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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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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불교 공부 일 년 농사를 다 마쳤습니다. 다음 주에 알곡을 털어 거두어들이고 곳간 정리만 잘 해 놓으면 이제 한 해 농사가 마무리되겠지요. ‘그 새’ 왔던 12월도 이제 절반이 다 지났습니다. 늙어 시간에 대한 감각이 달라져서일까요, 아니면 부처님 뜨락에서 서당개처럼 어슬렁대는 동안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랑비에 옷 젖듯 훈습이 되어서일까요. 이제는 지난 시간들이 그저 까마득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도 점점 무감해지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경지에 이른 것일까요? ㅎㅎㅎ 그런 거라면 차암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 낭송한 <우다나- 감흥어린 시구>의 ‘빠딸리가마의 품’을 끝으로 <숫다니파다>, <담마파다>, <이띠붓따까>, 그리고 <우다나>까지 이름도 낯설었던 초기 경전을 모두 읽었습니다. 매주 입을 모아 ‘세존께서 그 뜻을 헤아려 때맞춰’ 읊으신 ‘감흥어린 시구’를 함께 읽고 쓰고 법담을 나누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응답하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회향하고자 다짐하곤 했었지요. 더러 슬금슬금 뒷걸음칠 때도 있었지만 그 뒷걸음조차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ㅎㅎㅎ
‘빠딸리가마의 품’에 나오는 ‘열반의 경’ 4편은 열반의 세계와 열반 성취의 어려움, 그리고 승의의 의미에서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열반의 세계의 존재와 괴로움의 종식으로서의 열반의 체험에 대한 참으로 수승한 경지를 말씀하셔서 유독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승의의 세계를 슬쩍 넘어가니 언제 들어도 흐뭇하고 감동적인 ‘쭌다의 경’이 펼쳐지네요.
부처님은 쭌다가 공양했던 쑤까라맛다바 요리를 드시고 ‘혈흔이 있는 설사를 동반’한 죽음에 이를 정도의 심한 고통을 겪으셨죠. 그러나 부처님은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비탄을 여의고 참아’내시며, 되레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가 느낄 가책을 염려하십니다. 그래서 아난다에게 이렇게 전하라 당부하시죠. “‘여래가 그대의 마지막 공양을 들고 열반에 들었다는 사실은, 벗이여 쭌다여, 그대에게 큰 손실이다, 그대에게 큰 불행이다.’라고 가책을 일으키게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쭌다의 공양을 드신 후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세상 사람들이 어찌 했을지 너무도 충분하게 상상이 됩니다. 쭌다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지탄과 비난의 소리를 들었을까요? 그런 일들에 대처하는 방식을 우리는 너무 자주 듣고 보았습니다. 누군가 기쁜 마음으로 베푼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먹은 후 죽음에 이를 정도의 심한 고통을 겪었다면, 기어코 그 원인을 따지고 들며 난리를 떨겠지요. 더러 겉으로는 그러지 않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는 분명 원망하는 마음과 후회하는 마음이 남아있을 겁니다. 그런 우리 마음의 작용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신 부처님은 그런 곤란함을 겪을 쭌다와 어리석은 우리들을 위해 뛰어난 가르침을 주십니다.
“아난다여,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가 이와 같이 ‘여래가 그대의 마지막 공양을 들고 열반에 들었다는 사실은 그대에게 큰 이익이다. 그대에게 큰 공덕이다.’ ... ”이와 같은 두 가지 공양은 동일한 과보, 동일한 공덕을 가져오는데, 다른 공양보다 훨씬 커다란 과보, 훨씬 커다란 공덕을 가져온다”
여기서 말씀하신 두 가지 공양이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기 전, 고행을 끝내실 때 쑤자따가 부처님께 드린 우유죽과 쭌다가 올린 공양, 이 두 가지 음식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쑤자따의 보시와 쭌다의 보시가 모두 완전한 열반을 초래했다는 측면에서 동일하고, 그 두 가지 음식을 들고 무량한 마음의 삼매에 들었으므로 성취와 관련하여 동일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쑤자따가 ‘내가 드린 그 음식을 들고 보살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회상하면 강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듯이, 쭌다도 ‘내가 올린 마지막 탁발음식으로 가르침의 궁극을 구성하는 열반이 수호되고 오랫동안 원하던 잔여없는 열반의 세계로 가는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라고 회상한다면 ‘얼마나 나에게 유익한 일인가!’라고 생각하며 강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것이니, 이 두 공양은 동일한 과보와 동일한 공덕을 가져올 뿐 아니라,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을 가져오는 보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아난다여,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에게 이와 같이 말하면 가책이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그 뜻을 파악하시고 때맞춰 이와 같은 감흥어린 시구를 읊습니다. “베풀면 공덕이 늘어나고, 자제하면 원한은 쌓이지 않고, 착하고 건전하면 악한 것은 끊어지고, 탐욕과 성탬과 어리석음이 부서지면 열반에 든다.” 참으로 ‘대자대비’라는 말의 뜻을 너무도 충분하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하나, 함께 공부하는 젊은 청년 도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생생함으로 와 닿았던 구절이 있었지요. ‘비싸카의 경’인데요. 비싸카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손자가 죽자 옷을 적시고 머리도 적신 채 대낮에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아옵니다. 그 비싸카의 비탄에 젖은 고통스러운 마음을 위해 세존이 가르침을 주시죠. “비싸카여 백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괴로움이 있고... ” 그리고 친절하시게도 백명부터 아흔, 여든..... 열, 아홉... 그리고 한 명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말씀하시며, “세상에서 갖가지 슬픔과 비탄과 고통이 사랑하는 자를 조건으로 생겨난다. 사랑하는 자가 없으면 그것들은 생겨나지 않는다. 세상의 어디에도 사랑하는 자가 없으면, 슬픔을 여의고 행복을 얻으니, 슬픔을 여의고 티끌을 여의고자 하면, 세상에 어디에도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어디 우리 젊은 청년 도반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겠습니까? 우리는 한 순간도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않으면 살 수 없게 길들여져 있지요.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내가 그토록 원하고 좋아하고 바라는 것들이 떠나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집착과 갈애가 동시에 생겨나지요. 그것이 바로 고통이라는 걸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을 얻고 나서 지금 한창 그 지독한 고통(?)을 겪고 있는 ㅋㅋㅋ 이 청년 도반과 함께, 또 결코 예외가 아닌 우리도 하루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매순간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어야 하겠지요. 우리 숱한 민호들, 모두 파이팅입니다!!
<금강경>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등을 받아 지녀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한다면, 그 복덕은 갠지즈 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일곱 가지 보배로 보시하는 복덕보다 훨씬 뛰어나다.” 우리가 몇 년 동안 함께 경전을 읽고 쓰며 나누었던 법담이 그러한 복덕을 쌓기 위한 훈련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든든하고 훈훈해집니다. 이 공부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이제 사구게를 받아 지녔으니 그것을 회향하는 일만 남았네요. 가장 중요한 일이 ‘正精進’이겠지요. 그 또한 부처님의 지혜를 통해야 하겠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앞에서 이끌어주는 스승이 계셨고 그리고 이 따뜻한 도반들이 있었다는 게 더 없는 복이라는 걸 이제야 분명하게 느낍니다. 스승님께 감사드립니다. 도반 여러분 참으로 고맙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천 개의 고원
들뢰즈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은 우리의 삶을 분석할 수 있는 모든 영역들에서 숱한 개념들을 추출하여 그 개념들을 가지고 일관된 이야기를 펼쳐내는 책입니다. 샘은 이런 <천개의 고원>을 들뢰즈, 가타리의 정치철학서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하셨죠. 들뢰즈의 정치학은 근본적으로 소수성의 정치학이라고 얘기하는데, 샘은 그 소수성이 바로 리좀이고, 도주선이며, 그게 바로 전쟁기계고 공간적으로 말하면 매끈한 공간이라고하셨습니다.
전쟁기계란 유목, 노마드와 엮이는 개념입니다. 샘은 유목의 핵심이 떠나는 게 아니라 머무는 모든 자리를 중계점, 즉 중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라고 하셨죠. 불교식으로 말하면 ‘無住’입니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음’인 것이죠. 유목은 정착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유목을 전쟁기계라는 개념과 함께 말하며 이것이 바로 국가의 외부라고 말합니다.
철학의 동기, 인간이라는 부끄러움
들뢰즈는 ‘대담’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죠. “철학을 하도록 만드는 아주 강한 동기 하나는 인간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게 부끄럽게 느껴지는 그 지점, 들뢰즈는 그런 부끄러움이 바로 철학을 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동기라고 합니다. 매우 중요한 말인 것 같아요. 샘은 최근 기사에 나온 코로나19에 맞설 백신 제조를 위해 희생되고 있는 투구게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투구게는 백신의 오염도를 점검하는 데 필수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이 게의 혈액은 박테리아나 미생물 같은 것이 들어가면 바로 응고돼버리는 특징이 있다는데요, 그래서 백신을 실험할 때 그 투구게의 파란 피를 짜내어 거기에 실험을 한다네요. 사람의 목숨을 위해 다른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어디 그런 일이 투구게에게만 있었겠습니까? 쥐를 비롯해서 숱한 동물들이 인간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죽어가는 걸 우리는 오랫동안 듣고 보아왔죠. 기본적으로 화장품 등을 만드는 화학, 제약회사들은 동물 실험이 기본이죠. 죽이기 위한 실험용 동물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오로지 인간의 먹이를 위한 도축장도 있죠. 인간만, 오직 인간만 그런 짓을 합니다. 동물들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을 얻기 위해 싸우고 죽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인간에게만 초점을 맞춰놓고 자기의 생존을 위해, 또 무엇인가를 위해, 뭔가를 해치는 일을 당연하게 자행하죠. 그런 행위들 속에는 인간과 동일시하는 뭔가 있습니다. 마치 인종주의자가 인간을 백인과 동일시하며 남성주의자가 인간을 남성과 동일시하는 분별심이 있듯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거개의 폭력에는 그렇게 나와 동일시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분별심이 작동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라는 부끄러움이 함축하는 의미는 매우 넓지요. 그렇게 본다면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 철학’이기도 하겠네요. 들뢰즈 가타리가 얘기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파시즘입니다. 여덟번 째 고원에서 말하고 있는 미시정치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파시즘이죠. 샘은 파시즘이란 정치 형태가 아니라 욕망의 형태라고 하셨어요. 파시즘은 우리의 욕망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동일시의 논리인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바로 ‘我相’입니다. ‘나는 나’인 것이죠.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identify' 가 가족주의, 인종주의로 이어지는 것이고 남성우월주의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로, 그리고 인간주의로까지 이어지며 맞물리고 있는 것이죠.
유학에서는 소인은 ‘후안무치(厚顔無恥)’하다고 하죠. 즉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 소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헐뜯고 비난할 때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욕망과 비슷한 욕망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죠. 그걸 느끼면 다른 벡터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다른 방향으로 도주선이 그어지지 않겠죠. 들뢰즈가 말한 클리나멘도 그런 의미라고 하셨습니다. 습관적으로 살아가던 삶에서 우리가 미세하게나마 방향을 틀 수 있는 힘은 어떤 마주침들이 있을 때이죠. 그런 마주침이 일어나는 순간이 바로 클리나멘의 순간일 겁니다.
컨트롤 사회, 홈 파인 공간
푸코는 근대사회를 감시사회, 규율사회라고 말했는데요, 들뢰즈는 일찌감치 우리 사회를 ‘컨트롤(control)' 사회라고 했습니다. 컨트롤 한다는 것은 ’조절‘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그 조절은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코드와 주파수를 적당히 맞추고 조정해주는 것이죠. 들뢰즈 가타리는 이것을 매끈하다고 표현합니다. 얼음판처럼 미끄러지는 그런 공간이 매끄러운 공간입니다. 그런데 홈이 파였다는 것은 줄이 그어져 구획되었다는 것이죠. 고속도로와 같은 홈 파인 공간에서는 어떤 속도 이하로 달리면 안 되고, 자전거와 같은 것도 다닐 수도 없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전기와 철도는 확실하게 시간과 공간에 홈을 파놓은 근대의 최고 발명품이죠. 그런 발명품이 있어 인간은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일을 하게 되었고, 근대와 자본주의는 그렇게 홈을 파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열차의 경우, 철로 하나 놓으려면 3일은 산을 깎아야 한다죠. 자고나면 산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공간 하나를 열차가 다니는 길로 만든다는 것은 그 길을 원래 점유하고 있던 동물들이라든가 인간의 신체성을 제거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서 그냥 속도가 빨라졌다는 사실만 생각합니다.
그런 홈 파인 공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미술관이나 국립박물과 같은 공공장소는 누구는 가면 되고 누구는 안 되며, 어디는 어떤 방식으로 가야한다는 그런 구획이 다 정해져 있죠. 홈 파인 공간에는 그런 보이지 않는 계급성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국가 시스템도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신체를 촘촘하게 컨트롤 하는 것들이죠. 그런 컨트롤은 억압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런데 유목민은 그런 홈을 따라 다니지 않죠 유목민은 매끈한 공간을 질주합니다. 그 공간은 동물의 속도와 인간의 속도가 공존하는 곳이고, 인간이 다니는 길과 동물이 다니는 길이 따로 있을 수가 없는 곳이죠. 홈 파인 공간은 그렇게 우리의 신체를 촘촘히 컨트롤 합니다.
포획 장치와 자본주의, 그리고 매끈한 공간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정치와 욕망의 문제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언제는 국가화하려고 하는 구심형, 중심화하려고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구심화하려는 힘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밖으로 나아가는 원심적 힘이 동시에 있습니다. 국가가 포획하려는 힘을 들뢰즈 가타리는 포획 장치라고 부릅니다. 마치 새를 잡게 해놓은 장치를 마련해놓고 새들을 포획하여 그 새들을 가두고, 갇히게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장치가 포획장치입니다. 즉 국가가 하는 근본적인 역할은 억압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정한 행동양식이 탁 덫에 걸리도록, 우리의 욕망이 일정한 흐름을 따라 몰리도록 홈을 파는 것이죠. 그것이 포획장치입니다. 국가는 그런 장치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후기 자본주의로 올수록 국가의 포획장치인 홈은 자본의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것으로 작동합니다. 만약 그러한 포획장치가 자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모든 걸 다 철회할 수 있죠. 그러니까 언제나 최종시급은 국가가 아니라 자본입니다. 가끔 역사적으로 국가의 포획장치와 자본은 그 두 개가 대립되는 것처럼 드러날 때가 있지만, 결국 자본의 잉여가치의 생산에 도움을 주는 것은 일종의 중앙 정보 처리 장치 같은 국가의 포획장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점점 디지털 사회로 진입하게 되면서 홈 자체가 없어져버리는 매끈한 디지털 공간이 생겨나게 되었죠. 자본의 핵심은 자본이 얼마나 빠르게 회전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가 웹 서핑을 한다고 말할 때 서핑의 그 매끈함이 바로 자본이 발명해낸 새로운 회전 속도입니다. 그 대표적인 게 스파브랜드인데요, ‘자라’나 ‘유니클론’ 같은 의류브랜드나 ‘이케아’ 같은 가구 브랜드들은 디자인으로 포장하여 빨리 순환시킬 수 있는 상품들을 판매합니다. 뭐 별로 싼 가격(?)은 아니지만 어쨌든 소비자의 눈을 현혹시키는 디자인으로 포장하여 비교적 싼 가격으로, 한 번 사용하고 나면 형태가 변해서 폐기하고 새로 구입하도록 만든, 그런 상품들을 생산하죠.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소비하고 순환하도록 회전력을 높이며, 매끈해진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쓰고 버리며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배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매끈해진 공간이 후기 자본주의인 것이죠.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티오이디푸스>에서 모든 사회는 다 자기의 한계점을 갖고 있지만 끊임없이 그 외연을 확장한다고 말합니다. 즉 자기의 한계를 자기 스스로가 초월하면서 간다는 것이죠. 지금 시대는 클릭 하나로 모든 것을 해내는 디지털과 연관된 산업들이 돈을 버는 시대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나무와 리좀은 이분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죠. 수목형에서 늘 리좀이 솟아날 수 있지만 거꾸로 리좀적인 방식이 수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중앙화하려는 힘과 그 중앙에서 벗어나려는 힘, 규정하려는 힘과 그 규정에서 벗어나려 하는 힘, 이 이질적인 두 힘들이 계속 연동되면서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의 핵심은 중심을 향해서 발언하고 언제나 중심을 바꾸려고 하는 거시적인 욕망이 아니라, 미시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도주선을 만들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일 겁니다.
소수적, 도주로, 그리고 전쟁기계
누군가 들뢰즈에게 ‘좌파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들뢰즈는 코웃음을 치며 좌파 같은 건 없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소수적인 것만 있을 뿐이라고.샘은 이 소수적이라는 개념이 정치철학을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라고 하셨죠. 소수적이라는 얘기는 포획장치에도 나오고 매끈한 공간과 홈 파인 공간에도 나옵니다. 즉 들뢰즈 가타리가 파헤치려고 하는 핵심은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모든 방식들, 이거냐 저거냐의 선택지 형태로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마치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것 같지만, 선택지 자체가 허구라는 것이죠. 우리는 10개의 선택지 중 택하는 것보다 20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더 자유로운 것처럼 느끼지만, 그렇게 많은 선택지가 있어도 결국에는 대자본이 다 독식하는 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대자본이 다 먹는 이런 구조에서는 자본의 경쟁력이 없어집니다. 즉 선택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들뢰즈 가타리는 소여(所與)가 아니라 허구가 문제라고 말합니다. 즉 뭘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어떻게 도주로를 발명할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이죠. 국가의 형태와 작용과 기능이 달라지더라도 구심화하려는 힘, 자본의 힘으로 계속 포획하려고 하는 힘은 늘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포획되느냐 아니면 계속 이 국가의 외부로 달아나려고 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죠. 그렇게 달아나려고 하는 국가의 외부, 이것을 들뢰즈는 ‘전쟁기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보통 내부가 있고 그 내부에서 벗어나는 게 외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들뢰즈 가타리는 내부는 외부를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말하죠. 즉 외부라고 하는 바깥은 내부의 네거티브가 아닙니다. 내부가 먼저 존재하고 그 바깥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갑자기 툭 튀어나가는 무언가에 의해 안이라고 하는 내부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중심으로 향하는 힘만 있으면 원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중심과 관계하는, 즉 어떤 구심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힘의 지대와 그 다음 그 중심과 관계하는 외부의 힘들이 있을 때 원이 만들어집니다.
영토라는 것도 달아나는, 영토화되지 않은 힘들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이죠. 영토에 갇히지 않은 힘들의 존재를 일정한 관계로 형성할 때 영토가 되는 것이지 영토가 먼저가 아닙니다. 이주민과 정주민은 땅을 소유하기 위해 옮기지만 유목민은 소유가 아니라 점거하는 것이죠. 점거라는 말은 ‘라떼’는 아주 친밀했던 단어였습니다. 총장실 점거농성, 이 때의 점거란 총장실이라는 공간의 기능을 변환시키는 행위죠. 일정한 공간을 점거하면 그 공간의 기능이 순식간에 변환됩니다. 그러니까 점거는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죠. 유목민의 점거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말이죠. 즉 정주 내지는 정주를 목적으로 하는 이주민이 소유에 의해 규정된다면 노마드는 점거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과 욕망, 중심으로 포획되지 않는 힘
들뢰즈와 가타리는 맑스주의하고는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맑스는 매우 중요한 사상가였다고 합니다. 맑스가 그랬던 것처럼 들뢰즈 가타리의 관심은 자본이 어떻게 인간의 욕망을 컨트롤하고 어떻게 인간의 모든 신체가 관계맺고 있는 이 시공간 자체를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자본주의가 이윤을 위해 어떻게 자기의 외연을 확장하고 자기 한계를 넘어가면서 사람을 컨트롤 하는지에 주목했던 것이죠. 얼핏 보면 자본주의와 복지가 대립되는 것 같지만 자본은 오히려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성화하여 사람을 길들입니다. 푸코도 복지와 자본을 이분법으로 말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것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항상 중심이 있는 곳에는 중심으로부터 이탈하려는 힘도 존재하죠. 푸코는 이것을 권력이 있는 곳은 언제나 저항이 있다고 표현했죠.
다시 말해 어떤 조건이 딱 맞아 떨어졌을 때 전쟁 기계가 국가가 된다거나 전쟁기계가 국가적으로 형성되는 게 아닙니다. 전쟁 기계는 국가의 바깥에 있는 좋은 것도 아니며 반드시 싸움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싸울 때조차도 전쟁 기계의 핵심은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국가에 포획되지 않는 어떤 다른 힘을 발명하는 데 있죠.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나’라고 하는 ‘我’를 형성하는 힘 속에는 언제나 ‘我’로 포획되지 않는 또 다른 힘이 내 안에 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정치론과 예술론은 다 자연학적인 기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정치의 논리도 자연의 원리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운 여름을 보낸 무성했던 나무도 가을 바람이 불면 견디지 못하고 꺾입니다. 인간 사회도 이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며 그런 자연 원리 속에 정초하는 거지요. 이러한 자연의 원리에 입각해서 본다면 자연 안에 있는, 신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자연의 원리와 맞지 않는 방식으로는 진행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인간이 제 멋대로 뭔가를 하려해도 그것은 반드시 끝날 날이 옵니다.
샘은 들뢰즈의 정치학은 스피노자의 정치학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일정한 때가 지나면 썩게 되어 있고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는 국면이 온다고 하셨죠. 인간 사회의 정치적인 문제가 다 자연의 리듬과 맞물려서 간다는 것은 동양의 정치철학과도 맞물립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가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이고 다 미쳐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은 힘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힘들을 어떻게 찾아내어 그 힘들과 접속하느냐가 바로 도주선일 것입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사용한 미래라는 말은 아직 오지 않은, 앞으로 올 것이라는 무슨 미래태를 나타내는 어법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 현실화될지 모르지만 지금 구성 중인 어떤 것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마존이나 구글 같은 대자본이 정보를 독식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네트워크라는 것이 우리가 가진 오프라인의 한계를 더 확장시켜 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미 네트워크 자체를 자본이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연결 접속만이 만능키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을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말하면 리좀이었는데, 이제 디지털 리좀적인 것에서 이미 나무가 생기기 시작한다는 말이겠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가 전혀 추측하지 못한 일이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막 벌어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리좀이었는데 나무가 되고 그 나무에서 또 어떻게 리좀을 만들어낼 건가 하는 운동만 계속 있는 시대인 거죠. 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진짜 완벽하게 꿈의 시대, 幻의 시대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그럴 것 같다고 하셨죠. 이런 시대에 어떻게 윤리를 만들고 살아야 되는 건지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고민해봐야 한다고 하셨죠.
생성, 되기, 그리고 잠재성
결국 들뢰즈 가타리가 하고 있는 논의는 이거다, 저거다라는 항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항들을 계속 가로지르는 흐름,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도주선을 어떻게 창조해낼 것인가가 결국 이 모든 논의의 결론이라고 하셨습니다. 포획장치나 매끈한 공간 등은 우리 사회의 배치에 대한 분석입니다. 그리고 그 배치는 언제나 도주선을 내재하고 있죠. 무언가 있으면 동시에 거기에는 그 무언가로 환원되지 않는 힘 또한 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항상 어떤 열망 때문에 실망을 합니다. 가장 열광적이었던 사람이 가장 실망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아왔습니다. 희망과 절망은 늘 같은 세트죠. 그렇다면 희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어떻게 끊임없이 도주선을 만들까, 어떻게 점거하여 기능 전환을 할 것인가, 어떻게 이 중계점을 계속 이동하며 우리의 행위를 구심화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생성이란 뭔가가 위치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완벽하게 어떤 것으로만 동일화되면 생성을 얘기할 수 없죠. 우리가 규정성을 갖고 보게 되는 것은 규정되지 않은 것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걸 다 갖고 있다는 것은 타자성을 가짐으로써만 ‘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건 내가 나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니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신을 완벽하게 내재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것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변형하느냐에 따라서 양태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이것이 나’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렇게 규정된 것으로 나를 동일화하는 현상일 뿐, 우리에게는 나라고 믿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죠.
들뢰즈는 그것을 현실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되기’가 보여주는 것은 현실적인 것은 그 조건 속에서 그렇게 현실화된 것일 뿐, 그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다른 것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이것임’으로 존재하자마자 ‘이것임’에 의해 사라지는 존재인 것이죠. 그런데 이 때 사라진다는 것은 소멸하는 게 아니라 잠재되는 것입니다.
샘은 이것이 들뢰즈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이야기 되는 현실성과 잠재성의 철학이라고 말씀하셨죠. 들뢰즈는 그 존재론에 입각해서 모든 사회를 분석합니다. 그러니까 사회도 지금 우리에게 드러난 현실이 전부가 아닌 거지요. 드러난 현실은 그 조건 속에서 이렇게 현실화된 것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어떤 힘이 늘 내재되어 있는 상태에서 어떤 힘이 현실화되고 있는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드러나지 않은 힘이 드러나는 건 언제일까요? 그건 현실적 조건이 되어야 드러납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세계가 똑같이 자본주의화 되지 않은 것과도 같지요. 현실적인 조건이 드러난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설명한 것처럼 양태가 어떤 양태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그 한계 내지는 조건을 갖는데, 현실적 조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성을 계속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건이 현실화되는 방식은 저마다 다 다릅니다. 즉 우리는 원인이 비슷하면 결과가 다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원인이 비슷해도 결과는 다 다르다는 것이죠. 들뢰즈는 그것을 잠재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는데요, 이때 말하는 잠재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힘 같은 것이죠.
동양에서도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음양의 관계성을 통해 어떤 사물이 현실적으로 나타났을 때 그것은 어떤 일정한 형식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그 사물이 변화해 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道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 때 말하는 道가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잠재된 에너지입니다. 잠재된 에너지가 일정한 관념이나 일정한 신체성으로 드러나는 건데,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드러난 것으로 활용되지 않은 것을 존재가 내재하고 있어야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나는 나인데 내가 아니기 때문에 계속 늙어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늙지도 않을 겁니다.
이것이 ‘되기’의 존재론입니다. 들뢰즈는 그것에 입각해서 정치를 얘기합니다. 그것을 다르게 말하면 소수적인 것을 발명해라. 소수자가 되라는 말이겠지요. 오직 소수자에게만 ‘되기’라는 말이 붙습니다. 다수적인 것 되기는 없다고 했죠. 소수적인 것만이 중심, 즉 나무화하는 힘으로부터 달아나는 힘이니까요. 이것은 규정되지 않은 힘이니까 이게 바로 생성입니다. 생성은 중심적인 것에 항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하라고 샘은 당부하셨습니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을 녹여 에세이로 풀어낼 일만 남아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인 에너지가 어떤 변화를 추동해낼 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깜냥껏 가볼 밖에요. 다들 힘내어 마지막 추수를 해보십시다. 그동안 어리석은 중생들을 이끄시며 그 작은 몸으로 험난하기 짝이 없는 천개의 고원을 함께 횡단해주신 스승님께 큰 절 올립니다. 나무지혜보살!
와~~~~~쌤이 늘 말씀하셨죠? 하늘은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일만을 맡기신다고... 9주차 후기를 (낮에 잠시 눈물을 보이셨으나) 이렇게 보란듯이 감당해내신 왕언니 짱! ^---^ 이제 우리 마지막 추수를 하러 고고씽~~>ㅅ<
이렇게 따뜻하고 자세한 회향후기라뇨… 한 해 동안 동지인듯 스승인듯 질문해주시고 알려주시고 함께 머리맞대주신 선생님들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에세이 함께 잘 마무리하면 좋겠어요 ㅎㅎ
엄살현숙이라 불러야겠네요^^ 아난다에 빙의한 후기를 쓰실거면서~
쌔앰~~~ 저희랑 같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