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식’을 주제로 진행된 3학기도 어느 새 마지막 시간이네요! 배울수록 오리무중임을 실감하고 있지만, 재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음 시간(9.13) 공지입니다.
1) 낭송 텍스트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 4부와 부록(162~186쪽)까지 읽고 옵니다.
2) 칼 구스타프 융 강의가 있는 주입니다. 아울러 세미나 텍스트 <의식의 기원>에 대한 질의응답도 있다고 했으니 저희가 배운 것 궁금한 것들을 잘 정리해 보아요.
3) 후기는 이기웅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4) 간식은 김자영 선생님과 정은이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세 가지 열쇠와 세 가지 다리
<달라이 라마, 깨달음을 말하다>에서 달라이 라마는 빠뚤 린뽀체의 시 <핵심을 꿰뚫는 세 개의 열쇠>를 풀어줍니다. 지난 주에 배운 첫 번째 열쇠는 “경이로움, 걸림 없는 꿰뚫음 (...) 법신의 가장 심오한 의식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내려놓아 휴식하고 미세 의식들까지도 단번에 몰아내는 “팓!”의 외침이 필요했습니다. 이번 주에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열쇠를 배웠습니다. 두 번째 열쇠는, “명상을 하는 동안과 명상을 하지 않는 동안이 다르지 않”을 정도의 명상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올라오는 분별 개념들에 일일이 대항하지 않고 놓아두면서 “모든 것이 가장 심오한 의식의 유희일 뿐이”라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세 번째 열쇠는 자기해방입니다. 여기서는 오히려 분별심이 자양분입니다. 분별심에 구애받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어떤 것이 떠오른다 하더라도 벌거벗은 공성의 의식의 영양분”이 됩니다.
“첫 번째 열쇠를 통해서 당신은 가장 심오한 의식의 정체를 파악했고, 두 번째 열쇠를 통해서 명상 속에서 그 의식의 현존을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이 세 번째 열쇠에서 강조하는 것은 분별 개념이 가장 심오한 의식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140쪽)
저희는 이 세 열쇠가 그 이후 시행에서 나오는 “인식의 방식, 명상, 그리고 행이라는 세 다리”와 대응하는 것인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마도 세 번째 열쇠를 행이라고 할 수 있는지가 헷갈리는 지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뒤를 읽어보니, ‘행은 형상이 된다’고 말하며 “어떤 분별 개념이나 대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형상을 쫓아가거나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가장 심오한 의식의 맥락 안에 생생하게 머무를 수 있다. 그리하여 취해야 할 행동과 버려야 할 행동 사이의 구분을 지을 필요가 없게 된다.”(157쪽)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비슷한 느낌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 번째 열쇠에 행의 대표적 요소인 자비심과 이타행이 나와 있지 않기에 좀 헷갈리긴 합니다.
가장 논란이 있었던 것은 ‘인식의 방식’ 그 자체가 ‘모든 현상이 무수히 증식하는 광활한 공간’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152쪽). 이것은 또 ‘이분법적 개념의 증식을 넘어선 불성’, ‘모든 형상들이 평등한 실재 안에서 완벽하다는 앎’ 등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저희가 헷갈린 지점은 ‘방식’이나 ‘방법’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원문으로 이것은 way가 아니라 view라는 것을 확인하자 의문이 좀 해소되는 것 같았습니다. 즉 이것은 일종의 앎이고 관점이지만, 주체/객체 이분법에 기반해서 대상을 보는 그런 공간적 관점이 아니라 그 공간의 흐름이 되는 것이지 않을까. 베르그손의 표현으로는 지속을 직관하는 것이요, 들뢰즈의 표현으로는 기관 없는 몸-되기인 것 같았습니다. 앎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신과 양태의 분화-통합에 가닿는 3종 인식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리되지 않았던 논의는, 이런 가장 심오한 의식의 인식을 우리 자신의 수준과 비교 불가능한 경지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곤 하는 알아차림과 연속 선상에 있는 것으로 봐야 하는가였습니다. 저는 전자의 입장에 서서, 여기서 다뤄지는 의식은 끊임없이 꼬리 물고 일어나는 개념분별에 휩싸인 우리 일상의 사태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중지하고 가라앉히는 훈련 없이, 즉 일상의 금전적 욕구와 가족적 집착과 생리적 분별망상 등의 유용성의 고리를 느슨하게 하는 조치와 단절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멀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몇몇 샘들은 타당하게도 그렇다면 이런 책을 읽은 이유가 없을 것이며 우리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분별들의 중지와 알아차림이 가능하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심오한 앎과 수행을 그렇게 비일상으로 격리시켜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저는 이런 논의가 좋았고 더 이어가보고 싶었는데요. 시간이 적고 생각을 녹인 글을 바탕으로 진행되지 않아 좀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명상으로 한 번 그 경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주관 정신의 발생과 심신이원론의 기원
드.디.어! 저희는 <의식의 기원>이라는 멋진 책을 다 읽었습니다. 사실 저희 범위는 총 3권 중 2권까지만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흥미롭고도 고마운 텍스트였습니다. 이번 주 범위에서는 양원 정신에 기반한 문화가 무너진 후에 어떻게 주관적 의식을 가진 인간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록 이 책이 의식이 무엇이며 의식 자체의 기원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비판을 받았다지만, 온갖 고대의 사료들을 해석하며 의식이 태동하는 흔적들을 보여주려는 노력은 읽는 저희에게 나름의 감동을 주었습니다.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시기부터 점술(징조술, 제비뽑기, 복점, 즉흑적 점술)이 중요한 결정 수단으로 등장했다는 분석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문헌들과 구약성서에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앞서 중국 문헌들은 공자의 가르침 속에서 주관성으로 뛰어든다. 인도인들도 양원적인 베다에서 초주관적인 우파니샤드로 돌진했다.”(421쪽) 이런 공통점들은 참 흥미롭습니다. 양원 정신의 붕괴와 문자의 발명은 함께 가며, 주관적 의식의 발달과 각종 제사종교의 발전이 이어지고, 이후 세계 곳곳에서 성인들의 가르침이 빛나는 축의 시대가 나타난 것을 생각해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에는 그 모든 흔적이 남아 있고 그것들이 가끔씩 출몰할 때마다 근대인들은 우왕좌왕함을 생각해보아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자영샘과 혜윤샘이 써주신 자세한 발제는 불교 숙제방에 올라와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또 한 가지 매력적이었던 분석은, 그리스의 서사시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시대도 저자도 다르다) 그리고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로 이어지는 동안, 의식적 활동을 담당하는 용어들이 변화하면서 기원전 6세기 경에야 우리가 아는 심신이원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의식적 주관적 정신-공간이자 신체에 반대되는 자아”(390쪽)를 지칭할 수 있는 용어도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통합된 내적 주체는 사유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각각 다른 신체 부위의 느낌들을 중심으로 한 용어들이 따로 사용되며 복합적 정서를 표현했습니다. 흔히 정신으로 번역되는 사이키(psyche)는 <일리아스>에서 생명 에너지 정도로만 사용되다가, <오뒷세이아>에서는 생명이 끝난 뒤에도 남아 하계로 내려가는 혼령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이후에는 시체를 뜻하던 소마(soma)와 대립되면서 신체가 아닌 영혼이 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른 의식활동들의 역할을 흡수해 판단력이나 이성의 의미를 갖게 된 누스(nous)와 하나로 합쳐지면서 우리가 아는 의미의 정신을 지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주관적 의식은 천년 의 이런 운동을 거치면서 가다듬어져 왔습니다. 이것은 단어들의 변화만이 아닙니다. “단어의 변화는 개념의 변화요, 개념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다. (...) 혼이라는 단어가 없었더라면, 자유나 진리나 이러한 인간 조건의 화려한 행렬은 다른 역할과 상이한 토양으로 채워졌을 것이다.”(391쪽) 혼의 발명은 우리를 다른 길로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이 의식에 문제에 내재하는 중심적 난점인 이원론은 역사 속에 끈질기게 출몰해온 그 거대한 경력을 시작한다. 이것은 플라톤에 의해 사유의 하늘에 굳게 정착하게 되고, 불가지론을 통해 대형 세계종교들 속으로 이주해 들어간 다음, 데카르트의 오만한 확신을 거쳐 현대 심리학이 처해 있는 크나큰 곤경이 된 것이다.”(391쪽)
남는 질문들 : 양원 인간은 세계-감각을 어떻게 구성할까?
뒤에 남은 3권까지 모두 읽고 오신 선생님들께서, 저희의 궁금증을 풀어줄, 그러나 또 다른 궁금증으로 데려갈 구절을 소개해주셨습니다. 3권 5장은 현대에 남아있는 양원 정신의 흔적 중 정신분열증을 다룹니다. 이것은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이 현대에도 쌓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힌트를 줍니다.
“진화적으로 정신분열증의 이점은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사실 이들은 정상인보다 피로감을 덜 나타내며 엄청난 인내력을 보일 수 있다. 그들은 몇 시간이나 계속되는 검사에도 피곤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밤낮없이 활동할 수 있고 지치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다. (...) 이것은 피로가 대부분 주관적인 의식적 정신의 산물임을 시사한다. 또한 노동력만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수메르의 지구라트, 테오티후아칸의 거대한 사원을 지은 양원적 인간은, 의식적이고 자기 반성적인 인간보다 훨씬 쉽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562쪽)
이 결론은 공감과 동시에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우리가 피로함(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은 많은 경우 우리의 기억과 예측, 기대와 실망, 반복에 대한 인식, 차별에 대한 반감, 수치심과 함께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쉬운 일이어도 반복 노동을 참을 수 없습니다. ‘내가 왜 이것을 계속해야 하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등의 생각은 피곤하게 합니다. 반면 아무리 고된 일이어도 그것이 매번 다른 서사로 펼쳐지고 우리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한 계속할 수 있습니다. 월급쟁이 직장인의 저녁보다 인센티브와 모험으로 가득한 CEO의 저녁이 덜 피로한 것은 그런 차이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요컨대, ‘나’를 이야기화하는 주관적 의식이 우리의 피로와 활력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절대적일까, 하는 것이 저희 토론의 관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주관적 의식의 없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번뇌(통증이 아닌 고통)을 모르는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고통이 ‘저항하는 마음’에서 나오기에, 저항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거나 적었을 양원적 인간은 통증은 알아도 고통을 몰랐을 거라는 주장이 한편에 있었고, 그들에게 당연히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욕망이 있기에 고통도 기쁨도 존재했을 거라는 주장이 다른 한편에 있었습니다.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서 동물의 예시를 들었는데요. 그들도 쾌고감수능력이 있고 기쁨과 슬픔의 정서를 바탕으로 사물을 분별하고 세계를 구성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비교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기에 삼가고, 양원 정신으로 돌아와 그들이 목소리에 복종한다고 할 때, 그것이 ‘원래 자기 의지’의 굴복인지 아니면 굴복될 의지가 없었는지 등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통증과 통증이 아닌 고통(정신적 고통)이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쾌락과 고통을 느낀다는 것과 망상과 집착 속에서 시달리는 것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걸까요, 정도상의 차이가 있는 걸까요? 이 모든 논의는 사실상, 양원적 정신으로부터 지금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바꿔나갈 힌트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관점에서의 질문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언제나 우리 번뇌를 해결해 깨달음의 지복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이니까요. 느낌표와 물음표를 한 아름 안고 세미나를 마치게 되어 기쁩니다!
의식의 기원 멋진 책이란 표현이 와닿습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ㅎㅎ 저도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주제를 끌고나가는 저자의 성실함에서 제 공부를 돌아보기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