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대철학 시간
지난주 민호샘의 에피쿠로스학파에 대한 강의에 이어 이번 주에는 채운샘이 보충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먼저 에피쿠로스학파를 특징짓는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여러 각도로 설명해주셨습니다
먼저 에피쿠로스를 얘기하기 전에 데모크리토스를 얘기 안할 수가 없는데요. 에피쿠로스가 원자론을 들고 나왔을 때 당시 사람들은 데모크리토스와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데모와 에피의 찾이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클리나멘이라는 개념입니다.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본성이라는 책에서 딱 한번 사용한 용어인데, 이게 후세에 에피쿠로스를 다른 학파와 차별시키는 중요한 개념이 된 거죠. 클리나멘은 기울어짐, 편위, 빗겨남, 어긋남, 약간치우침, 영어로는 디클라인으로 해석됩니다. 이들 용어는 비슷하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주로 클리나멘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데모가 세계의 본성에 대해 주장했던 것을 더듬어 보면, 원자가 있고 그것들은 운동을 합니다. 운동하려면 허공이 있어야 합니다. 붙어있으면 운동을 못하니까요. 허공은 운동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입니다. 원자는 수직낙하운동을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설명하기 힘듭니다. 부딪히고 해체되어야 하는데 이 때 필요한 게 충돌입니다. 근데 충돌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데모는 충돌의 원인은 소용돌이(회오리)라고 합니다. 원자 내부가 아닌 외적요인이 소용돌이인거죠. 원자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외부에서 뭔가 들어와야 한다고 본 겁니다. 회오리는 필연이며 운명이며 결정된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생성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회오리가 존재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이 결정론을 거부합니다. 충돌의 원인을 회오리가 아닌 클리나멘이라고 본 거죠. 외부로부터 원인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원자의 내부에 내재되어 있는 실존의 조건에서 그 원인을 가져옵니다. 원자를 비롯한 세상 만물은 정해진 길이 있어 보입니다. 직선낙하운동으로 비유되죠. 하지만 원자는 그렇게 하지 않을 내재적 힘이 있습니다. 빗겨나고 어긋나고 치우칠 수 있는 힘, 그로 인해 개체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세계의 변화와 생성의 원리를 클리나멘에서 찾은 겁니다. 모든 원자에는 그렇게 각자의 무게중심을 가집니다. 무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무게가 아닙니다. 원자 각자가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무엇입니다. 따라서 단일한 중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우주 천체는 단일한 중심이 있어 원운동을 하는 것 같지만 각각의 별들은 자기중심성, 즉 고유한 자기 무게를 가지고 있기에 우주에서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내며 관계를 맺고 있는 겁니다. 원자는 고유한 무게중심을 가지고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합니다. 세계의 변화와 운동, 경계와 차이를 설명하는데 클리나멘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막스의 역할이 상당히 큽니다. 변혁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가능성을 논하기 위해 막스는 에피쿠로스의 클리나멘을 재해석하며 자신의 철학에 힘을 보태게 된 거죠. 막스가 그런 인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에피쿠로스를 해석해 냈기에 가능했던 거겠죠. 루크레티우스나 막스가 얘기하는 자유는 바로 이런 겁니다.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자각하고 현실화하는 만큼이 자유입니다. 바로 그 만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죠. 근데 정해진 길만 가는 게 오히려 덜 두렵지 않나요. 정해진 길에서 빗겨나가면 불안하지 않나요? 그리고 자유로운 만큼 자유에 대한 책임이 있기에 더 두려울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사물의 본성, 원자의 본성은 오히려 직선운동에 더 안정감을 느끼고 자유로움을 느끼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대대로 해왔던 강력한 힘이니까요. 안정감과 자유로움은 같이 갈 수 없는 건가요? 오히려 저는 막스 같은 사회 혁명가 선동가들이 ‘너 안에 힘이 있어, 넌 할 수 있어’ 라고 추동하고 채찍질하는 거 같아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전체 혁명이지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 가끔 철학자들의 생각이 넘 좋아 흠뻑 젖어들다가도 어느 순간 그들의 거대하고 견고한 생각에 압도되어 스스로 강요받는 느낌도 있습니다. 공부함에 있어 비판이 주가 되면 이렇게 되는 거겠죠. 이 삐딱함. 빗나감 기울어짐은 이게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철학함에 있어, 공부함에 있어 어떤 시각을 가지고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철학이 나를 얼마나 다르게 사유하게 할 것인가. 나를 바꾸는데 기존 철학을 작동시켜야 하는 거죠. 내 사유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으로서의 철학. 철학은 작동하는 겁니다. 철학은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작동하고 움직이는 것으로써 철학만이 있는 거죠. 유용하게 써먹어야 철학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정말 요즘엔 말로 떠드는 것만으론 좋다라고 느껴지지가 않는데 제가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그 한계가 보입니다. 전 말로만 변화니 자유를 부르짖지 막상 변화 앞에서는 쪼그라듭니다. 안주하는 삶이 아직은 좋다고 느끼는 듯합니다^^;; 근데 후회하지는 않겠습니다.(불교강의에서 후회에 대해 나오죠) 두고두고 이 질문을 가지고 따져보겠습니다~
효암스님께 질의 응답 시간
1.가유와 실유
끊어보고 나눠보았는데 그래도 남아 있다면 그건 실유이다. 진흙은 깨고 부수고 쪼개어도 진흙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실유이다. 항아리는 망치로 깨면 항아리라는 본질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가유이다. 하지만 진흙은 흙먼지와 비교하면 가유이다. 물기가 마르면 흙먼지가 되면서 진흙의 본질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가유이다. 이처럼 무엇과 대비되느냐에 따라 가유와 실유는 나뉜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적 사고로 실유와 가유를 따지다 보면 모순을 만나게 된다. 진흙이든 흙먼지든 쪼개고 쪼개면 무한소급이 되어 그것의 실체 없음, 본질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유부의 가유와 실유 논쟁은 생각의 생각을 거듭한 결과이지,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불교적 입장에서 대상을 잃어버린 질문이다. 손바닥에 위에 놓여진 대상에 주목해야한다.
2.비만과 질
만은 ‘나이김’이다. 나로 가득찬 상태이다. 만에는 7가지가 있다. 만은 나보다 낮은 사람에 대해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과만은 나와 동등한데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만과만은 나보다 잘났는데 내가 잘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만은 근취온이 곧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증상만은 얻지 못한 공덕을 얻었다고 여기는 것이며, 비만은 상대가 나보다 아주 잘났는데 나보다 조금 잘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앞의 3개의 분류는 상대와 비교하며 나를 가득 채우는 것이고, 뒤의 4가지는 대상을 보고 나를 가득 채운 상태이다.
질은 진심의 결과물이다. 질투는 내안의 내가 결핍되고 가득차지 않아서 생기는 마음이다. 그래서 날이 서있다. 상대에게 공격적이다. 하지만 만은 내안에 내가 가득 찬 것이다. 나로 가득 차면 질투심을 가질 여력도 없다. 그중 비만은 상대가 잘난 게 10개이면 1개정도만 잘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질과 만은 방향이 서로 다르다. 질은 바깥으로 상대에게 향하는 것이고, 만은 나에게로 향하기 때문에 나로 가득차서 남이 안 보이는 상태이다.
3.악작과 후회와 참회
악작은 '아 내가 잘못했구나' 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후회이다. 선을 후회해서 불선이 되는 경우이다. 행이 없으면 악작이 아니다. 수행할 때 후회는 우리가 잘못한 후 얼른 알아차려서 즉시 후회해 결과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전생의 불선업이나 이생의 불선업이 우리를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후회이다. 후회는 선도 되고 불선도 된다.
참회는 내가 하지 않은 것도 후회하는 것이다. 참은 뉘우치는 것이다. 고로 참회는 내가 하지 않은 것도 뉘우치는 것이다. 알고 지은죄, 모르고 지은죄도 뉘우치는 것이다. 다른 중생의 죄도 참회한다. 이는 악작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행이 없는 상태에서 악작이라고 하는 것은 약간의 무리수가 있다. 전생의 죄까지 참회하는 경우는 우리가 행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악작이라고 할 수 없다.
악작과 참회의 가장 큰 차이는 4종 대치력에 있다. 이는 자리를 바꾸는 힘, 잘못한 것을 완전 자리를 바꿔서 선업의 흐름으로 바꾸는 힘이다. 뉘우치고, 다시하면 이런 벌을 받아야지, 부처님이나 스승 같은 증명처 앞에서 다시 하지 않겠다고 참회하는 것이 따라야 한다.
따라서 악작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며, 참회는 마음이 아니라 신구업으로 완전히 확실하게 업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악작은 마음의 흐름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짓는 업이지 쌓는 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회는 악작이 구체화되고 구조적으로 된 것이다. 참회에는 여러 가지 참법이 있다.
제대로 악작을하는 법은, 자기 목표 설정이 확실해야 한다. 그리고 정념(거듭 떠올리는 것)과 정지(알아차림)의 수행이 따라야 한다. 업은 짓는 것 자체를 막을 수 없다. 내가 다 그 원인이 형성되는 것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원치 않는 업은 그 즉시 흐름을 끊어서, 업이 나를 끌고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악작이다. 그래서 평소에 정념과 정지를 갖춘 악작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좋은 수행이다.
4.자재기와 타력기
자재기의 뜻은 자유롭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무명에는 2가지가 있다. 번뇌와 상응해서 일어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멍해서 자기 혼자 일어나는 무명이 있다. 전자가 타력기 후자가 자재기이다.
아비달마구사론 강의시간
스님께서 많은 얘기를 해주셨는데요. 책을 보면서 단편적인 설명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옮기기 버겁더라구요. 마지막에 삼세에 대한 논쟁이 흥미로와서 이 부분만 정리해 올립니다~
*삼세에 대한 논쟁
이 논쟁은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번뇌를 언제 끊을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다. 유부는 삼세실유를 주장한다. 유부에게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번뇌를 끊는다고 한다면 과거에서 끊는 것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 구분을 해야 한다. 당시 4명의 존자가 과거 현재 미래를 어떤 순서로 놓을 것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근거를 주장한다.
- 법구존자 왈, 미래는 말 그대로 ‘오지 않음’이다. 항아리가 오지 않음, 곧 미래는 진흙이다. 항아리가 깨지면 그것은 항아리의 과거이다. 이것의 근거는 事 라는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는 실재이다. 공능은 ‘1초 뒤에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실재의 정의가 ‘뜻할 수 있는바’이다.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事자를 쓰는 것이다. 항아리가 오지 않음이 먼저이기 때문에 미래가 먼저 와야 한다. 그 다음 현재, 그다음은 항아리가 깨져서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과거이다. 과거는 항아리의 본성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법구존자의 주장대로라면 삼세는 미래 현재 과거 순서가 되어야 한다.
- 묘음존자 왈, 상태가 변하는 순서대로 놔야한다. 삼세가 존재하지만 과거로써 좀 더 힘이 강하면 과거이다.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태 순서대로 존재한다. 항아리가 깨지면 항아리의 미래이다. 매순간 3세는 공존하지만 어떤 것이 좀 더 힘이 강하냐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분별한다.
- 세우존자 왈, 행위가 일어나지 않음(불생), 행이 발생함, 행이 없어짐의 순서대로 3세는 존재한다. 생주멸을 하는 상태, 행위의 상태에 따라 삼세의 순서가 존재한다. 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다.
- 각천 존자 왈,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서 삼세를 나눠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하면 안 된다. 펜의 길고 짧음은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한다. (관계)
유부에서는 이들 중 허물이 있긴 하나, 굳이 하나를 뽑자면 가장 그럴싸하다고 하는 세우존자의 의견을 따릅니다. 저 역시 세우존자의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다만 법구존자의 주장이 흥미로웠는데요. 들어보면 이 또한 틀린 말이 아닌 거 같더라구요.
이상으로 후기 마치겠습니다. 후기가 좀 늦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열병이 나서 3일간 병간호하며 정신줄을 놔버렸습니다. 다행히? 코로나는 아닌 걸로. 물론 그것 또한 확실치 않지만요ㅎ 컨디션 잘 회복해서 수요일 간만에 얼굴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데모와 에피ㅎㅎ 확 친숙해지네요
그나저나 맑스가 '너 안에 힘이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것을 기분좋게만 생각했는데, 부담스럽게도 볼 수 있군요. 삐딱함,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