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 3학기 8주차 수업후기
<서양철학: 에피쿠로스의 윤리학>
에피쿠로스의 생애, 자연학, 인식론을 거쳐 윤리학까지 4주에 걸친 에피쿠로스와의 만남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가 쓴 <쾌락>이라는 책 이외에는 직접 쓴 내용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합니다. 오히려 에피쿠로스를 비판하기 위해 깊이 파고들었던 스토아학자들이나 회의주의자들이 남긴 글을 통해 에피쿠로스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의 저술이 전해지지 않은 이유로는 그들이 폐쇄적인 공동체를 운용하기도 했지만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시대의 철학을 스토아학파가 주도하면서 에피쿠로스 학맥이 끊어진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 삶의 지평 외의 초월적인 것을 배제한 에피쿠로스 철학이 중세에 살아남기는 힘들었겠죠.
지난 시간 마치지 못한 에피쿠로스의 인식론을 좀 더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의 진리 판단의 출발점은 감각입니다. 네모가 멀리서는 원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렇게 보이는 감각 자체는 오류가 아니라 실재적(real)입니다. 모든 대상의 표면에서 떨어져 나오는 얇은 막인 에이돌라(eidola)가 감각기관과 부딪쳐 감각이 발생한다고 봤습니다. 에이돌라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원자가 마모되어 멀리서는 원으로 보이게 된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고 재미있습니다. 실재하는 대상인 에이돌라에 의해 야기되는 감각표상(phantasia)은 영원불변하거나 실체는 아니지만, 실재적이며 참이라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네모인 것도, 멀리서는 원으로 보이는 감각표상도 모두 환영으로서 판타지아지만 둘 모두 실재적 대상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참이라는 거죠. 우리는 이런 경우 가까이 다가가서 네모인 것을 알게 되면 원으로 보였던 것은 오류라고 판단 내립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멀리서 원처럼 보였더라도 그 감각표상 자체는 오류가 아니고 그걸 원이라고 생각하는 감각을 의식화하는 지각이 오류였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차이냐고요? 인간의 시각 조건상 어느 정도 거리라면 두리뭉실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건 우리의 조건을 변수로 다 넣으면 도출되는 당연한 결과라는 겁니다. 자연법칙 같은 거죠. 그런데 그 조건들을 무시하고 언제나 무조건 자기가 본 그대로가 참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독사(doxa)를 견지할 때 오류에 빠집니다. 스피노자도 태양이 동전만해보이고, 물속에서 젓가락이 휘어져 보이는 사실은 우리가 원근법이라든지, 반사굴절을 알게 되더라도 그렇게 보이는 현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단지, 감각표상의 발생 원인을 제대로 알게 됨으로 보이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라는 독사를 벗어나 헛된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감각할 수 있는 것 외에 허공, 신과 같은 비감각적인 것도 감각자료에 입각하여 추론이라는 사유과정을 통해 입증할 수 있습니다. 허공이 없다면 운동도 불가능한데, 운동이 있다는 감각은 경험적으로 입증되므로 허공도 있다고 입증됩니다.
에피쿠로스의 인식론에서 중요한 先개념(prolepsis) 프롤렙시스는 “축적된 감각을 통해 획득된 일반개념”입니다. 대부분은 감각경험으로 형성된 것이고 신의 존재, 정의(正義)와 같은 개념은 지성적 파악을 통해 생겨납니다. 플라톤의 본유관념이 초월자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심어놓은 ‘참·거짓’의 판단기준들이라면 프롤렙시스는 경험을 통한 사유활동으로 도출되고 구성되는 ‘참·거짓’입니다. 진리나 그것의 기준들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활동으로부터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점 또한 스피노자를 연상시킵니다. 진리는 구성되는 것이지 초월자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내재성의 관점 말입니다.
이런 인식론적 관점으로부터 도출되는 윤리의 기준은 ‘쾌’, 욕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이 주어져 있지 않은데 그럼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선택하고 거절하는가? “선택과 거절이라는 모든 행위의 원인을 추적해서 마음의 혼란을 최고로 불러일으키는 의견을 제거”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삶이 괴로운 것은 결여 때문이 아니라 욕심과 두려움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 욕심과 두려움의 ‘발생적 원인’을 사유하여 신체 안의 고통과 마음의 동요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이죠. 그래서 이들의 철학은 몸과 마음의 건강함이라는 양생의 문제이자 동시에 ‘누구와 함께 나눌 것인가’라는 우정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누구나 욕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죠. 문제는 ‘어떻게’입니다. 일단 어디서 벗어나야할지 지금 내 욕심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 때문에 동요하는지 봐야겠죠. 승진, 합격, 안정된 생활, 부, 명예, 장수 등등. 정말 등등등 입니다. 에피쿠로스에게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욕망은 ‘신체적 고통의 부재를 위한 것과 생명 자체를 위한 것, 행복을 위한 것들’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자연적이지만 필연적이지 않은 성욕과, 세 번째 자연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은 야망·지배욕·명예욕·부·불사에 대한 욕망으로 나눕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욕망은 제한적인데 반해 세 번째 종류의 욕망은 무제한적입니다. 왜냐면 세 번째 욕망은 자연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생명을 소진하면서까지 추구하는 세 번째 범주의 욕망들은 꼭 필요하지도 자연적이지도 않다는 말입니다. 자연적이라는 말은 생멸하는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 욕망들이 자연적이지 않다는 말은 자연법칙에 근거하지 않은, 다시 말하면 실재적이지 않은 ‘허상’에 근거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러니 하게도 무제한적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마르크스가 생각났습니다. 마르크스는 물질 자체에 대한 욕망은 제한적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빵을 많이 탐한들, 신발과 보석을 탐한들 빵을 무한히 먹을 수 없고 죽기 전에 신어볼 수 있는 신발은 유한하고 달아볼 수 있는 보석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화폐에 대한 욕망은 무한으로 펼칠 수 있습니다. 돈에 대한 욕망이라도, 화폐라는 물질 자체를 탐하는 스크루지와 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결이 아주 다릅니다. 이 ‘부’ 자체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어 보이긴 합니다. 남들보다 더 가졌음에도 지금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해소될 것 같은 이 욕망은 마실수록 목이 마르는 ‘갈애’와 같습니다. 끝없어 보이는 이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자연적이지 않은 허상입니다. 생멸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상을 무한히 추구한들 허상입니다. 욕망이 무한해 보이는 것은 그 욕망이 자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르크스가 박사논문으로 택한 에피쿠로스가 <자본>으로 이렇게 연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에피쿠로스로 돌아오면, 그러니 허상으로서 욕망을 추구한들 오히려 점점 더 고통스러워질 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고통은 결여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는 것들을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쾌락 가운데 어떤 것이 스스로에게 이로운지 헤아려낼 수 있는 지혜를 통해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타락시아는 몸과 마음이 탕진되는 쾌락도 욕망을 찍어 누르는 금욕도 아닙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지혜와 실험으로 스스로의 쾌를 찾아내야하는 삶의 연마를 필요로 합니다. 이들의 쾌락은 안빈낙도의 낙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외부조건에 의지 않는 자득·자족입니다.
“죽음은 여러 가지 재액 가운데서도 가장 두려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로 우리가 살아서 존재하고 있을 때는 죽음은 거기 없고, 죽음이 실제로 우리에게 닥쳤을 때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죽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 문장이 너무나 명료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도 죽음이 두려운 이유를 나열해 본적이 있습니다. 죽는 순간의 신체적 고통, 남는 사람들과의 이별이라는 슬픔, 미지의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이라는 이미지와 엉켜있었습니다. 신체적 고통이야 죽기 전에도 다른 사건으로 이미 경험할 수도 있으니 딱히 죽음과만 연결된 것도 아니고, 남은 사람들에 대한 걱정도 그야말로 나 죽으면 내가 없는데 그때 슬픔은 실은 죽음을 상상하며 지금 느끼는 슬픔이더라고요. 그리고 죽음이라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도 지금 실재적이지 않은 허상을 대상으로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어차피 자기 죽음은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인데 두려워한들 해결할 수 없다는 거죠. 거기서 막히면서 ‘왜 죽음이 두렵지?’라는 처음 자리로 돌아가 보니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실은 이 삶이 유지 될 수 없음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걱정과 두려움의 99프로는 지금 것을 지키려는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무상이 아닌 허상을 쫓기에 괴롭다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통하는 지점이죠.
<불교철학: 유식학파 종의宗義>
1.다른 종파와의 차이
매학기 마지막 강의 시간에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 중관학파의 종의를 하나씩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식학파입니다. 몇 년 전에 저희끼리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이 책 저 책 옮겨 타며 유식을 어렵지만 나름 재미있게 공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유식은 오로지 식으로만 생주멸 한다는 의미입니다. 대상의 인식측면에서 유부나 경량부는 식 바깥에 있는 경계인 심외경을 인정합니다. 유부는 항아리라는 대상과 근이 따로 있다가 만남이라는 조건으로부터 안근이 대상을 보고, 식이 그것을 ‘항아리’라고 이름붙이며 인식합니다. 경량부는 대상이 자신의 힘으로 거울처럼 ‘비추는 자상自相’과 식이 경계를 ‘잡는 상相’ 두 가지 상이 있습니다. 심왕으로서의 식은 잡거나 비추는 작용을 합니다. 심왕이 대상을 낮비춤(형태, 색 등을)하여 있는 그대로 대충 어림짐작해서 파악하면 심소 각각이 작용하여 등무간연을 통해 저장된 기억을 끌어와서 이것이 ‘좋은 항아리구나’라고 차별해서 판단합니다. 식이 대상이 있다는 것을 인증하지 대상 자체로 있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경량부에서 인식의 직접적 대상은 식에 잡힌 상인거죠. 인식하는 찰나 대상은 이미 그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부나 경량부는 인식방식에 차이는 있으나 둘 다 외경의 실재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유식학파에게 대상, 외경, 비추는 자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식만 진실로써 존재한다고 승인합니다. 대상의 경계인 대경은 식 안에 있습니다. ‘그럼 지금 이 노트북은 어떻게 드러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불쑥 올라옵니다. 노트북이 자기 힘으로 비추는 자상은 없습니다. 식에 저장된 자료를 이용하여 심소들이 네모지고 자판이 새겨진 낯비춤으로 두루 살펴서 ‘노트북’이라는 판단을 내리면 오변행의 심소들이 인기되어 우리는 ‘노트북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세세생생 이어져 내려오며 쌓인 식의 내부 데이터를 이용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홀로그램에 비추는 것일 뿐이라는 거죠. 우리가 대상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식의 작용일 뿐 대상이 뒤돌아섰을 때조차도 거기 있다는 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노트북 ‘그 자체로 있음’이라면 누구나 노트북이라고 생각해야하지만 노트북을 모르는 사람은 쇳덩이로, 어떤 사람은 책으로 각자의 저장고의 자료에 따라 다른 것으로 인식하는 것만 보아도 외경이 자재하지 않다는 겁니다. 자기 힘으로 비추는 자상이 있으면 즉 그게 진짜라면 모두에게 똑같이 보여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인연에 따라 오로지 식이 만들어낸 홀로그램, 착시를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유식학파는 논리가 먼저 생긴 것이 아니라, 요가수행자들이 깊은 명상을 통해 몸으로 체득한 실상을 설명하기 위해 논리가 뒤따라 설립되었다 합니다. 그러니 체득은커녕 비스무리한 경험도 못한 저 같은 실체주의자는 참 납득이 힘든 방식이기는 합니다.
2.진제·속제와 3성
이제껏 유부나 경량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였기에 진짜인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나 유식에서 외경을 부정하기에 그럼 진짜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3성이 필요합니다. “일체의 유위법은 의타기依他起-다른 것(즉 인연)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이고, 일체 제법의 본성은 원성실圓成實-그 자체 원만(완전)하게 성취된 것이며, [주객 등의] 그 밖의 모든 법은 변계소집遍計所執-분별에 의해 가설된 것”(『티베트에서의 불교철학 입문』, 368쪽)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는 인과 연으로부터 드러나는 의타기성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원래부터 자성을 가진 대상으로 착각하며 대상을 잡은 분별식의 힘대로 작동하는 것이 변계소집입니다. 중생들의 경우 오근식에 의지하지 않고 제6식으로만 사량한 것들은 모두 분별식입니다. 이렇게 식이 주도적으로 대경을 잡아도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장애가 바르게 되지 못하는 의타기와 변계소집을 속제라 합니다.
이에 반해 ‘잡는 방식의 대경으로 해서 닦으면 두 장애 중 어는 것이 바르게 되는 법’이 진제이며 원성실성입니다. 진제·속제 개념은 종파마다 다릅니다. 유부는 물리적으로 또는 사유로써 잘게 부수었을 때 아무것도 안 남으면 속제이고, 그대로 남으면 진제입니다. 경량부에서는 오근식으로 헤아릴 수 있으면 진제이고 제6식으로만 헤아려지는 것이 속제입니다. 유식에서 갑자기 진제·속제가 뒤바뀌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진제가 의식의 수준으로 옮겨가니까요. 번뇌장과 소지장을 벗어난 人無我와 法無我는 오근식으로는 절대로 헤아릴 수 없고 논리로서 터득할 수 있는 진제입니다.
유식에서 人無我는 사람 그 자체를 거칠게 인식하는 낯비춤을 할 때 무더기(온)를 낯비춤하지 않고서는 자재로써 성립함이 없는 것입니다. 문장이 어렵지만 스님께서 부러 의미전달을 정확히 하시려 번역하신 것이라 그대로 옮겨봤습니다. 오온을 의지해서만 무언가를 정의할 수 있다는 말로 풀이됩니다. 자상으로 비춰진 상이라면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일 테니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 비춰진 상을 각자의 식으로 잡아서 설명해야합니다. 이 사실이 자재로서 무언가가 그 자체로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유부의 인무아는 오온의 모임일 뿐이고 경량부의 경우 오온의 모임에 이름 붙여진 존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유식학파에서는 ‘나’라는 것은 온에 의지하지 않고 식만으로 자재하기 때문에 기억으로 인해 비춰진 영상일 뿐이라고 오롯한 ‘나’는 없다는 방식으로 인무아를 설명합니다. 법무아는 ‘법들이 소리와 분별식이 들어가는 바탕으로서 자기의 성상으로써 성립됨이 공함’을 말합니다. ‘자기의 성상’ 즉 자상의 힘으로 어떤 대상이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식에 따라 각자 다르게 보기에 공하다는 것입니다. 색과 색을 잡는 현량 둘이 본래 다름이 없음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유식에서는 오로지 식이기에 식이 대상도 낳는 것이니까 식과 대상이 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걸 이해하는 것이 진제이며 원성실성입니다.
어떤 한 존재가 의타기이도하고 변계소집이기하고 원성실성이기도 하다는 식의 여러 상태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유위법에서 모든 것은 함이 있는 즉 인연에 의지하여 생주멸하는 의타기입니다. 그 의타기의 조건을 보지 못하고 원래 그런 것이라 착각하는 분별식에만 의지할 때 에피쿠로스적으로 말하면 독사doxa에 빠질 때 변계소집하게 되며 그것이 고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유위법이 의타기라는 것을 알고 생멸의 조건을 볼 때 모든 법은 그 자체로 원만한 결과인 인무아와 법무아인 원성실을 ‘見’하게 됩니다.
여기서 속제/진제와 실유/가유는 개념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실유는 자기를 낯비춤에 다른 법의 낯비춤을 의지하지 않고 자재한 것들입니다. 제6식인 의심왕意相識이 실유입니다. 가유는 당연히 다른 법의 낯비춤에 의지하는 것들이겠죠. 인무아에서 설명한 것처럼 무더기 온의 낯비춤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자재로 성립하지 않는 ‘사람’ 같은 것이 말입니다.
3.유식의 인식방법
유식에서는 외경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소연연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근식의 네 가지 인연 중 하나인 소연연을 말씀하셨기에 유식에서는 습기를 소연연이라 합니다. 그래서 현량現量,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 4가지의 인식작용이 있습니다. 현량은 아직 분별식이 달라붙기 전에 잠깐 분별과 떨어진 습기가 발생시키는 인식작용입니다. 근현량, 의현량, 성현량, 자증분 등이 속합니다. 소연연은 파랑이라 잡은 근현량의 相 자국을 등무간연의 相과 비슷한 것에 끼여 맞추는 ‘능력’입니다. 대상이 부정되는 유식에서는 등무간연에 자국을 남기는 ‘능력’을 소연연이라고 설명합니다. 등무간연은 언제나 바로 꺼내 쓸 수 있도록 안테나처럼 대기전력 상태로 있는 마음작용입니다. 근현량이 색을 잡은 자국을 남기는 내색인 안근은 안식의 주인인 증상연입니다. 요즘 뇌과학에서는 자극을 집수하는 신경세포가 증상연인 안근이고 그때 발생하는 전기 자극을 소연연이라고 말하기도 한답니다.
유식의 길을 여신 분은 무착(아상가)이시고 요의경인 해심밀경은 제3법륜 법화경을 주로 삼습니다. 유식도 여러 학파로 나누어지지만, 우리나라의 주류인 ‘말씀을 뒤따르는 유식학파’는 “함장식과 구경삼승을 승인하는 유식학파”입니다. 저는 유식학파는 모두 전8식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듯합니다. 함장식은 아뢰야식, 아타나식이라고도 불리며, “자기의 대경이 비춰지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종자를 훈습하는 바탕의 종류에 속하는 무부무기의 의심리”입니다. 나중에라도 참고하시라고 스님 번역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함장식은 심왕으로서 이숙이고 윤회하는 주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함장에 습기를 저장하는 주체는 안이비설신의의 6식과 제7말나식등 전7식입니다. 함장 자체는 무실無實(무위)이고 실제 1초 뒤에 자기를 인식하는 것을 남기는 주체는 식입니다. 식이 남기는 습기는 네 종류입니다. 이름 붙임으로 제6식을 일으키는 명언습기名言習氣, ‘나’ 여김을 일으키는 아견습기我見習氣, 사람의 나고 죽음을 일으키는 유지습기有支習氣, 함장식을 ‘나’ 또는 ‘나의 것’으로 잡는 마음작용인 동류습기同類習氣 입니다.
점점 뭐가 없어지는 분위기입니다. 실재하는 외경을 본다고 했다가, 외경은 있지만 보는 것은 마음의 상이라고 했다가, 이제 외경 자체는 없고 식만 있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에 유식을 들여다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경량부와 유식학파 간의 차이를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우리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역시 경아샘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군요ㅎㅎ
그 어려운 수업 내용을 조리있게 잘 정리해 주셨네요.
수희찬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