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책을 펼쳐들면서 본격적으로 시간의 늪(?)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를 펼치고 헤롱헤롱 했으니 이젠 강의에서 철학자들의 시간론을 엿보며 잠깐 바람을 쐬어야겠죠? 4학기 세 번째 시간(10.18) 공지드립니다!
1) 낭송 텍스트 <달라이라마, 깨달음을 말하다> 4, 5, 6장을 읽어옵니다.
2) 강의가 있는 주입니다. 이번 주인공은 칸트! 그래도 세미나 텍스트를 쭉쭉 읽어갑니다.
3) 후기는 정혜윤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4) 간식은 이기웅 선생님과 이미영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초심자-수행자의 자세 : 신심과 호기심
이번 주에는 <달라이라마, 깨달음을 말하다>의 2장 ‘수행에 대한 세 가지 견해’와 3장 ‘스승과 제자의 만남, 구루 요가’를 함께 낭송하고 짧은 토론을 했습니다. 윤지샘께서 후기에 아주 자세하고 정성스런 정리와 풀이를 해주셨는데요. 저에게는 람림 수행에 있어서 제자-수행자의 자질을 말씀해주시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황금 정련의 요체>는 람림을 배우는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해서 설명한다. 첫 번째는 ‘진중한 탐구’이다.”(106쪽) “람림 수행자의 두 번째 기본 자질은 ‘비판적 지성’이다.”(110쪽)
진중한 탐구. 그것은 종파주의를 넘어서 모든 종파와 전통에 관계없이 열린 마음으로 수행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특히 14대 달라이라마는 타 종교 뿐 아니라 불교 내에서의 모든 배타성과 전통주의에 반대하며 통합적 수행을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근본적인 말씀을 해주셨죠. “수행길의 본질을 이해했다면, 서로 다른 유형의 불교 수행 사이의 모순을 볼 필요는 없다. 붓다께서 당신의 방대한 가르침을 펴실 때 사람들이 어떤 것이 정통 불교이고 어떤 것이 아닌가, 어떤 것이 우월하고 어떤 것이 열등한가를 헷갈리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다.”(108쪽) 기본적인 ‘신심’이 핵심입니다. 그것이 배타성을 넘어갈 길인 듯 보입니다. 정말 깨달음이 목적이라면, 큰 뜻을 이해하고 여러 갈래 길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비판적 지성. 이것은 ‘호기심’이라고 표현됩니다. 수행이 그저 옳은 말씀이나 고상한 당위를 이행하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도그마가 되거나 시시해지게 됩니다. 둘 모두 답답하고 꽉 막혀 있으며 그렇기에 위험합니다. “아무리 강한 신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호기심을 가지지 않고 비판적인 태도도 취하지 않는다면, 수행은 늘 시시한 상태에 머무르게 되고 말 것이다.”(110쪽) 법문에 대해서, 가르침에 대해서 탐구와 물음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판적 물음이 생겨나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이 발밑의 현실이 참조되어야 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발밑의 현실은 나의 마음장만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비인간들이 구체적으로 놓여 있는 물질적, 담론적, 경제적, 문화적, 생태적 배치들일 것입니다.
진중한 탐구와 비판적 지성. 혹은 신심과 호기심. 이 두 자질 중 하나라도 놓치면 자신과 타자들의 번뇌를 해방하러 가는 길은 자주 삐걱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문제들을 이해하고 싸우더라도 언제나 근원적인 자비심 안에서 그렇게 하고, 반대로 깨달음을 추구할 때에도 늘 보이지 않는 삶의 궤적들을 알고자 하기. 이것을 기억하며 오늘도 내일도 배워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절대 시간의 붕괴 : 일그러진 시공간
시간의 여정 속으로 들어선 저희는 스티븐 호킹의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의 범위는 1~3장까지였는데요. 사실상 거시 우주에 대한 물리학사(史)에 대한 기본적인 스케치였습니다. 아직 호킹의 본격적인 관점은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당연한데, 여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까지 위대한 과학자들의 ‘결론’들이 정리되어 있지만 그들이 놓인 지식적, 담론적, 종교적, 문화적 배치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다지만, 어떤 표상 및 분위기와 더불어 그랬는지 저희는 모르죠. 자세한 과학사 책을 보면, 그의 종교가 태양숭배적 경향이 있어서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두는 생각에 익숙했다고 하네요. 저는 이론적 정리에 포함되지 않는 이런 과학 외부적 배경들이 궁금하고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뉴턴이 절대 공간의 부재를 발견하고도 “그 사실은 절대자인 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모순을 빚었기 때문”(28쪽)에 무척 곤혹스러워 하고 그 개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는 호킹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신념과 분석이 서로 경합하며 대치하는 이런 일은 모든 과학자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훗날 다윈에게서도, 심지어 아인슈타인에게서도 나타나지요.
과학사를 요약하는 호킹의 관점은 ‘절대’의 기준이 파괴되는 여정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어쩌면 인간은 변하는 것들의 아래 변하지 않는 기반 혹은 원리가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현상보다 법칙이 먼저 있다는 생각이죠. 그런 생각은 그것은 종교나 형이상학 뿐 아니라 물리학에서도 강력합니다. 운동을 표상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운동하지 않는 배경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만물이 생장하고 돌아가는 땅이 움직인다는 생각은 낯설고 불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믿고 정리하려는 힘과 마찬가지로 비판하고 사고하려는 힘도 뛰어난 것이 인간이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서는 주로 사유의 방법을 통해, 근대에 이르러서는 관측과 실험에 대한 해석을 통해 불변의 기틀이라고 믿던 요소들이 하나씩 해체되어 옵니다. 별들이 아니라 지구가 돌아간다는 사실(코페르니쿠스), 원형이 아니라 타원으로 돈다는 사실(케플러), 공간상의 절대적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뉴턴), 시간조차도 비균질적으로 흐른다는 사실(아인슈타인)이 언제나 치열한 논쟁 속에서 제시되어 왔습니다.
절대공간이 부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희는 이미 상식이라고 알려진 뉴턴의 운동법칙도 사실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위치를 가질 뿐 정지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마타 명상을 하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어도, 지구는 시속 1600km로 자전하고, 시속 11만 킬로미터로 공전합니다. 게다가 태양계 자체가 우리 은하의 중심을 시속 83만km로 돌고 있습니다(아래의 이미지를 참조해보세요!). 그뿐 아니죠, 우리 은하 자체가 또 다시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 중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지’란 무엇이며 ‘운동’이란 무엇일까요? 속도(정확히 말하면 속력)란, 어떤 대상을 지목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KTX를 타고 시속 300km로 질주해도 인공위성에서 보면, 시속 1300km로 후진하는 모습이겠죠. 인공위성이 명상 중인 우리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보고 있기 위해서는 지구의 자전속도만큼 내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공위성에게 아무런 무리가 아닐텐데, 그것을 스쳐가는 공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 속 물체들은 소맷자락 휘날리며 달려가지 않습니다. 즉 인공위성에게 정지와 운동 사이의 경계는 없습니다. 명상가에 대해서는 정지하고 있겠지만, 달에 대해서는 고속 질주 중이겠지요. 속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객관성을 보증할 정지물이 필요합니다. 뉴턴은 그런 거점이 조재하지 않음을 밝혔죠.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운동 중입니다. 공기조차도요. 따라서 절대 위치나 절대 공간은 부재합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신이나 천국이 존재할 여지는 더 적어지겠죠.
여기서 저희는 무게(weight)와 질량(mass)의 차이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무게는 정확히 말하면 힘입니다. 힘은, 뉴턴의 제2법칙 F=ma에 따라 질량×가속도로 정의됩니다. 따라서 저의 몸무게의 정확한 단위는 kg×f(단위면적당 힘)이며 이는 지구의 중력 가속에 제 질량을 곱한 값입니다. 이것은 지구와 저 사이의 인력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달에 가면 그 인력이 약해지고 무게는 지구에서의 1/6이 되지요. 반면 질량은 그 물체의 고유한 양으로 달에서도 같은 양이 됩니다.
어려움은 아인슈타인에게로 가서 증폭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E=mc2에 따르면, “에너지와 질량이 등가이기 때문에, 물체가 운동에 의해서 얻는 에너지는 그 질량에 더해지게 된다”(32쪽)고 하는데요... 저는 이 말에서 그냥 그렇다는 것만 끄덕일 뿐, 경험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된다는 건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 우리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갈 수 없어서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위에서처럼 절대 공간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일이 가능한지가 의아해졌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무언가’에 대해서만 속력을 가질 수 있을 텐데요. 가령, 태양계는 우리 은하의 중심에 대해 83만km로 공전하는데, 이는 빛의 속도의 0.1퍼센트 정도됩니다. 그렇다면 태양의 질량은 조금이라도 증가하는 것일까요? 에너지, 속도, 질량... 일상 용어인데도 잘 정리가 안 되고 떠도는 듯한 기분은 저뿐인가요? 그건 아마도 과학책 서술의 두 딜레마 때문인 듯 합니다. 이론의 결론들만으로 엮으면 과정을 따라갈 수 없지만, 과정을 나타낸 식들을 유도하면 뭔 말인지 알 수가 없어지는 거것이죠. 그래서 저희에게는 이 간단해 보이는 서술들을 여러 곳에서 여러 기회에 만나면서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절대시간 개념을 무너뜨린 상대성 이론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물체들이 고유한 위치 없이 언제나 상대적인 위치만 가지고 운동할 뿐이라 해도 그것은 마치 동영상처럼, 특정 시점 t에서 특정한 위치들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즉 모든 공간 운동을 관활하는 시간선 혹은 공간 운동의 배열들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는 객관적 시간선이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절대 시간 개념마저도 해체해 버립니다. 마이컬슨과 몰리가 수행한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말이죠. 그들은 빛의 속도가 어느 누구의 운동에서나 동일하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지구가 자전하며 가속되는 면에서 보든 감속되는 반대면에서 보든 빛의 속도는 일정했습니다. 이는 곧 시간 자체가 다르게 흐름을 말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운동이 상대적이라는 전통적인 상대적 원리에 광속 불변의 법칙을 더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차에서 물건을 던지면, 정지해 있는 사람에게 물건은 차의 속력과 던져진 속력의 합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빛은 다릅니다. 마주보며 달려가는 우주선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빛을 쏜다면, 쏜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바깥에서 보는 사람에게도 빛의 속도는 불변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요? 바로 서로에게 시간이 상대적으로 흐른다는 것, 동시성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저에게서 빠르게 멀어지는 우주선, 제가 보기에 광속에 가깝게 운동하는 우주선은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 그의 주변으로는 빛의 펄스가 느릿느릿 다가가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에게 빛은 제 속도로 아주 빠르게 스쳐갑니다. 모두의 시계에서 시간이 제각각 다르게 흐른다는 사실. 이를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요?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빛의 속도를 기준으로 시간과 공간을 합친 시공간(space-time) 모형을 만들어보면, 물체들은 빛이 그리는 궤적에 대해 각자의 운동 궤적을 그려낼 것입니다. 모든 관찰자는 자신이 빛의 속도에 대해서 정지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운동하는 물체들이 빛의 속도에 관계하여 특정한 속도를 갖고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시간이 아니라, 시공간의 축이 다른 기울기를 갖게 되는 상황입니다. 그에 따라 다른 각도에서의 시간선을 갖게 되는 것이죠. 쉽지 않지만 여기까지가 특수상대성 이론의 이야기입니다. 요약하면 1) 빛의 속도는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하지 않다. 2) 시간은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하지 않다. 3) 시간과 공간은 하나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중력이라는 문제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 무엇도 빛의 속도보다 빠를 수는 없는데, 중력이라는 힘은 그 영향력을 단번에, 무한한 속도로 저 끝에서 이 끝으로 전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중력의 본질을 바탕으로 시공간을 다시 정리한 이론이 바로 일반상대성이론입니다. ‘일반’인 이유는 이전의 시공간 모형이 ‘특수’한 경우였음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시공간은 물질의 질량과 에너지에 의해 움푹움푹 패여 있고 휘어 있기에 편평하지 않습니다. 빛의 궤적들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어 있지요. 그렇게 본다면, 중력이란 “다른 힘들과는 달리 실제로는 힘이 아니며, 전부터 추측해왔듯이 시공이 평평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39쪽)입니다. 마치 트램펄린 위의 볼링공이 2차원 면의 면적을 늘어나게 하듯, 시공간상의 물질은 3차원 공간의 용적을 늘어나게 합니다. 볼링공에 의해 늘어난 트램펄린 주변을 지나가는 탁구공은 더 많은 면을 통과해야 하고 볼링공 안쪽으로 휜 궤도를 그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무거운 별에 의해 휘어진 시공을 지나는 빛은 더 많은 공간을 통화하면서 안쪽으로 휘어지게 됩니다. 실제로 그 빛은 직선 경로를 달리고 있는데도, 더 먼 영역을 통과하며 곡선을 그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외부 관찰자에게는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보이죠. 시간 지연이 또 일어납니다. 이러한 시공간 왜곡에 의한 효과가 바로 중력이지요.
중력을 분석하면서도 아인슈타인이 놓친 것이 있습니다. 에너지와 질량에 의한 중력효과가 우주 전체에 걸쳐 일어난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뉴턴의 만유인력으로부터도 제시될 수 있는 질문이었는데요. 모든 것이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면, 우주는 결국 한 점으로 응축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우주의 수축을 막을 반발력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죠. 아인슈타인은 이 우주가 줄거나 늘어나는 동적인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 자체가 우주에 대해 그러한 결론들을 함축하고 있었죠.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우주상수를 고안해 이론을 수정하였고, 훗날 이것을 자신 일생의 최악의 실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공간과 시간에 이어, 우주라는 절대성이 해체되는 순간입니다. 호킹은 일반상대성 이론이 함축했던 우주의 팽창과 수축에 관한 20세기 중후반의 이론과 관측들을 개괄하며, 빅뱅이라는 시간적 특이점을 제시합니다. 시간 자체가 만들어졌어야 하는 그 특이점. 이 부분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거시물리학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 다시 가장 작은 세계에서 물리학이 이뤄놓은 ‘절대성’의 파괴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흥미롭지만 머리가 지끈거리는 지점들이 많이 남는데요. 조금 벅차지만, 할 수 있는 만큼씩 시간의 굴곡을 따라가보면 좋겠습니다.
산만한 과학 토론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셨네요~ 역시 믿고 보는 민호샘표입니다. 어렵다고 하면서도 같이 더듬더듬 해온 과학세미나 덕분에 개념과 주장들이 그리 낯설지는 않네요... 물론 설명하라면 어버버버어버버버 너도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 수준이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