중도의 길을 갈 수 있는지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하겠습니다.
<천 개의 고원>
어떤 난초는 꿀벌의 색과 향기, 모양 등을 흉내 내어 꿀벌을 유혹합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난초는 탈영토화하고 벌을 통해 꽃가루가 다른 곳으로 옮겨짐으로써 재영토화됩니다. 이는 난초가 직접 꿀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씨가 멀리갈 수 있도록 자기 스스로를 변환시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꿀벌 또한 난초와 결합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변환을 가져옵니다. 결합이란 이처럼 이질적인 지층들 사이에서 기존과는 다른 변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런 상호 변환을 ‘되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1차적으로는 결합이 이루어지는 돼서는 ‘되기’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를 윤리적으로 확장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변환을 통해 다른 방식의 삶을 실험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는 목표를 설정하고 다른 항으로 변환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복합적인 배치 속에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이행의 문제입니다. 이를 통해 매순간 우리는 자기의 영토에 갇히지 않고 실체화하지 않게 됩니다.
탈영토화와 탈코드화는 전반적인 관계맺음과 배치자체가 달라지는 문제입니다. 그 자체로 나쁘거나 좋은 것이 아니지요. 사회체의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어디서나 영토와 코드화와 함께 탈영토화와 탈코드화가 이루어집니다. 탈영토화와 탈코드화가 이루어 질 때 작은 변수인가 큰 변수인가가 중요하며 그 결과는 똑같지 않습니다. 결합하는 것들 중 누구 하나는 더 좋거나 누구 하나는 더 나쁠 수 있습니다.
되기 자체를 잘 보여주는 것은 예술입니다. 화가가 꽃을 그릴 때 꽃이라는 대상이 있고 화가가 그것을 고스란히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저 있는 것을 누구나 똑같이 그린다면 예술이 라고 할 수 없겠지요. 예술이란 어떤 대상을 통해 시각 자체가 변환하는 것을 함축합니다. 모네, 반 고흐 등의 화가는 늘 똑같이 보던 방식에서 벗어나 시각을 다르게 변환시킴으로써 꽃과 자기 자신을 탈영토화 합니다. 이처럼 각자의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탈영토화 되는 것이 예술입니다,
『천 개의 고원』 열한 번째 고원 ‘리토르넬로’는 예술에 대한 고원입니다. ‘리토르넬로’는 후렴구, 반복구라는 뜻으로 이 개념을 통해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술은 한 번 그려서 걸작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한 작가가 여러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있어야 합니다. 동물들도 자기 루틴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최초의 예술가는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예술을 인간을 넘어 전 존재 자원의 운동과 정지에 의에 조직하는 어떤 것이라고 봤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대로 보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지각하는 바대로 세계를 봅니다. 똑같은 식물이더라도 소녀가 꽃다발을 만드느냐, 진드기가 거주하느냐, 거미가 거미줄을 치느냐에 따라 세상을 지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모든 것들이 지각세계를 형성할 때 각자 다른 변형 방식을 가지고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리토르낼로는 1차적으로 영토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우리 앞에 나타난 카오스(어둠)를 나름대로 조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유의 영토를 만드는 것이고 그 노래 소리는 하나의 코스모스가 됩니다. 무엇이 있기 전에 카오스가 있습니다. 카오스란 질서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질서를 함축하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질서(코스모스)란 카오스에서 안정적인 점 하나를 만드는 일시적 차원의 사건입니다. 집은 외부의 낯선 힘들에 대해서 공간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카오스 속에서 형성한 내부 공간의 일정한 리듬이 깨지면 다시 카오스로 돌아갑니다. D.H.로렌스에 의하면 인간은 카오스가 두려워 자신과 쉼 없이 소용돌이치는 카오스 사이에 우산을 펼쳐들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하늘과 같은 우산의 안쪽에 자신의 견해들로 그림을 그려놓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외부를 향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완전히 우산을 치울 수는 없지만 우산을 찢어 카오스가 들어오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술이란 이렇게 우산 속의 견해에 죽지 않기 위해 구멍을 내는 일입니다.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에 있는 것이므로 카오스모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세계는 이처럼 미규정적인 세계 한쪽에 면하여 있는 일시적 질서의 세계입니다. 카오스에서 일시적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떻게 리듬을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리듬을 조직한다는 것은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만의 몸짓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생명활동을 내포한 이러한 고유한 양식은 만들기 위해 예술가는 자기 감각을 단련하는 자입니다. 이는 카오스 속에서 영토화 하려는 행위를 통해 영토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화요일을 맞아~ 지난주 수업 복습하고 갑니다~~~^^ 재미있는 리토르넬로~~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