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기 지나갑니다. 한여름 무더운 폭염과 거친 폭우를 겪고, 물러간줄 알았던 코로나로 몇몇 도반들은 몸져 누우셨다가, 운문사도 다녀오고 어찌어찌 3학기를 무사히 넘기는 기분입니다. 마지막 에세이만 코 앞이네요. 샘께선 추석 뒤로 에세이 일정을 늦출까 고민 하셨다지만 일정대로 밀고 가는 것으로! 3학기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다들 에세이를 어찌할까 하는 한숨과 탄식을 쏟아내셨지만, 뭐 저희가 이런 적이 한 두 번도 아니고 말입니다.... ^^;;
수업 시간에 채운샘께선 자신의 번뇌가 무엇인지를 회피하지 말고 봐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죠. 번뇌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문제의 주변에 머물러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할 수만 있어도 문제의 2/3는 풀린 것이라고 한답니다. 내게 번민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을 똑바로 짚어내는 것을 이번 에세이의 기본 목표로 go go (苦苦)~~!
*** 9월 7일 수요일, 3학기 에세이 공지입니다. ***
1. 에세이 주제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번뇌(수면)를 3학기 동안 구사론에서 배운 내용에 비추어 분석하고 성찰하기 입니다. 분량은 3쪽입니다.
2. 에세이 발표는 10시에 시작합니다.
3. 간식은 각자 조금씩, 후기는 호정샘 (만약 호정샘이 못나오시면 현화샘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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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마무리하기는 아쉬우니 수업 중에 공부한 내용 중 한 두 가지만 짚어 보겠습니다. 자세한 후기는 경아샘께서 곧 올려주실 겁니다.
욕망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추위와 더위를 피하는 것과 같은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인간의 직접적 생존과 관련된 욕망이라고 볼 수있죠. 둘째 성욕처럼 자연적이긴 하지만 필연적이지는 않은 욕망이 있습니다. 성욕을 채우지 못해도 살아갈 수는 있으니까요. 문제는 세 번째 자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은 욕망입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이 욕망은 헛된 의견에서 생겨나는 욕망이라고 해요. 저는 헛된 의견이라는 표현이 와닿았는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 세 번째 욕망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욕망은 끝이 없다는 우리 시대의 믿음도 헛된 의견 중 하나가 아닐까요. 살아가는데 필요한 욕망은 제한적인데 말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살펴보면 뭔가를 욕망하는데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것을 느낍니다. 생존이나 삶의 유지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지만, 어떤 것에 욕망이 생겨난다는 것은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끊임없이 신경을 쓰고, 뭔가 계속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쾌락을 따라 뭔가를 욕망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게도 느껴지네요. ㅎ 아무튼 어떤 것을 욕망하고 그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기쁨을 주느냐 하면...? 바로 요 지점이 질문을 던져볼 부분인 듯 합니다.
에피쿠로스가 시종일관 말하는 쾌락은 결여된 욕망을 충족하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의 충만함, 영혼의 지복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지혜로 충만하여 존재자체가 지복인 자는 신(神)이라고 하고요. 하여 에피쿠로스의 제자들은 놀랍게도 그들의 스승인 에피쿠로스를 신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전지전능한, 이 세계 밖의 신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서 스스로 지극한 만족에 이름으로써 신이 된 자인 것이죠.
몇 시간에 걸쳐서 공부한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이 던지는 화두가 많습니다. 제게는 에피쿠로스가 축복으로 여긴 ‘자족’이 그렇고, 지혜로운 자가 행복을 위해 얻고자 하는 ‘우정’이 그렇습니다. 남겨진 많지 않은 어록과 문헌 속에서 채운샘이 나누어주신 보석같은 지혜들이 많이 있죠. 에피쿠로스의 <쾌락>을 꼭 정독해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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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불교 수업에서 서유기와 유식불교를 함께 공부했었는데 지난 시간 효암스님 수업에서 다시 유식을 만났습니다. 뭔가 익숙한 용어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다시 개념을 하나 하나 정리하자니 역시나 어렵네요. ^^;;
유식 불교에도 여러 학파가 있다고 하는데 현장법사가 인도의 나란다를 방문했을 때 잠시 반짝 유행했던 유식 학파가 제8식을 주장한, 그러니까 함장식과 구경삼승을 승인하는 ‘말씀을 따르는 유식학파’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때 현장 스님의 역경 작업으로 저희 나라에 들어와서 퍼진 유식불교도 이 학파의 내용이고요. 그런데 통상 유식의 주류는 말씀이 아닌 ‘논리를 뒤따르는 유식학파’라고 하고 ‘진상 유식학파’와 ‘허상 유식학파’로 나누어 보기도 한답니다. 진상 유식학파는 이후 중관의 자립 논증학파로, 허상 유식학파는 이후 중관의 귀류 논증학파와 연결이 된다고 해요.
유식에서는 기본적으로 속제와 진제를 나누는데 속제에 해당하는 것이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이고 진제 해당하는 것이 원성실성입니다. 진제가 깨달은 성인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번뇌장과 소지장에서 벗어나 바른 인식에 의해 획득된 것이라면, 속제는 언어적으로 가설된, 범부의 눈에 보이는 진리를 말합니다. 속제는 다시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으로 나뉘는데 변계소집성은 그야말로 기억의 데이터베이스로 판별하는 분별식을 말합니다. 소위 있는 그대로 보는 것과 반대의 분별을 말하죠. 저는 범부가 보통 일으키는 산만하고 왜곡된 생각이 모두 변계소집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는데 변계소집에는 논리로 유추하는 차별변계도 포함된다는 점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가령 ‘무위, 허공’과 같은 개념은 오직 논리적 추론으로서만 사유할 수 있는데 이런 사유도 변계소집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말 그대로 인과 연에 의지해 발생한 것을 말합니다. 저는 늘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이 비슷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헷갈린다고 생각했는데 저희가 읽은 텍스트에서 의타기성이 원성실성의 토대가 된다는 설명이 있어서 좀 이해가 되었습니다. 어떤 존재도 그 자체로 혹은 우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은 불교의 기본 가르침인데 이게 의타기성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타기성의 분별로부터 자아와 세계에 대한 집착이 제거된 완전한 존재 형태가 원성실성의 토대이기 때문에 의타기성을 원성실성의 토대 (<티베트에서의 불교철학 입문> 374쪽 참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일체유부-경량부-유식-중관으로 이어지는 불교 철학의 큰 흐름들을 스님께서 매 학기마다 하나씩 짚어주고 계시는데, 다음 학기면 마지막으로 중관 사상을 보게 되겠네요. 불교 철학이 퉁쳐서 다 같은 것이 아니라, 각각 어떤 사상적 맥락과 논리를 지니고 있는지 대충 파악할 수만 있어도 저는 감사할것 같습니다. 문득 불교 철학의 큰 스승들께서 중생들을 그 시대에 맞는 언어로 깨우쳐주기 위해 고심하시며 얼마나 큰 자비심을 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다들 지금쯤 구사론을 뒤적이며 에세이를 고민하고 계실텐데.... 혹여라도 에세이를 포기하는 에포자의 변계소집을 경계하며 마지막까지 모두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