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 3학기 9번째 시간 후기
의식에 대해 요리조리 파고들어간 후 더 많이/잘 모르게 된 3학기였습니다! 그래도 재미났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우선 4학기 첫 시간 공지(10.4)부터 드릴게요! 4학기의 주제는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시간입니다! 벌써부터 두근두근합니다!
1) 낭송 텍스트 <달라이 라마, 깨달음을 말하다> 1장(17~29쪽)까지 읽고 옵니다.
2) 강의가 있는 주입니다. 주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과 시간”입니다. 세미나 텍스트인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도 찬찬히 읽어갑니다.
3) 간식은 김경아 선생님과 이기웅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이윤지 선생님께서 써주시겠습니다.
줄리언 제인스의 <의식의 기원>을 덮으며
3학기 마지막 시간은 채운샘의 오전 강의로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 한 학기 동안 의식을 공부하며 생겨난 질문을 정리해오기로 했었고, 채운샘은 강의에 앞서 저희에게 ‘생각이 바뀐 지점 혹은 질문’을 말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지난시간까지 뭔가 정리된 것 같았으나 왜인지 또 모호하게 대답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는 몇 가지 코멘트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의식의 기원>을 세미나하면서, 저희 안에서는 이 책이 결코 의식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는 게 답답하다며 ‘주관 의식이라는 건 결국 자의식’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그렇게 우리가 아는 개념으로 읽으면 놓치는 게 많다는 이야기도 나왔었고요. 채운샘께서는 여러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제게는 그것이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공부한다는 건 자기 자리에서 나아간다는 것, 질문이 바뀐다는 것, 자기도 몰랐던 자기 전제 하나를 들여다보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텍스트를 읽어도 지적인 쇼핑에 지나지 않지요. 그런 일은 주로 자기가 이미 더없이 훌륭한 지혜를 알고 있다고(적어도 알게 될 거라고) 믿을 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만나는 텍스트도 자기가 아는 것에 비추어 평가하고, 이름표와 등급표를 씌우고, 저리 밀쳐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공부가 듣기의 윤리에 기반한 자기 변형의 수련이라면, 텍스트를 평가하는 것보다 텍스트를 작동시키는 것만이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들과 전제들이 조금이라도 말랑말랑그런 점에서 보면 해지는 것이자 균열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별 하나를 추가하고 위계를 공고이하는 건 조금도 공부 아닌 것이죠.
<의식의 기원>은 생각해볼 재미난 문제들을 많이 남깁니다. 채운샘은 몇몇 지점들을 이야기해주셨는데요. 가령, 이 텍스트에는 “종교적인 것이 뭘까”라는 저자 자신의 질문이 함축되어 있는 듯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개체적이고 자아국한적인 사고를 넘어가는 영역에 대한 물음인 것이죠. 이 책은 끊임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신’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원인-정신과 결과-행위를 나누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자아를 의도나 주체로서의 정신과 동일시하고, 그것은 능동적이며 언제나 신체의 행동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극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상의 정신 공간에 있는 의식이 행위를 기획하고 유도하고 지켜보고 평가한다고 말이죠. 이것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고 작동한다고 간주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줄리언 제인스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 의식이 역사적으로(신경학적으로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출현된 것임을 말해줌으로써 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럽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의식은 비록 현재 통합된 가상 자아로 작동하다고 해도,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른 작동(분열증, 간질, 꿈, 최면, 명상)을 보이며, 그런 이상 작동은 고대로 갈수록 훨씬 더 많아져서 지금과 같은 주관 의식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저자가 공들여서 선사시대의 유적들과 문자 초창기 시대의 텍스트들(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와 구약)을 분석하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의 의식을 낯설게 만드는 다른 정신을 탐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내가 먹으려고 하지 않아도 ‘손이 가요 손이 가’라고 생각합니다. 행위와 분리된 정신이죠. 하지만 그런 정신-의식은 탄생한 것입니다. 그가 분석하는 문자 이전 혹은 문자 초기 시대에는 정신과 행위 사이의 이런 이분법은 없었습니다. 매 행위마다, 정서마다, 동작마다, 상황마다 각기 다른 의식이, 통합되지 않은 의식이 깃들어 있었죠. 그런 인간이 양원적 인간입니다. 생각과 행위, 정신과 신체, 세계와 나 사이의 분리가 지금처럼 거친 이분법으로 세워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양원 인간이 듣는 신의 목소리는, 그가 놓인 이 배치와 관계 속에서 도출되는 행위의 의지들일 것입니다. 이런 목소리의 흔적 중 하나로 채운샘은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사회의 법이나 가치나 명령 등이 아니라 다이몬의 소리에 따라 행한다고 할 때, 그는 사회적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의식 차원의 힘들에 변용되고 있음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양원 정신이라는 문제를 사유하는 것의 유의미함은, 세계와 내가 분리되지 않는 정신성을 이해하려는 데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의 분리된 의식을 질문하는 데에도 있고요. 이것은 수천 년 간 자기 의식을 진화시켜온 개체가 일상의 분절들 속에서는 떠올리기 어려운 차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불교 공부에서도 무척 유용한데요. 우리가 순진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흔히 이야기하는 ‘무아’라는 진실에 있어서, 거기서 없는 ‘아’는 대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없는데 계속 있다고 착각하는 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아, 허구이지만 고집스럽게 집착되는 아는 어떤 아인가?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전제하는가? 그런 일에 있어서 <의식의 기원>이 그려보려 애써준 의식의 역사적 변용들을 살피며 지금도 맹렬히 작동중인 우리의 주관 의식을 돌아보는 일은 너무나 유용한 것 같습니다.
융의 무의식 : 억압이 아닌 대화의 영역
줄리언 제인스에 따르면 의식의 출현은 문자와 관련된다며, 언어적 은유작업 속에서 의식현상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양원정신에게서 들리는 목소리조차도 언어적이었죠. 물론 범주는 좀 다르지만, 여기서 프로이트와의 유사성이 보입니다. 프로이트도 언어를 표층의식과 무의식을 매개하는 중요한 요소로 보았었습니다. 그래서 결코 알 수 없는 무의식이 언어로 떠오르는 잠재적인 차원을 전의식이라고 규정하고, 무의식에서 언어화가 가능한 부분에 집중합니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주된 비판 원인이기도 하지요.
칼 구스타프 융은, 한때 자기 스승이기도 했었던 프로이트에게서 두 가지를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첫째는 무의식이 성적이기만 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환원된다는 점입니다. 의식과 정신의 심층적 차원을 이루는 것은 언어로 매개될 수 없는 이미지들과 형상들의 운동입니다. 일종의 만달라와 비슷한 것이죠. 융에게 무의식은 개인의 성욕과 언어로 접근할 수 없는, 그 이전의 집합적이고 문화적인 원형 이미지입니다. 물론 불교는 그런 만달라-이미지조차 넘어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항상 억압되어 있습니다. 억압되어 있기에 무의식이죠. 의식은 그런 무의식을 억압한 결과입니다. 고로 자아(ego)에게 중요한 일은 초자아와 이드 사이에서 억압을 잘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융에게 문제는 억압이 아니라 대화입니다. 무의식은 현실화되지 않은 차원이며 성적인 것을 포함한 공격적인 흐름들을 포함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은 결코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되어야 하고 참조하면서 의식 옆에 살아있어야만 합니다. 융에게 자아는 사회적 자아, 즉 페르소나입니다. 사회적 자아는 가르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그것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합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아의 그림자와도 같은 무의식에는 간음, 살인, 도둑질을 포함한 여러 욕구들, 심지어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민족적 종족적 생물적 욕구들이 함께 일렁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민담, 전설, 동화를 보면 그것들이 잘 드러나지요. 융은 이 무의식 역시 인간의 본질이며, 그 본질-그림자를 부정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함축합니다. 그렇기에 문제는 사회적 자아와 무의식의 소통입니다. 억누르면 안 됩니다. 그런 기억을 간직하면서 사회적 자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통이라는 문제가 중요하기에, 융에게 치료는 예술과 신화와 문학과 동화로 나아갑니다. 벌어지면 안 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보다 심층적인 차원의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죠. 그림 형제의 동화나 안데르센 동화를 보면 잔인하고 무섭습니다. 융은 이것을 아이들에게 읽혀야 한다고 말하죠. 읽힌다고 아이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금지할수록 편향되기 마련이죠. 이런 주장은 모든 좋고 이쁘고 착한 것만 보여주는 오늘날의 유아교육을 재고하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포함한 인간 본성을 이루는 저 잔혹성의 존재를 아는 동시에 그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갈지를 고민하는 일이지, 그것을 가리고 없는 샘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닙니다. 융의 말은 한 인간이 어떻게 건강해지고 균형잡히게 되는지를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융에게 의식은 무의식과 대립되지 않습니다. 분리선은 없습니다. 의식은 표면에 드러나 있고 명암처럼 서서히 옅어져 가면서 무의식의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자인 것이죠.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의식의 장입니다. 그런 의식의 장을 형성해가는 한 점이 바로 자아(ego)입니다. 자아는 무의식과 의식이 역동적으로 운동하는 경계에 있습니다. 의식은 보다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이고, 그런 차원 너머로 나아가면 민족적이고 종족적인 수준과 인간 이전의 수준도 함께 운동 중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 관계들 속에서 어떻게 에고를 포용력 있게 만들 것인가 입니다. 프로이트의 말대로 사회와 유연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것도 병이지만, 융의 말대로 무의식과 소통하지 못해도 병이 나고 마니까요.
3학기 마지막 시간 후기 같은 공지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긴 방학과 풍성하고 요란할(?) 명절 재미있게 보내시고 10월 4일에 ‘시간’이라는 주제와 함께 만나요!
+방학 첫 주에는 은이샘 동네에서 작은 회동을 했습니다.
부슬부슬 가을비가 오는 북한산정릉탐방로와 경국사 그리고 오래된 동네 풍경은 무척 정감 있고 아름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