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달라이 라마, 깨달음을 말하다』 낭송, 세미나
4학기 낭송 교재 『달라이 라마, 깨달음을 말하다》는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의 저서《황금 정련의 요체》를 현 14대 달라이 라마존자께서 강설한 내용입니다.《황금 정련의 요체》는 쫑카빠(1357~1474)대사의 수승한 교학체계로서 수행 단계를 완벽하게 요약한《보리도차제》게송에 대한 주석서이구요. 이것의 근간은 아띠쌰(982~1054)존자의《보리도등론》입니다.《보리도등론》는 아띠샤 존자께서 인도 불교 전통을 담아 체계화한 것입니다. 이 책의 중심 주제는 ‘지혜의 가르침’과 ‘방편·에너지의 가르침’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전자는 붓다에서 문수보살, 나가르주나(용수)로 계승되었고, 후자는 붓다, 미륵보살, 아상가(무착)로 전해졌습니다. 아띠쌰 존자는 계승된 이 두 전통을 통합하여《보리도등론》을 쓰셨습니다. 이 책을 근간으로 티베트인들의 수백편의 주석서, 람림(깨달음의 길)이 이어집니다. 그 수많은 문헌들 중 여덟 권의 저서(람림의 팔대 주석서)를 주목하는데, 쫑까빠대사의《보리도차제론》대론, 중론, 소론, 3대 달라이 라마의 《황금 정련의 요체》, 1대 빤첸 라마의 《람림의 안락의 길》, 5대 달라이 라마의 《문수보살의 가르침》, 2대 빤첸 라마의 《지름길로의 안내》, 닥뽀 나왕닥빠의 《람림의 핵심 단계》가 그것입니다. 이 중 우리의 수행에 맞는 두 개의 중요한 저술은 쫑카빠대사의 《보리도차제론》소론인 《람림 수행의 노래》와 3대 달라이 라마의 《황금 정련의 요체》입니다.
우리 수행의 동력은 행복을 원하며 괴로움을 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체계적인 연구와 많은 방법이 계발되었습니다만 대부분은 이생에 국한된 행복만을 일으키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물질적 환경 위에 건립된 이러한 행복은 아주 불안정한 상태를 야기합니다. 더불어 죽음과 죽음 이후의 단계들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너무 부족한 실정이지요.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것은 절대 불변의 사실인데 말이죠. 죽음 이후는 무(無)가 아니며, 우리 모두 육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에 태어날 업력을 품고 있습니다. 어디로 윤회할지는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업과 번뇌가 결정합니다. 일반적인 중생의 죽음과 윤회의 과정은 습관적인 마음의 자동연쇄 반응으로 번뇌와 전도망상에 끌려 다니는 삶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을 적에 죽음에 대해 사유하며, 인내, 자비, 무집착 등 정신적 조화와 자질을 계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량이 되어 현생의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며, 마음의 평화를 일으키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주고받게 됩니다. 이러한 진실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수행의 출발점입니다.
마음을 정화하는 것은 번뇌와 두 유형의 무지(개념적 무지, 본래적 무지), 무시이래로 우리가 수많은 생을 살면서 쌓아 둔 이전의 업의 힘을 대치하여 송두리째 뽑아내야 것입니다. 이는 우선 우리를 조종하고 헛되고 나쁜 일에 얽히게 하는 번뇌에 사로잡힌 마음을 멈추고, 자신의 오해에서 비롯된 세계와 존재의 상(想)을 배움을 통해 해체하는데 있습니다.
오후: 강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관
우리 시대의 말은 의미를 매개하는 것이지만 고대에는 말 자체가 사물이고, 진리였습니다. 말씀이 곧 진리요 지혜여서 말 자체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Confessiones'는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특히 그 행위의 결과가 듣는 사람(상대방)이 아니라 말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경우에 쓰입니다. 말하는 자가 진실을 표명함으로써 스스로의 변형을 가져오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쓸 때 신도들의 회심을 바라는 바도 있었겠지만 그 핵심은 자기변화입니다. 청중들은 이를 확인하는 신의 역할이자 벗, 증인으로 초청되었던 것이지요.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수도사로 살아가는 것이 유행이었고 신을 향한 진실의 증명으로 순교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기독교의 믿음을 증거 하는 것은 순교가 아니라 자신이 신으로부터 벗어난 방황의 삶에서 어떻게 신을 향해 돌아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낱낱이 드러내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고백록’을 통해 종교적인 전향의 과정을 낱낱이 밝히고, 고백을 서양의 전통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백을 통해 자신에게 신의 은총이 깃들어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진실이 자기에게 있음을 전제하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인데 과연 진실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 진실이란 어떤 것이고,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수도사로서의 금욕과 절제의 생활과 함께 성경탐구는 곧 진리탐구였습니다. 창조가 뭘 의미하는가? 하늘과 땅은 뭘 의미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고 탐구하는 과정 속에서 앎은 체계화되고 점점 도그마 되어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도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읽었으나 신앙의 생활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에 가서 변론술을 배우며 세속적인 삶에 물들었던 그는 3번의 회심의 기회를 가졌다고 하죠. 그 첫 번째는 키케로의 책을 읽고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기로 한 것이고, 두 번째는 선과 악을 물질적 실체로 보는 마니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나 악과 선은 왜 있으며, 어떻게 구분되고, 어디서 생겨나는지에 대한 의문에 답을 얻지 못하자 마니교를 떠나게 됨으로써 얻게 됩니다. 그 후 신플라톤학자인 플로티누스의 철학을 만나게 됩니다. 이 철학의 핵심은 모든 것은 하나인 빛에서 시작하고 우리는 다 빛의 유출물들이라고 하는 범신론적 사상으로 영적 존재인 실체, 곧 빛이 곧 진리이고 진리가 곧 정신이며 정신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사상에 경도된 그는 어느 날 아이들의 들고, 읽으라는 내용의 노랫소리를 듣고 무심코 집은 책이 바울의 서간집이었고, 이를 계시고 받아들이고 회심하여 사제의 서품을 받고 귀향해서 주교가 됩니다.(396) 그의 ‘고백록’은 총13권으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1권~10권을 쓰고, 나머지 3권은 성서 창세기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그 전체는 기도의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기도자체가 진리탐구를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하여 하느님이라고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이 부름은 상호 동시적인 것으로 내가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하느님도 나를 부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자기가 묻고 답하는 형식인데 신에게 묻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허락해 달라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라고 할 때 태초란 시간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원리적 시작, 즉 존재론적 원리의 기원을 말합니다. 존재들은 시간 속에 있고, 하느님은 시간 바깥에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하늘은 천체의 운동이고 땅은 뭔가를 이루어내는 공간이므로 하늘과 땅은 존재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존재의 근거를 만든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창조할 때 시간도 함께 창조했습니다. 창조하기 전에는 시간이 없었음으로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한 현재를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런 현재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불사와 불멸에 대한 갈망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이는 무상함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상한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와 그 무상함이 제거된 영원을 갈망하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갈등하는 인간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시간은 운동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운동이란 공간의 변화로 거리를 통해 측정할 수 있는 것이지요. 즉 시간을 셀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공간의 변화를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모든 운동들을 단순한 하나의 운동으로 환원시킬 수도 없으려니와 운동은 멈출 수 있지만 시간은 멈출 수 없습니다. 운동이 정지된 사물 또한 부패하고 소멸되면서 시간성을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운동 자체가 시간일 수 없는 이유이지요. 태양의 운행 자체가 시간이라는 주장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체 또한 시간 속에서 변화를 겪는 것으로 하나의 운동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태양이 지거나 멈춰도 시간은 흐르고, 운동의 부재도 시간으로 재는 것이므로 운동이 시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 운동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운동이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은 운동이 시간의 작동 아래 계산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시간이 운동을 계산하는 동시에 시간 자체를 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잰다는 것은 일정한 시작부터 일정한 끝까지 그 간격을 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시간도, 지나간 시간도, 현재하는 시간도, 지나가고 있는 시간도 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엄연히 시간을 잽니다. 우리는 무엇을 재고 있을까요? 정신이 소리를 청각으로 계속 들으면서 자체 안에다 소리의 표상을 형성하고 그것을 기억으로 붙잡고 있지 않는다면 들리는 음절들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보고, 맛보고, 냄새 맡고, 접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이 감관을 구사하고 주도하며 신체가 감응하는 바를 놓치지 않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재고 있는 것은 기억 속에 있는 무엇, 거기 인각(印刻)되어 남아 있는 무엇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이란 바깥에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영혼에 새겨진 흔적 같은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의 흔적이고, 미래는 다가올 것의 기대감, 현재는 지금 이 순간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영혼은 기대도 하고 주시도 하고 기억도 합니다. 현재는 계속 두 부분으로 분기하기 때문에 그 자체를 체험할 수 없으나 영혼이 미래, 현재, 과거로 지나가는 과정 자체보다는 그 과정에 기울이는 주시가 계속되므로 지속을 유지하게 됩니다. 시간이란 지나간 것에 연연하고 앞으로 올 것을 기대하게 되는 체험으로 인해 우리 영혼 속에 만들어 놓은 길 같은 것입니다. 그 길은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시간은 영혼의 확장입니다. 시간의 확장은 내 마음, 기억, 기대의 확장을 말합니다. 이렇게 분산되는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