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깊이와 넓이를 쭉쭉 확장해보는 ‘불교+철학’의 4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학기의 주제는 ‘시간’입니다. 2학기 때 저희는 <물질세계>로부터 불교의 ‘시時’ 개념을 스리슬쩍 훑어봤었는데요. 마지막 학기 때는 서양 철학과 과학에서 시간을 사유하는 몇 가지 방법들을 배워갈 것 같습니다. 역시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여전히 재밌을 것 같습니다~!
4학기 두 번째 시간(10.11) 공지부터 드리겠습니다.
1) 낭송 텍스트 <달라이 라마, 깨달음을 말하다> 2장과 3장(79~139쪽)을 읽어옵니다.
2) 세미나 텍스트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1장~3장(~67쪽)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발제는 이윤지 선생님과 제가 맡았습니다.
3) 후기는 이윤지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4) 간식은 이윤지 선생님과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4학기는 다른 학기와 달리 10주차(12.6)까지 진행되며, 이 마지막 시간에는 에세이를 발표합니다. 에세이 주제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개념, ‘제법무아&제행무상’을 그동안 배운 것들들 통동원해 해석해보기입니다. 채운샘께서는 각자의 모든 지와 무지를 불태우라고 하셨지요...
람림 전통의 정수, 황금 정련의 요체
올 한해, 불교 수업의 오전 시간은 함께 낭송을 하며 보냈는데요. 마지막 학기의 텍스트는 <달라이 라마, 깨달음을 말하다>였습니다. 제목도 표지도 심오함을 풍기는 것 같은데요. 몇 개의 서문 및 추천사의 친절한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람림(깨달음의 길 : 수행의 점차적 단계)의 가르침을 풀이해 놓은 것입니다. 물론 람림 전통은 천 년에 걸쳐 새롭게 풀이되어 왔습니다. 자세하게 체계가 나뉘고 살이 붙었다가 핵심으로 요약되기도 하고 또 다시 시대에 맞게 풀이되기도 하면서요. 저는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된 깨달음의 맥(법륜)이 이렇게 여러 풍토와 언어와 민족을 통과하며, 융합과 분열과 더불어서 이어져 오는 것이 새삼 대단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다시 저희가 만난 이 책 자체의 맥을 따지자면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1세기 중반, 아띠샤 존자가 인도의 람림 전통에 기초한 <보리도등론>을 쓰십니다. 예쉐외 왕의 감동적인 희생 끝에 티베트에 오신 아띠샤는 “기초부터 알려주세요”라는 장춥외와 티베트인들의 가르침에 기뻐하시면서 람림의 가르침을 상중하 근기에 맞게 정리하여 티베트에 뿌리내리고자 애쓰셨다고 하죠. 이 가르침은 제자 돔뙨빠에게 전승되었으며, 삼백 년 동안 여러 종파에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14세기 말 쫑카파대사께서 그것을 집대성하여 <보리도차제론>을 쓰셨습니다. <보리도차제론>은 대론, 중론, 소론의 버전이 있는데, 그중 소론은 쫑카파대사 본인의 수행 경험을 토대로 한 아주 간략한 서술로서 <보리도차제섭송>이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그 후로 한 세기 뒤인 16세기, 3대 달라이라마 소남 갸초께서는 <보리도자체섭송>의 정수를 뽑아 <황금 정련의 요체>를 쓰십니다. <황금 정련의 요체>는 <보리도차제섭송>의 ‘문자-주석’이며, “인도 불교 전통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와 핵심 수행법을 스승과의 관계를 독특하게 만드는 첫걸음부터 깨달음의 최종 경험인 환영의 몸, 청명한 빛의 마음을 수행하는 무상 요가 딴뜨라까지 총망라한다.”(25쪽) 그리고 우리 손 앞에 놓인 <달라이 라마, 깨달음을 말하다>는 1976년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께서 강설하신 <황금 정련의 요체>의 ‘의미-주석’을 글렌 멀린이 번역하고 편집한 텍스트입니다. 천 년 간 이어지면서도 변형된 텍스트라는 걸 생각하니, 좀 감회가 새롭습니다.
낭송 후 짧게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생각했지만, 강설의 개요에 해당하는 1장에서 굉장히 가슴에 남는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서는 몇 개만 적어서 나눠보고 싶습니다.
“윤회의 여섯 영역 가운데 우리가 태어나 보지 않은 곳은 없다. 그리고 윤회하며 누려보지 못한 행복 역시 없으며, 무수한 이전의 삶 속에서 살아 보지 않은 유형의 삶도 없다. (...) 허무하고 부정적인 삶의 목표를 갖는 대신에, 뀐탄 린뽀체의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한다. “인간의 몸을 받은 것이 얼마나 귀하고 드문 일인지 이해하고 나서 이 삶을 깊은 사유라는 장대로 보호하고 윤회로부터 자유, 즉 열반을 향해 힘껏 정진하라.””(58~59쪽)
달라이라마의 논지는 언제나 명확합니다. 우리는 본성상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대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재산, 명예, 사랑, 우정 등의 소위 세속적인 목표들은 물론이고, 종교나 정치로의 투신도 여의치가 않습니다. 고통의 층위는 굉장히 미세해서, 인간적 불행이 사라진 천신과 같은 위치에서도 계속됩니다. 무상유전에서 오는 ‘행고’와 같은 것들이죠. 그래서 행복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불행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이 지속됩니다. 그것이 윤회이지요.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행복을 추구하지만 대부분 어떻게 그 행복을 성취할지에 대해 알지 못하며, 오직 계속해서 좌절과 괴로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다.”(58쪽)
그러나 우리가 “윤회 속에서 누려보지 못한 행복이 없다”는 말씀은 확 와 닿았습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실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번 생뿐인데, 숙명통이 없는 내가 모든 삶을 다 살아봤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게다가 이는 윤회전생이 실재함을 전제해야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이런 의문이 찾아드는 한편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윤회의 영역을 살아봤다면, 그 사실을 직시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전전긍긍하며 허약한 행복을 쫓는 일은 그만둘 수 있겠구나!
또한 달라이 라마는 계속해서 ‘인간의 몸’이라는 인연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데요. 이는 ‘인간’이라는 종을 특권화하는 것이 아니라(인간 행위자는 끔찍하고 전면적인 파괴도 가능한 존재이죠), 부처님의 입에서 설해져서 수많은 언어와 문명으로 이어져온 이 깨달음의 가르침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조건이 중대성을 이해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텍스트를 옆에 두고도 그 문자를 읽을 줄 모르거나, 의미를 모르거나, 기억하고 되새기지 못한다면, 배움도 촉발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절간의 개와 고양이에게 법문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너무나 바쁘거나 다른데 한눈이 팔린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죠. 지금 이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나눌 수 있고, 그것이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상태에 살아간다는 사실의 소중함과 다행함. 마주침과 더불어 바로 지금 수행을 시작할 수 있다는 이 사실만이 인간으로 태어남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불법을 배우고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사실상 굉장히 복이 많은 것이다.”(60쪽) 이 말이 진심으로 들립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서양 철학에서 중요한 변곡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이는 그의 유명한 저서 <고백록confessiones> 덕분입니다. 이 책은 루소와 톨스토이의 동명 저작과 함께 서양의 3대 고백록으로 불립니다. 고백과 관련된 텍스트는 언제나 종교적인 전향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고백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도 모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고 털어놓는다는 의미의 ‘고백’이라는 말은 번역어로서, 동양 사상에는 없는 행위입니다. 고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면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라틴어 confessiones의 어원은 ‘말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고대에 ‘말’은,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힘과 의미를 갖는 사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 혹은 말해진 것은 로고스로서의 나름의 진실을 표명하는 효과를 갖는 사물이었던 것이죠. 이런 점을 고려하면, 고백confessiones은 ‘말하기’이지만 말한다는 그 동작의 결과가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말하기입니다. 고백의 핵심은 그 말하기의 효과가 자기 자신으로 향한다는 점입니다. 청자가 아니라 고백 당사자의 변형을 위한 내면 표명. 자기가 자기의 진실을 있는 힘껏 표명함으로써 자기 안에 신의 은총이 내재화되어 있음을 발견하려는 노력, 그것이 기독교 전통에서의 고백의 실천이었습니다. 푸코는 고백의 문화를 분석하면서, 서양의 문화란 자기 자신에게만 귀속되는 진실을 발설하고 검증받으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고 말합니다.
고백의 실천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내에서 신앙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버렸습니다. 4세기 이전까지 기독교의 영적 수행은 모두 예수가 보여준 바처럼 고행과 금욕을 실천하는 수도자의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신앙을 가장 분명하게 증명하는 방법은 순교에 있었죠. 극적이고도 강렬한 죽음. 순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갈망이 묘하게 얽힌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믿음을 증거하는 것은 순교가 아니라 ‘회심’이 됩니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을 바꿔 신을 향해 돌아앉는 전향과 개종이 가장 강력한 신앙의 징표입니다. 전향의 방법은 고백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방황했고, 어떤 계기들과 더불어 신앙의 길로 인도되어왔는지 낱낱이 점검하고 드러내 보이는 것만이 참된 신앙에 이르는 길인 것이죠.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의 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혼혈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의 알제리 지역인 로마제국의 한 속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카르타고로 유학을 가서 교육을 받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활동인 정치나 교양과 향락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30대 초반, 키케로를 읽으면서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 아마도 전향의 첫 계기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후 교대하는 이원적 선악을 가르치는 마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선과 악은 왜 있는지,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구분되는지 등의 근본적인 질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안고 플로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에 접속하여 깊은 감화를 받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것은 하나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빛”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지금에는 범신론으로 알려진 학설이었죠. 플로티누스에 이르러서야 정신=빛=실체라는 정식이 만들어지고 “실재하는 것은 오로지 정신”이라는 정신주의가 싹틉니다. 이후 수도자들의 생활을 따라가던 중, 우연히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 가사 “들어라, 읽어라”를 듣고 책을 꺼내 읽게 되는데, 바울의 로마서였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로마서> 13:13~14)
이 계시라는 사건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180도 회심하였다고 합니다. 40대 초반 그는 귀향하여 고향 마을의 교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그리스도교인들을 어떻게 회심하게할까를 고민하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내려가는데, 그것이 바로 <고백록>입니다.
시간 바깥의 영원, 신을 이해하기
고백록의 1~10권은 위의 회심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11~13권은 성서해석(주로 창세기)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시간에 대한 본격적인 질문이 등장하는 것은 11권입니다. 4세기 교부철학 이전까지, 그리스로마의 전통에서 시간은 독자적으로 사유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시간은 공간의 운동과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일, 월, 해 등 시간을 측정하는 단위는 사실 모두 태양, 달, 별, 지구 등의 운동에 기인해서 정립되었습니다. 천체의 운동을 기준으로 한 순환이 시간에 대한 설명의 주축이었기에, 시간은 길이나 단위에 의해 측정되는 양 이상으로 사유되진 않았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시간의 유무 같은 문제는 난제와도 같으니 유보되었고, 시간은 운동과 동일시되어 공간 변화의 부수효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신의 존재에 딸려 있는 영원과 창조의 문제를 해명해야 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 자체에 대해 본질적으로 사유해야 했습니다. 대체 시간은 무엇인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시작 이전에는 어떠했는가? 지나간 것은 무엇이고, 지금 현재는 무엇이며, 앞으로 올 것은 무엇인가?
마니교도를 비롯한 이교도들은 기독교들에게 언제나 조롱조로 물어왔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하느님을 무엇을 하고 계셨던가?”(432쪽)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힐난을 여유 있게 받으며 답합니다. “아무 피조물도 만들어지기 전에는 아무 피조물도 만들어지지 않았다”고요. 즉 시간 자체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피조물입니다. 신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시간을 만들었고, 시간을 만들기 ‘이전’이라는 때(시간)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시간의 작동자이신데, 당신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시기 전에 어떤 시간이 만일 있었다면, 당신께서 는 왜 일을 쉬고 계셨느냐는 말이 어째서 나옵니까? 시간 그 자체도 당신께서 만드셨고, 따라서 당신께서 시간을 만드시기 전에는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불가능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그때는’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433~434쪽)
첫 번째 공리는 이것입니다. “영원, 그것은 하느님의 실체다.”(419쪽 주석2) 신은 영원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흘러가거나 흘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은 뒤로 사라지지도 앞에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영원에서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고 전체로서 현전합니다.”(432쪽) 신은 시간의 앞도 시간의 뒤도 아닙니다. 신은 “항상 현재하는 영원으로 지고하게”(434쪽) 존재합니다. 이를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은 아주 잘 들어옵니다.
“당신은 여일하신 분, 당신의 세월은 다함이 없습니다. 당신의 세월은 도지도 않고 가지도 않습니다. 저희 세월이야 오고 가고 하며 그래야만 세월이 다 닥치는 법입니다. 당신의 세월은 동시에 모든 세월이 정지해 있고, 정지해 있으면서 가는 세월이 오는 세월에 밀려나는 일도 없으니, 지나가지 않는 까닭입니다. (...) 당신의 세월은 ‘하루’이며 당신의 하루는 ‘나날’ 아니고 ‘오늘’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내일’에 밀려나지도 않고 ‘어제’를 뒤잇는 법도 없는 까닭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곧 영원입니다. (...) 모든 시간을 당신께서 만드셨고, 모든 시간에 앞서 당신께서 존재하시며, 아무 시간 없는 시간이란 것은 존재한 적 없었습니다.”(434~435쪽)
영원한 현재라는 것이 신의 시간이라면, 우리의 시간은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시간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살고 있다고 느끼는데도 말이죠. 이것이 시간의 아포리아입니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436쪽)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현재라고 하자마자 과거로 사라지고 미래에서 도래합니다. 과거와 미래로 분열되며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현재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고 말하고 경험하는 시간 혹은 시간 감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요?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오직 영혼에만 존재합니다. 여기가 아주 혁명적인 결론이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심리적 시간’ 혹은 ‘시간의 심리적 실재’가 도출됩니다.
“이제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미래도 존재하지 않고, 과거도 존재하지 않고,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 셋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차라리 시간이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제가 다른 곳에서는 이것을 못 봅니다.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입니다.”(443쪽)
객관적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찰나로 사라진다, 등은 사실 우리에게 낯설지는 않지만, 무려 1600년 전에 시간의 표상적 존재론에 대해 이토록 촘촘하게 질문해간 텍스트는 엄청났던 것 같습니다. 신의 무시간성 혹은 시간 초월성을 밝혀냄과 동시에 피조물들의 가설된 시간을 밝혀낸 성취는, 종교와 철학의 경계를 질문하게 할 정도로 사유에서 두고두고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 같습니다. 첫 타자부터 아주 흥미롭습니다. 앞으로 등장할 칸트, 니체, 베르그손, 들뢰즈의 시간 사유는 얼마나 난해하고 흥미로울지! 다음 시간에는 호킹이 들려주는 현대 물리학의 시간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군요. 역시나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