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덕분에 줌수업을 여러 번 하기는 했어도, 폭우와 물난리로 줌수업을 하기는 또 처음입니다. 저희 불교 학인들에겐 다행히 큰 피해는 없지만 제 주변에는 물바다인 도로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뒤 며칠째 우황청심환을 드신다는 분도 있습니다. 부디 저희가 다음 주에는 무탈히 만나 수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매주 연구실에 모여 앉아 공부를 할 수 있는 게 결코 당연하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로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게 맞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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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철학을 공부할 때 등장하는 표현이나 개념을 지금 저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고대의 자연학이란 것도 현대 과학과는 다르고 원자, 무게 기울어짐... 이런 표현들이 등장할 때 그 맥락을 잘 살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 말로 된 번역은 단순할지 몰라도 원어인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보면 맥락이 많이 다르다고 해요. 가령 퓌롤로지(자연학)는 자연을 어떤 식으로 담론화 하는가의 관점으로 봐야지 현대 과학처럼 이들의 주장이 증명 가능한가, 맞나 틀리나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샘께선 자연학을 비롯한 고대 철학을 볼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철학 통해 얼마나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어요. 그런 점에서 이번 시간에 배운, 에피쿠로스를 새롭게 발견하고 해석해낸 마르크스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피쿠로스는 원래부터 철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이 분은 데모크리토스의 아류 정도로만 여겨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철학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를 비교하며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단순한 원자론이 아니라 여기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사유의 차이가 있음을 해석해 낸 것이라고 하죠. 고전이란 끊임없이 새롭게 독해되면서 그 생명력을 이어가나 봅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처한 세계를 다르게 이해하고 변혁하는데 기존의 철학을 어떻게 작동하도록 할 것인지 대단히 깊게 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의 탁월한 해석으로 인해 에피쿠로스는 신학적이고 초월론적 사고와 싸우는 내재론적 철학의 출발점에 서게 되고요.
원자론을 받아들인 에피쿠로스도 원자가 허공에서 낙하 운동을 하고 충돌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원자론을 주창한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의 충돌이 일어나는 이유를 ‘소용돌이’라는 외부의 힘, 이미 결정되어 있는 힘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죠. 그런데 만약 그렇게만 본다면 인간이 굳이 철학을 할 이유가 있을까? 라고 에피쿠로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때 인간에게 자유가 있고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품고 원자론을 사유합니다. 철학을 하면서 자유롭고 행복 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에 의미가 있으려면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자의 충돌, 이것이 외부적 힘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하여 에피쿠로스는 충돌을 일으키는 힘, 클리나멘을 언급하며 이것은 원자 외부의 힘이 아니라 원자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데모크리토스가 말한 원자들의 충돌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혁명적 지점이라는 걸 마르크스가 발견해 냅니다.
원자가 스스로 충돌을 일으키는 힘을 지닌다는 것은 인간인 우리에게 주어진 대로만 살지 않을 가능성, 가보지 않은 길을 갈 수 있는 힘이 우리 자신에게 내재해 있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그런 점에서 에피쿠로스야말로 고대를 지배하던 초월적이고 신학적인 사유 -데모크리토스도 벗어나지 못했던- 로부터 벗어난 최초의 내재론적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하여, 인간에게는 이미 주어진 강제들로부터 벗어나는 힘이 있고 이 강제를 비켜나기 위한 자유를 구성하는 만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고요.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발견한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인 클리나멘의 철학적 의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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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부분이 나오면 저는 늘 어렵게 느껴지는데, 이번 구사론에 시간에 대한 관점이 4가지나 등장을 했습니다. @.@ 윤순샘과 미영샘은 공통과제로도 정리해오시고 스님께서도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는데 저는 여전히 헷갈려서 구사론에 등장하는 시간관을 잠시 복습해보겠습니다.
설일체유부의 시간관은 한 마디로 삼세실유(三世實有)입니다. 실유(實有)란 가유(假有)에 대립되는 것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쪼개거나 부수더라도 그 자신의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 실유입니다. 항아리가 깨져서 산산조각이 나면 더 이상 항아리라고 할 수 없기에 항아리는 가유가 되지만 비록 항아리는 깨지더라도 항아리를 만든 진흙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실유가 됩니다. 설일체유부는 시간을 바로 이러한 실유로써 주장했다는 겁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죠. 이 주장의 이론적 근거(正理)는 첫째, 식이 생겨날 때 대상(境))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데 과거, 미래세 역시 식의 대상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업과 관련하여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로 낙사한 업은 이미 소멸해서 현재에 어떤 결과도 없을 것이고,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행위 역시 어떤 결과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겁니다. 무인유과(無因有果), 유인무과(有因無果)를 피하기 위해선 과거, 현재, 미래가 실재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죠.
유부의 시간관엔 네 종류의 학설이 있는데 각각의 핵심을 구사론은 존재(類), 양상(相), 상태(位), 관계(待)로 언급합니다. 먼저 존자 법구가 주장한 시간관은 현상적 존재(類)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의 차별이 있다는 학설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여기서는 존재의 변화가 ‘아직 오지 않은 상태’(=未來)인 미래를 현재보다 먼저 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아리가 되지 않은 상태인 진흙은 항아리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未來’가 됩니다. 반면 지금 항아리의 모양을 갖추고 있으면 ‘현재’라고 할 수 있고, 만약 항아리가 깨진다면 깨진 파편에게 항아리는 ‘과거’에 해당되므로 깨진 조각들은 과거가 됩니다. 즉 미래(오지 않은 항아리인 진흙)-현재(항아리)-과거(깨진 항아리)의 순서가 된다는 것이 법구의 주장입니다.
두 번째, 존자 묘음이 주장한 것은 삼세의 양상이 다르다는 학설인데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실재하면서 드러나는 양상은 셋 중 어느 하나가 더 강하게 발현된다는 겁니다. 진흙의 개념이 더 강하게 드러나면 미래가 되고, 항아리가 깨져서 현재 항아리의 영향력이 지나가고 깨짐의 영향력이 커지면 과거가 된다는 주장입니다. 핵심은 삼세가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이고 어떤 것의 힘이 더 강하냐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눈다는 주장입니다.
세 번째는 존자 세우의 주장으로 상태(位)의 다름에 따라 삼세의 다름을 주장하는 것인데 스님께서는 이것을 생-주-멸의 상태 변화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생의 상태, 생이 발생해서 지속되는 상태, 그리고 끝나서 없어진 멸의 상태 이렇게 세 가지 변화를 삼세의 다름으로 주장한 것이죠.
네 번째 시간의 관계(待)성을 주장한 존자 각천은 과거 현재 미래를 상대적인 기준에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펜의 길이가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짧고 길고가 정해지듯이 시간이라는 것도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중심이 현재가 되고 그 이전은 과거, 그 이후는 미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삼세를 양상으로 설명한 존자 묘음의 주장처럼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혼재하는 관점입니다.
네 가지의 주장 중에서 설일체유부는 생-주-멸 상태의 변화에 따른 존자 세우의 시간론을 정설로 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어서 이 관점의 모순에 대한 비판이 따릅니다. 여전히 어렵습니다만, 시간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이들이 시간에 대한 사유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이끌어 갔는지, 어떤 논지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불교철학 8월 17일, 6회 수업 공지입니다 ***
- 「아비달마 구사론」 967-1013쪽까지 읽고 공통과제 올립니다. (21권 중간부터 22권 중간까지입니다. 분량을 잘 확인하세요!)
- 간식은 길례샘과 호정샘, 6회차 후기는 태미샘.
수요일에 뵐께요~
존재(類), 양상(相), 상태(位), 관계(待)의 시간관을 보면 왠지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생각납니다. .....
저는 첫번째 시간관에서, 왜 굳이 '항아리의 미래' - '항아리의 현재' - '깨진 조각의 과거' 순으로 시간을 배열하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볼 때 뭐가 중요한 것인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