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이번 학기 티벳에서 붓다의 모든 가르침의 정수라고 불리는 <람림>에 대한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가르침을 낭송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람림>의 주석서 <황금 정련의 요체>를 쓰신 3대 달라이라마께서 가르침을 주시고 여기에 14대 달라이라마께서 설명을 더 해주시는 아주 귀한 텍스트입니다. 3대 달라이라마는 16세기 분이신데 이 텍스트에서 마치 21세기의 14대 달라이라마와 가르침을 번갈아 주고 계시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득 이게 착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해서 생생하게 살아있고 그것을 전달해주시는 스승님들은 부처님 그 자신이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
람림의 기원은 티벳의 불교를 재건시킨 11세기 아티샤 존자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죠. 아티샤 존자의 가르침을 계승해서 이것을 수행 체계로 완성시킨 쫑카파 대사는 1419년에 열반에 드셨고 이후 100년이 훌쩍 넘어 16세기에 3대 달라이라마가 계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21세기의 달라이라마까지 이 가르침이 계속 이어져 온 것이죠. 티벳의 불교는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원류를 그대로 보존해왔습니다. 그러고보니 수많은 스승을 거쳐 람림이 저희의 가슴에까지 와닿고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오랜 시간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엄밀하고도 정교한 가르침의 전승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알려주는 스승의 존재가 너무나도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죠.
“번뇌와 업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줄 수행의 길과 단계를 안전하게 여행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올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격을 갖춘 선지식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자격을 갖춘 선지식이란 수행의 결과를 직접 체득하고 자신의 경험을 수행자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이다.” (99쪽)
그러나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라고 해서 누구나 스승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람림은 아상가(무착보살)께서 <대승장엄경론>에서 설명한 스승의 자격을 근거로 그 10가지를 하나씩 설명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자격을 갖춘 스승은 계정혜 삼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닦은 내면적 수행의 힘이 있고, 삼장을 배워 교학에 뛰어나며,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지혜를 갖추고, 법에 있어 제자보다 뛰어납니다. 또한 제자를 수행의 길로 잘 이끌고, 이익과 존경을 바라는 마음이 아닌 오직 자비의 동기로만 설법하며, 법을 가르치는 이타행에 기쁘게 정진하고, 설법하고 가르치는 데서 겪는 어려움을 잘 인내합니다. 바로 이러한 열 가지 조건을 갖춘 스승을 의지하여 불법(佛法)의 핵심을 요약한 람림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어떤 기술 하나를 배울 때도, 예를 들어 목공 기술을 배운다든지, 운동이나 악기를 배운다든지 할 때도 가르치는 사람이 제대로 자격을 갖추었는지 잘 살펴봅니다. 하물며 삶 전체를 아우르는 깨달음의 길을 안내하는 스승의 자격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의 눈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이죠. 달라이라마 존자님은 자격 미달의 스승 밑에서 수행하는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이라고 하셨죠. 불행한 것이 맞습니다. 저희가 잘 아는 앙굴리말라도 그런 케이스였죠. 올바르지 못한 스승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1천명의 사람을 죽이면 깨달음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쏟으며 헛된 길을 가고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죠. 딴뜨라 문헌에서는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실지 숙고하고 결정하는데 12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고 한답니다. (124쪽) 사실 스승과의 깊은 인연이 이번 생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면 어쩌면 12년은 별로 긴 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올바른 스승을 고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반드시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죠.
자격은 스승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람림을 배우려는 제자에게 필요한 자격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배울 때, ‘그냥 할 수 있는 만큼하면 되지.’ 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움의 자세라는 것이 있는 법이죠. 람림에서 이야기 하는 첫 번째는 먼저 ‘진중한 탐구’입니다. 이것은 편중된 시각을 지니고 배우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는 다양한 종파의 가르침이 있는데 람림은 모든 종파와 전통을 아우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전통과 조금 다르게 보이는 가르침을 편견으로 대하는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가령 저희도 연구실에서 불교와 동서양의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텍스트를 통해 많은 스승을 만납니다. 이때 하나의 공부나 스승만을 기준으로 다른 배움을 편견으로 대한다면 답답한 일이죠. 진리의 매트릭스에서 하나의 진리가 어떻게 다른 언어로 표현되고 사유되었는가를 진중하게 탐구하는 게 달라이라마께서 말씀하시는 배우는 자의 자세가 아닐까요? 달라이라마께선 자신의 종파만이 최고라는 편견을 지닌채 <황금정련의 요체>를 읽는 것은 쇠와 금을 구별 못하는 모자란 당나귀에게 황금 귀걸이를 걸어주는 것과 다름 없다고 하셨어요. 아무렴 당나귀는 되지 말아야죠. ^^;;
두 번째는 ‘비판적인 지성’입니다. 여기서 달라이 라마께서는 호기심을 갖추지 못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목에 사슬을 채운 원숭이를 맴돌게 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해주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신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배움에 비판적인 태도가 없다면 수행은 늘 시시한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110쪽) 배운 것을 숙고하고 사색하고 분석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불교 교육체계인 문(聞)-사(思)-수(修)에서 사(思)의 파트가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비판적인 지성이죠. 이어서 세 번째로 제자가 갖추어야 하는 자질은 진리에 대한 의지를 갖추어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진리(법)와 진리(법)를 가르치는 스승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격을 갖춘 스승과 제자가 만나면 제자는 스승에게 세 가지의 공양을 올려 돈독한 관계를 건립해야 한다고 합니다. 세 가지란 물질적인 공양, 봉사 그리고 올바른 수행입니다. 이 중에서도 올바른 수행은 그 결과 때문에 가장 고귀한 공양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배움의 적극적인 실천이자 배움의 직접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배우고 수행하며 간혹 스승의 가르침이 불합리하게 느껴진다면? 이럴 때의 기준은 언제나 합리적인 이성과 불법에 근거한 사고입니다. 제자는 반드시 신실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스승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왜 스승을 존경하는지 명료하게 알고 의식하면서 헌신해야 합니다. 스승을 무조건적으로 완벽하게 보고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과 존경을 지혜로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죠.
2.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읽으면서 또다시 물(리)포(기)자인 제가 깊은 좌절을 경험했습니다만 이 책이 과학도들에게도 호락호락 읽히는 책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조금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우주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주는 출발점을 가졌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시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시간이 끝에 다다를 수 있는가?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있는가?” (<시간의 역사> 스티븐 호킹, 2쪽) 저같은 사람은 그닥 궁금하게 여기지 않는 이 질문들이 과학자들을 오랜 시간 괴롭혀온 숙제라고 하며 스티븐 호킹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최근 물리학은 이 가운데 일부에 답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답들이 과연 진실로 밝혀질지는 두고 보아야 한다고 하죠. 모든 이론은 가설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잠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주를 관찰하고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에 내재해 있는 질서를 이해하고자 갈망한 인류의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기원전 340년 모두가 평평하다고 믿는 지구를 둥근 구라고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1514년 태양 중심의 우주 모형을 제시한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1687 만유인력 법칙을 발표한 뉴턴에 이르기까지 철학자이자 자연 탐구자로서 이들은 밤하늘에 펼쳐진 우주 은하계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관찰하며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우주의 법칙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 지적 호기심과 탐구는 현대에까지 이르며 절대 공간와 절대 시간에 대한 개념을 무너뜨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공간에서의 절대위치라는 개념은 뉴턴의 운동법칙에서 이미 폐기되었다고 하죠. 모든 물체는 각각에 대해 상대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움직이고 있기때문에 우리는 절대위치라는 것을 상정할 수 없습니다. 즉 어떤 물체의 절대적 정지 상태라는 것을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단 말이죠. 사건들의 위치와 그 사이의 거리는 전차 위에 있는 사람과 선로 위에 있는 사람에게 각기 달라지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겐 한 사람의 위치를 다른 사람의 위치보다 선호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어집니다. 저는 스티븐 호킹의 이 말이 참 와닿았는데요, 이것은 삶에서 우리가 서로의 위치를 비교하며 어떤 것을 선호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도 꼭 들어맞는단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속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고, 선로 위의 내 삶이 전차 위의 저 사람의 삶보다 더 좋고 나쁨을, 그 위치 자체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뜻처럼도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절대시간에 대한 개념은 매우 난해합니다. 이것은 아인슈탄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예요. 1865년 전파와 광파의 일정한 속도를 예견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전파와 광파의 일정한 속도를 뒷받침하기 위해 ‘에테르’라는 물질을 상정합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만약 절대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한다면 에테르라는 개념이 아예 불필요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상대성 이론에서 아인슈타인은 모든 관찰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빨리 움지기이고 있든간에 동일한 빛의 속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E=mc² 으로 정리되는 그의 이론은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의 원리와 어떤 물체도 빛보다 빨리 이동할 수 없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에너지와 질량이 등가이기 때문에 물체가 운동에 의해 얻는 에너지는 그 질량에 더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속도를 증가시키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하고요. 물체가 광속에 가까워지면 그 질량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록 늘어나고 속도를 보다 높이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게 됩니다. 실제로 물체는 결코 빛의 속도에 도달할 수 없는데, 빛의 속도에 도달하면 그 물체의 질량이 무한대가 되며 질량-에너지 등가원리에 의해 무한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모든 일반적인 물체는 영원히 빛의 속도보다 느린 속도로 제약됩니다. 고유한 질량을 가지지 않는 빛과 그 밖의 파동만이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텍스트를 읽고 정리는 했지만, 잠시 이해한 듯 하다가, 금세 도로 무슨말인지 알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의 붕괴가 아니라 이해의 붕괴상태를 경험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
과학을 좀 더 공부하신 도반들의 친절한 설명으로 세미나 중에는 뭔가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후기를 쓰려니 ‘기억 보존의 법칙’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실감하네요! 호호 ^^ 그러나 도반님들과의 셈나를 통해 E=mc² (에너지= 질량 x 빛의 속도의 제곱)이 조금 더 친근해 졌다는 것과 빛의 속도가 1초에 300,000km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매우 큰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관점과 전제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시간은 공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거나 공간에 대해서 독립적이지 않으며, 시간과 공간이 결합되어 시공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대상을 형성한다는 것이죠. 시공 (space-time)은 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지금 나 자신이 어떻게 시공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이 순간의 시간과 공간도 함께 굴절하고 휘어진다니, 너무나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연기의 진리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 신통방통합니다. ^^ 내 마음을 선하고 올바르게 다스리고, 내가 머무는 장소를 청정하고 깨끗하게 하며, 나의 하루를 게으르거나 산만하지 않게 청정하게 보내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그래서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시공이 진리를 탐구하는 우리와 동시적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게 아닌가 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E=mc² ~” _()_
정말 <달라이라마, 깨달음을 말하다>는 3대 달라이라마와 14대 달라이라마가 왔다갔다가하며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물론 시대를 건너, 종파주의로 빠지는 위험성을 강하게 경계하고 계신 모습도 왠지 감동이었습니다.
"지금 나 자신이 어떻게 시공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이 순간의 시간과 공간도 함께 굴절하고 휘어진다니, 너무나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연기의 진리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 신통방통합니다. ^^ "
이 구절로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절대공간과 절대공간 없이 우리가 모든 물체에 대해 상대적 운동을 하고 있다면, 우리에게서 더 멀리서 더 빠르게 멀어지고 있는 별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시공간은 변형됩니다.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저에게 그 별들의 시간은 느리게 관찰되지요.
이것을 좀 더 해석해보면, 우리가 지금 위치에 가만히 '멈춰 서서' 우리와 상대적으로 멀어지고 있는 모든 별들, 물질들, 존재들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멀리 있는 것들을 찬찬히 펼쳐볼 수 있다는 얘기 입니다. 부처님의 숙명통이나 천리안은 상대성이론에 기반한 '시간 지연'과 '공간 수축'의 응용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