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에서 규문 불교 수업이 있었습니다. 청도 호거산 운문사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절입니다. 불교 수업에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효암스님께서 공부하시고 출가하신 절이기도 하지요. 운문사에 대한 저의 전체적 인상은 산세가 좋은 곳에 있는 큰 사찰이라는 면에서 다른 유명한 절과 다를 게 없지만, 그곳에 어우러져 있는 나무, 건물, 잔디, 조형물, 탱화 등의 모든 것들에서 운문사에 있었거나 있는 스님들과 신도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절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효암스님과 함께 방문한 덕에 혼자 갔으면 보이지 않았을 정성들이 보여서 이런 인상을 받았겠지요. 불교에 문외한인 저 같은 사람은 예불도 직접 드릴 수 있어서 이번 불교 수업이 몸에도 강렬하게 남았습니다. 공부하러 규문에 다녔는데 이런 체험도 하고, 참! 사람 일이란 한 치 앞을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주 운문사 불교 수업에 참여하는 1박 2일 일정에서 저의 기억에 남는 일들과 『구사론』 분별현성품 2차시 수업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나무와 풀 안으로 쑥~
각자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만나 렌트카로 이동해서 운문사에 도착했습니다. 윤지샘과 기웅샘이 렌트카를 운전해주셔서 편히 이동했습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윤지샘께서 미리 공지해주신 일정표에서 보아 알고는 있었지만, 도착하자마자 운문사에 딸린 사리암까지 1시간 정도 급경사를 걸어가다가 숨이 넘어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무릎이 아프신 분들이 있어서 걱정도 있었지만 여럿이 가는 힘으로 사리암까지 빠르고 안전하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사리암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땀에 젖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과 달아오른 얼굴이 쉽게 진정되지 않을 강도의 산행이었습니다. 4시에 저녁 공양하고, 6시부터 8시까지 저녁 예불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법당에서 앉았다 일어섰다 절을 하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염불을 따라 하는데 목소리도 갈라졌습니다. 평소에 얼마나 움직이지 않았는지.^^ 몸과 마음을 다르게 써야 하는 장에서 힘들면서도 신선한 느낌도 들어 좋았습니다. 저녁 예불에서 기억나는 건 나반존자를 30분 정도 쉬지 않고 불렀던 염불입니다. 나반존자는 오랫동안 저의 머리에 남아계실 것 같습니다. 사리암은 나반존자께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는 암자였습니다. 나반존자님은 다른 어떤 존자님들 보다 중생의 소원을 잘 들어주시는 존자님이 아니었을까요?(제가 잘 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염불하시는 스님께서 신도들의 각종 바램을 하나하나 불러주시면서 함께 기도해 주시는 시간이 적응하기 어려우면서도 소원들이 어찌 그렇게 종류가 유사한지(건강, 돈, 각종 시험합격, 승진)를 새삼 알게 되는 장이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 강렬한 기억은 20명 넘게 한 방에서 모기와 함께 한 잠자기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서로 잘 잤냐는 인사를 나누는데 조금이라도 잤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지요. 학생 때 엠티 이후로 여럿이 한방에서 잔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으셨겠지요. 이러한 불편함을 불평하지 않고 잘 넘어간 저와 다른 선생님들 칭찬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겪게 된 일이 많네요. 그동안 얼마나 편한 환경에서 살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편한 환경에 있었지만 눈 아래로 펼쳐진 산과 어우러진 운무와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의 운치를 마음껏 음미했기에 몸과 마음이 금새 회복되는 것 같았어요. 사리암의 기도발이 좋다는 소문이 있어서 규문 불교팀 말고 기도하러 오신 다른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튿날 새벽 3시부터 시작하는 예불을 위해 2시 반에 일어나서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라는 혼자말을 하며 법당으로 향했습니다. 우리팀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새벽 예불에 백퍼센트 참석했습니다. 새벽 3시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종교(신심)의 힘일까요? 저는 처음 겪는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이제 운문사로 다시 내려와서 하는 수업이 남았습니다. 세차게 비가 내려 경사가 심한 길을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는데, 어느새 비가 잦아들어 예정된 일정대로 우비와 우산을 쓰고 천천히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운문사는 건물들, 조형물, 탱화, 정원 등은 보존 관리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여행지로라도 한 번 방문하기를 추천합니다.
우리는 효암스님께서 보여 주시고 싶은 운문사의 곳곳을 세밀한 설명과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운문사는 불심이 저절로 일어나는 곳임이 확실한데 제가 전달이 미흡합니다. 사진으로 운문사 포행의 분위기를 대신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제 운문사 차실에서의 수업을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4제 16행상
『아비달마구사론』 23권 현성품 두 번째 강의입니다. 스님은 우리를 4제 16행상으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4제 16행상을 관찰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왜 4제 16행상을 반드시 알아야 할까요? 이 앎은 어디에서 그 힘을 발휘할까요? 구사론 23권을 읽는 중 든 저의 의문들이었습니다. 이 질문들이 이 후기를 다 쓰고나서 풀리는 것을 목표로 강의를 복기해 보겠습니다.
4제는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고성제를 일컫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제이기에 고의 진리, 집의 진리, 멸의 진리, 도의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각 성제의 진리의 상이 16행상입니다. 각각의 성제에 4가지 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총 16행상이 되지요. 고제는 우리가 인지하는 어떤 결과입니다. 우리는 원인보다 결과를 먼저 감각하거나 인식합니다. 생겨나는 순서로 보자면, 이 결과를 낳은 원인이 먼저 있겠지만 우리(유정)의 근과 식은 항상 결과부터 인지하는 조건에 있지요. 그래서 순서상으로는 어떤 원인이 앞서고 결과가 따라 오는 게 맞겠지만, 부처님께서는 4제에서 고제의 원리부터 설명하셨습니다. 이 진리가 그것을 알고자 하는 인간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성제의 4가지 상은 무엇일까요? ‘비상, 고, 공, 비아’입니다. 스님의 설명에 따르자면 고성제의 4행상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상, 낙, 아, 정’에 상대적으로 상이 아닌 비상, 낙이 아닌 고, 아가 아닌 비아, 정이 아닌 공이 고제의 진리의 상입니다. 유부에서의 비상과 비아는 무상과 무아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부까지는 ‘무’의 개념을 확실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량부 부터 이 두 가지(비, 무)는 차이가 확실하여 구분해서 설명됩니다. ‘비와 무를 어떻게 보는가’는 유부와 경량부에서 인식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고, 세상을 인식 중심으로 설명하는 유식에서 설명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효암스님 유식 강의에서 다뤄질 예정입니다.
고제의 첫 번째 진리의 相은 왜 상(常)이 아닌 비상(比常)일까요? 비상은 경전의 ‘제행무상’에서 증명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루의 행을 고제라고 이름하고, 모든 행은 생주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좋아하는 결과가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고제에서 그 어떤 것이라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게 진리라고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상이 아닌 비상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과 반대편에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게 되면, 4선근의 난위에 이르러 4제를 본격적으로 관찰합니다. 난위 전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떤 결과가 영원해 보이는 것을 진리라 여기게 됩니다. 고제의 두 번째 진리의 상은 낙이 아닌 고입니다. ‘일체개고’입니다. 저번 시간에 ‘고’에 대해 나눈 부분을 참조하면 고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정이 아닌 공입니다. ‘색즉시공’입니다. 우리는 ‘정(淨)’을 추구합니다. 깨끗함을 추구하는데, 몸이나 옷에 더러운 것이 묻으면 씻거나 빨아서 깨끗이 만들고자 하는 게 우리가 자연스럽게 원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구성하는 전제는 우리 몸은 깨끗하고, 더러움은 외부에 있어서 씻으면 된다는 착각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본래 깨끗하다고도 더럽다고도 말해질 수 없습니다. 또한 외부의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은 깨끗하고 먼지는 더러워서 내가 먼지를 없애는 방향으로 하는 행은 항상 괴로움을 불러옵니다. 나와 분리되어 깨끗하거나 더럽거나 한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는 말입니다. 깨끗하거나 더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본래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실체성은 없는 것이므로 ‘공’입니다. 네 번째는 아가 아닌 비아입니다. ‘제법무아’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재천과 같은 상일주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비와 무의 차이를 고려하면서 비아를 관찰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아’입니다.
고성제의 4행상만 해도 분량이 넘쳐서 집성제부터는 간단히 각 성제의 4상을 『구사론』에서 인용합니다. ‘집성제를 관찰하여 4상을 닦으니, 첫째는 인(因)이며, 둘째는 집(集)이며, 셋째는 생(生)이며, 넷째는 연(緣)이다. 멸성제를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멸(滅)이며, 둘째는 정(靜)이며, 셋째는 묘(妙)이며, 넷째는 리(離)이다. 그리고 도성제를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도(道)이며, 둘째는 여(如)이며, 셋째는 행(行)이며, 넷째는 출(出)이다.’(『아비달마구사론』 1039쪽) 나머지 3가지 성제에 대해서는 효암스님 강의에서 자세한 설명을 참조하세요.
마지막으로 앞에서 제기한 저의 질문 ‘4제 16행상을 관찰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왜 4제 16행상을 반드시 알아야 할까요? 이 앎이 어디에서 그 힘을 발휘할까요?’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겠습니다. 불교에서 수행은 빠질 수 없는 필수 항목입니다. 그런데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구사론 현성품에서는 불교 수행 전반과 그 절차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수행하고 싶다고 마음먹으면 갑자기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집중하고 앉아 명상하거나 경전을 공부하거나 법당에서 절을 하거나 염불을 하는 것이 수행일까요? 어느 수행 방편도 유정(나)의 심신과 분리되어 진행될 수는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 명상한다고 앉아있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몸이 긴 시간 앉아있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앉아서 하는 명상을 하겠다고 마음먹는다고 실행되지 않겠지요.
몸과 마음의 문제에서 수행을 시작하겠지만 몸과 마음의 문제를 먼저 관찰해야 수행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어려운 지점인 것 같습니다. ‘지관쌍수’, 수행에는 止와 觀의 행이 쌍으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 현성품 두 번째 시간에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수행을 하는 데는 먼저 止가 필요합니다. 마음을 담고 있는 몸의 청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계를 지키고, 소욕지족 하는 마음이 수행의 기본입니다. 유부에서는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면 먼저 부정관(해골을 상상)과 지식념(호흡을 세는 것에 집중)을 통해 止를 성취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 수, 심, 법을 관찰(觀)하는 4념주를 먼저 닦아야 4선근의 난위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앞의 것은 자량도(순해탈분)라 하고, 4선근 부터가 가행도(순결택분)입니다. 4제 16행상을 본격적으로 관찰하여 닦는 단계는 4선근의 난위입니다. 이 순서대로면 선행된 수행이 없으면, 4제 16행상 관찰은 어렵습니다. 4제 16행상을 제가 끌리는 대로 착각해서 확증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이 진리이다’라는 것을 우리는 공부하고 있지만 그것을 관찰하여 닦는 행을 수반하지 않으면, 알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의 질문은 4제 16행상을 배우면 쉽게 관찰하고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그것을 닦고 난 후의 이득까지 궁금해하는 저의 탐심에서 나오는 조급함을 담고 있었습니다. 4제 16행상은 알아야 하는 지식이 아니라 견도와 수도에서 실제로 번뇌가 끊어지는 과정을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탐심과 조급한 마음에서 나온 질문은 남을 해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을 닦달하게 만들 수는 있어서 순기능만 하는 건 아니지만, 불교 수행에 필요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끝으로 효암스님께서는 유부에서 깨달음의 길은 탐심으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앞의 스님 말씀이 수행 초기에는 깨달음의 길로 가고 싶은 탐심의 작용이 큰 힘이 된다는 맥락으로 남았습니다.
윤순샘 말씀대로 "여럿이 가는 힘으로" 가파른 산도 오르고 큰 방에서 합숙하고 깜깜한 새벽에 벌떡 일어나 예불도 하는 것이 가능했던것 같아요~
윤순샘께선 시종일관 여유로워 보이셨는데 처음 겪으며 어안이 벙벙하신 순간도 있으셨군여! ㅎ 암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사리암-운문사 방문이었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