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가 늦어 꽁지가 된 듯하여 죄송합니다. ^^;; 불교 학인들께선 내일 동대구를 향해 내려가는 기차나 버스 안에서 이 글을 읽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왜 동대구인가 하면 저희가 3학기 7회차 불교 수업은 청도 운문사에서 진행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죠! 운문사는 효암 스님께서 출가해서 공부를 하셨던 절이온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구사론을 깊이 공부하신 어른 스님도 계시다고 하고요. 한 번 가보겠느냐는 스님의 제안에 불교팀 거의 모두 손을 드신 바람에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가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이번 수욜 수업은 운문사 도량에서 공부하는 것이옵니당. 단톡방에 미리 공지를 올렸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 불교 철학 7회차, 8월 24일 공지 사항 ***
1. 아비달마 구사론 1014-1053쪽을 읽어 옵니다. 공통과제는 따로 없고요, 4제 16행상에 대한 질문을 한 가지씩 올립니다. 질문은 제가 취합하겠습니다.
2. 서양철학은 쉬어가고, 구사론 수업만 10시-12시 진행합니다. 줌으로 참여하시는 샘들께오선 오전 10시에 접속하시면 됩니다.
3. 청도로 내려오시는 분들께오선 봇짐 안에 구사론을 챙겨오셔야 하옵니다.
4. 운문사 현장학습 (^^) 후기는 윤순샘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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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수업은 이미 가물가물하지만 에피쿠로스와 구사론에서 꼭 기억하고 싶은 내용 한 가지씩만 복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왜 철학을 해야 하는가, 철학이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평정을 누리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불안으로부터의 해방,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불안과 두려움은 인간이 피하고자 하는 괴로움이니 불교의 테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다름 아닌 고로부터의 해방! 인간에게 철학함이란 고통에서 해방되어 행복과 평정을 얻고자 하는 대원칙에서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불교 철학은 고통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고요. 괴로움의 종류를 일일이 나누어 설명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저희가 구사론 시간에 커버를 했습죠.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이 잘못된 표상에서 비롯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의 원인을 알고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여 자연학(phusiologia)을 공부한다는 것은 자기 실천을 위해 철학적으로 의미있는 자연에 대한 앎이 됩니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주체로 변형시키는 한에서의 자연에 대한 앎이자, 영혼의 전투와 승리를 위해 필요한 장비를 마련하는 실천적 앎입니다.
이런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진리의 네 가지 규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진리를 판단하는 출발점인 감각입니다. 감각이란 인간의 신체 구성요소가 외부 대상과 부딪치고 마주칠 때 일어나는 것으로 차갑다거나 뜨겁다거나 하는 의식적 차원의 감각뿐 아니라 무의식적 차원에서 감지하는 것도 모두 포함됩니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이 감각을 각각의 상황에서 ‘참’으로 인정한다는 점이 중요하죠. 멀리서 세모로 보이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니 네모로 보인다고 해도 두 가지 감각은 각각의 시점에서 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규준은 감각에 동반되는 감정, 즉 쾌와 불쾌의 느낌(phatos)입니다. 앞서 얘기한 감각 자체에는 선악이 없지만 감각에 감정(파토스)이 감각에 덧붙여지는 순간 옳고 나쁨의 선악이 생깁니다.
세 번째는 선(先)개념으로 번역되는 프롤렙시스(prolepsis)입니다. 반복되어 축적된 감각을 통해 획득된 일반화된 개념, 정의입니다. 가령 ‘커피란 쓴 거야’라는 판단이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어떤 날엔 단맛이, 어떤 날엔 신맛이 감도는 커피를 쓴맛으로 정의내리면 커피는 써야 한다는 생각(이성)이 자리 잡습니다. 이성은 감각적으로 실재하는 것에다 특정 견해를 덧붙임으로써 좋고 싫은 정념을 투사하게 되고요. 마지막으로 미세한 것(신, 원자...)에 대한 직접적 사유가 있습니다. 사유의 직접적 이해는 신(神)처럼 감각이 수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 형상을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렇게 진리를 규준을 말하는 이유는 잘못된 표상으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철학함의 목적이 바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감각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 어떤 방식으로 표상이 만들어지고 여기에 정념을 덧붙여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지를 분석해보려 했던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감각 접촉으로부터 느낌이 생겨나고 이 느낌에서 쾌/불쾌의 분별이 일어나 집착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죠. 인간이 매순간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경험하고 있는 신체로부터, 이 신체라는 물리적 조건이자 한계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의 주장은 일면 불교와도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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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무엇이 괴로운 것인지를 정의해야 하죠. 불교는 괴로움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몸과 마음의 괴로움 자체인 고고(苦苦)로 드러나는 현상이 괴로움이라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괴로움입니다. 이런 종류의 괴로움은 인간만이 아니라 작은 벌레나 짐승이라도 추구하지 않는 명백한 고통입니다.
괴고(壞苦)라고 불리는 두 번째 괴로움은 처음에는 좀 의아하게 여겨지는 건데요. 불교에서는 괴로움이라고 정의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쾌락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죠.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현재 즐겁고 짜릿한 느낌이 있는데 이게 당장은 달콤하지만 이 쾌가 사라지고 나면 아쉬워지니 괴로움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낙수(樂受)와 희수(喜受)는 본질적으로 낙과 희로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뿐, 결국 변함으로 인해서 괴로움의 갈증을 크게 만듭니다. 괴고는 괴로움이 틀림없는데도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저희가 반드시 숙고해야 할 지점이죠.
마지막으로 무상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행고(行苦)가 있습니다. 이때 행(行)은 제행무상(諸行無常)에서의 행으로 생주멸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생주멸 자체는 자연의 법칙이므로 그것에 일희일비할 바는 아닙니다. 문제는 제행(諸行)이 우리의 의지와 욕망대로 생주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항상하지 않고 매순간 변화하는데 우리가 결코 컨트롤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행고를 똑 부러지게 이해하는 게 어렵습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다행이다 싶은 것도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감정이 무상하지 않다면 감정에 익사해 죽어버릴 것이니 무상해서 다행이지 않은지. 무상 덕분에 무지한 중생인 저희들도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