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을 이어가는 4학기, 저희는 칸트의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 칸트 철학의 기초를 배워야 했습니다. 역시 철학자 이야기는 재미났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서머리를 들어서 그렇겠죠.^^ 우선 다음 시간 공지부터 드립니다.
1) 낭송 텍스트 <달라이라마, 깨달음을 말하다> 7~8장(189~281쪽)을 읽고 옵니다.
2) 세미나 텍스트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4~6장(68~127쪽)까지 읽고 옵니다. 발제는 이기웅 선생님과 최윤순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3) 후기는 김호정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4) 간식은 김호정 선생님과 최윤순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칸트 강의가 다섯 번째 시간에 이어지니, 칸트 프린트물을 찬찬히 읽어봅니다.
인간이라는 조건과 인간 인식의 조건
흥미롭게도 오전 낭송 텍스트와 오후 강의가 크로스되는 지점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인간’과 ‘조건’이라는 키워드였습니다. <달라이라마, 깨달음을 말하다>에서는 깨달음이라는 사건에 있어서 인간의 몸이라는 조건이 갖는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채운샘의 칸트 강의에서는 인간이 느끼고 판단하는 조건을 ‘비판’하는 일의 의의를 배웠습니다(그 외 대단한 공통점은 없었네요^^).
“지금 우리는 수행하기 유리한 ‘여덟 가지 자유’와 ‘열 가지 구족’의 ‘유가구족’을 갖춘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다.”(144쪽)
이 시대에 인간의 몸을 받고 태어났다는 일의 중요성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중생이긴 하지만 지옥, 아귀, 축생, 천신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라는 조건은 고통을 인지할 수 있고 고통에서 벗어난 자들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기에 대단히 유리한 상황입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과 같은 시대는 법을 전해 들을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고, 수행을 도와줄 인연이 어디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풍요롭습니다. 달라이라마께서는 아귀나 천신, 그리고 동물들의 몸이나 불법이 전해지지 않은 시대적, 문화적, 지리적 상황들과 비교하면서 ‘오늘의 우리’ 상황이 얼마나 극적이고 다행한 상황인지를 일깨워주십니다. 곰곰이 되짚어 보면 ‘행운’이라는 표현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즉 불법과 접속할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과거생의 굉장한 선업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나 자신이 이 중생계에서 어떤 조건에 있는지, 역사들과 사회들 속에서 어떤 조건에 있는지를 절절하게 인지하는 일의 중요성은 대단합니다. 이러한 ‘반성’과 ‘자기 객관화’ 자체가 우리에게 헛되이 살아선 안 되겠다는 마음과 강력한 수행의 동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가구족을 제대로 아는 것은 이번 생에 뜻 깊은 삶을 추구하겠다는 열망을 저절로 경험할 수 있다는 데 가치가 있다.”(146쪽)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미묘한 발심의 방법인 듯합니다. 저는 때때로, 우연한 계기들로 제가 교회를 나오고,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대학에서 규문에 와서 불교나 다른 철학을 접할 수 있게 되었음이 신통하고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살고 있을 친구들, 시골 동네에서 자리 잡았을 친구들, 대학을 졸업해 직장을 다닐 친구들을 생각합니다. 그럴 때면 그들의 삶과 제 삶을 단적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당연히 삶의 다양성에 좋고 나쁨을 가리는 일은 위험할 뿐 아니라 바보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불교 공부나 철학 공부가 열어줄 수 있는 앎과 연결의 기쁨 혹은 독특한 관계,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지향점으로의 접속이라는 측면을 생각하면, 교회나 시골 마을이나 회사원보다는 공부방을 오가는 삶이 조금 더 용이할 수 있습니다(훗날 역전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지만요). 이 점을 기억하는 것은 목표를 더 단단히 붙들고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운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이 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비교를 통해 힘을 얻는 방식이, 다른 이들이 나보다 못한 조건에 있다는 식으로 그들을 섣불리 ‘불행한 처지’에 둘 위험도 항존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든 동물에 대해서든 어쩐지 그건 부당해 보입니다.
“그 어느 동물도 도와달라고 애걸하지 못하며 스스로 그 곤란을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의 지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 축생계의 업과 고통이다. (...) 우리는 반드시 축생계의 중생들이 겪는 괴로움을 명상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 고통을 원하는가? 이것을 참을 수 있을까?’ 만일 원하지 않는다면 축생을 일으킬 원인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라.”(184~185쪽)
이 구절은 여러 방식으로 독해될 수 있고, 저희에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의 현재 상태, 이 책이 쓰인 시대(약 반 세기 전), 우리 주변의 이런저런 담론들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희는 달라이라마가 존재에 위계를 만들 의도가 전혀 없음을 다 압니다. 언제나 깨달음을 목표로 두고서 정진하라는 의도로 말씀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변호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를 바꾸는 것이 공부의 목표라면, 문장들을 더 다층적으로 흥미롭게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인간의 조건을 객관화할 때 사용하는 시선들이 어디까지 유용하고 어디서부터는 삐걱일 수 있는지를 생각해는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조건, 그리고 지금 나의 조건을 훨씬 더 스펙트럼 속에서 바라보기. 그 작업이 우리를 건강하게 정진하게 할 수 있는 방향의 해석들을 만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비판왕 칸트가 발견해낸 마음 작용들
AI를 사고하는 철학자들이 참고하는 철학이 칸트와 유식불교라고 합니다. 현대철학의 시작이라 불리는 칸트는 어떻게 마음이 작동하는가의 문제를 설명했습니다. 칸트 이전까지 철학은 모든 것을 산출하는 근거는 산출되는 것 바깥에 있었습니다. 산출된 인식은 그 외부의 무엇에 의해 조건지어졌습니다. 바로 신이었죠. 비록 스피노자가 신과 양태들의 위계를 허물고 자연으로부터 인식과 정신의 구조 및 발생을 설명해내긴 했지만, 그러한 인식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밝히면서 ‘인간이 인식한다는 건 무엇인가’를 끝까지 물고 늘어선 사람은 칸트였던 것이죠.
17세기의 사유는 재현의 논리였습니다. 인식론에서 마음은 거울에 비유되었습니다. 즉 외부의 대상을 안쪽으로 비추는 것이 인간 의식으로 여겨졌죠. 표상, 반영, 모사. 이것이 의식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진리란, 비춰진 대상과 비친 표상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닮음의 정확성으로 진실이 평가되었죠. 그렇다면 진리의 기준은 외부, 즉 신이 만들어 놓은 대상세계가 되고 이것이 관심사였습니다. 하지만 칸트에 이르러 인식의 조건이 주체에 내재되어 있음이 이야기됩니다. 중심이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온 것이죠. 이것을 마네의 그림이 잘 보여줍니다. 그는 예술에서의 칸트라고 불리며, 캔버스 자체를 작업물로 보여줬다고 하네요. 그림은 3차원 대상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캔버스라는 2차원에서 그리는 것임을 밝히면서요.
비판critique은 칸트가 철학에서 수행한 핵심적인 방법으로, 잘못을 지적한다기보다는 조건들을 살피거나 정초한다는 의미입니다. 비판의 그리스어 krinein은 첫 번째로 ‘자르다’라는 뜻이 있다고합니다. 빵의 썩은 부분과 괜찮은 부분을 골라서 잘 갈라내듯, 어떠한 사실이나 사건이 어디까지가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지, 어디부터가 해당되고 해당되지 않는지 영역을 나누고 한계를 설정하는 일이죠. 그렇게 하여 어떤 것이 보편타당한가를 살필 근거를 마련합니다. 하여 칸트는 과학과 철학의 구분을 세웠다고 하는데요. 과학은 앎의 확장으로 정의되며, 미지의 영역을 앎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반면 철학은 이미 아는 것을 비판하는 일이지요. krinein의 두 번째 의미는 ‘해부하다’입니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은 어떤 요소들 혹은 기능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떤 메커니즘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표상하는 세계는 어떻게 어떤 원리들로 그렇게 표상되는가? 이것이 <순수 이성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질문입니다. 칸트의 인식론이죠. 두 번째로는 인간이 사회의 가치와는 별개로 스스로 선택하고 행하는 힘에 대해 질문하는 윤리론입니다. 칸트는 <실천 이성 비판>에서 그 힘을 입법의지 혹은 양심이라고 부르면서 자유의 문제를 탐구하지요. 세 번째는 예술론인데, 인간의 감성학, 즉 아름다움의 감정이란 무엇인지를 다룹니다. 이것은 < 판단력 비판>인데, 여기에는 인식의 범주 및 그 범주화 작용이 고장날 정도로 인격이 확장되는 숭고 체험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칸트는 이렇게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 조건들에 대해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허공에서 인식하고 외부의 존재에 의해 윤리를 끌어내지 않습니다. 인식, 윤리, 미학에는 그런 현상을 가능케 하는 근거들이 있습니다. 칸트는 그것을 a priori(선험조건)이라고 불렀고, 푸코는 episteme(에피스테메)라고 불렀죠.
인식의 능력들과 현상계, 그리고 이성과 이념
칸트의 초점은 언제나 현상계, 즉 몸과 마음 등 우리의 조건 위로 출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현상계 너머에 있을 세계, 즉 대상세계 그 자체는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미묘한 문제가 생기는데요. 칸트가 그러한 알려지지도 알 방법도 없는 실재 자체를 ‘물자체’라고 명명했고, 어쨌든 그것이 있다고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니체처럼 급진적으로 그런 것은 없다고, 출현하는 현상계가 전부이고 해석이 다라고 말했으면 문제되지 않았겠지만, 칸트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고 남겨두었죠. 하지만 생각 거리가 남습니다. 채운샘은 여기서 ‘알 수 없다’의 두 가지 뉘앙스를 분석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신비한 무언가’여서 저 멀리에 상위 차원에 있다는 태도와, 그것이 언어나 표상 같은 방식으로 결코 ‘규정되지 않음’을 강조하는 태도. 칸트는 물자 체가 신묘하고 우월한 차원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시공 개념이나 질서, 규칙 등으로 포착될 수 없으므로 그것에 대해 집착하지 말자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관심사는 현상계이기에, 그 너머에 대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그건 모르겠다”고 얘기하는 것이죠. 이는 외도들이 세상의 끝과 시작을 물어올 때 부처님이 침묵을 지킨 경우와 비슷합니다. 혹은 자로가 공자님께 죽음을 물을 때 “삶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이라고 답하신 것과도 같이 생각해볼 수 있죠.
현상계는 인식 주체에 의해 범주화되고 개념화되고 인과가 부여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대상 세계에 대해 형식을 부여하는 인식 능력들이 저희에게 존재합니다. 감성, 지성, 상상력, 이성이 그것인데요. ‘감성’은 받아들임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대상 세계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 일련의 처리 작업과 함께 수용하지요. 그러한 받아들임에서의 형식 혹은 틀이 시간과 공간입니다. *저희가 다음 시간에 배울 칸트의 시공 개념은 <순수 이성 비판>에서 감성의 형식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맛보기로 말하자면, 이전까지 천체의 운동을 연역하여 외부의 객관성으로 생각되어온 시간 개념이 칸트에게서는 뒤바뀝니다. 시간은 의식 안에, 의식의 작동 안에 포함되어있지요. 시간은 의식 고유의 내면적 사태입니다. 감성에 주목하면 인간 주체는 선험적이지 않습니다. 능동성에서 시작하지 않죠. 건드려지고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됩니다. 주체 이전에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다! 들뢰즈는 이를 ‘수동적 자아들’이라고 불렀죠.
지성 혹은 오성은 감각을 통해 주어지는 잡다한 정보들을 종합하고 분류하고 범주화합니다. 여기서 주체의 종합하는 능동성이 발휘됩니다. 양, 질, 관계, 양태 이 4가지 범주마다 3가지씩이 나뉘어 총 12가지의 범주가 있다고 합니다. 지성의 작업과 더불어 이건 뭐다, 이건 어떻다 등의 표상이 생겨납니다. 상상력은 감성과 지성을 매개하는 능력입니다. 상상력은 상상하고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식을 만드는 능력schimatisation입니다. 이는 1차 추상화 과정으로서 지성에 전달하기 위해 정보를 가공하고 분별하여 알고리즘화합니다. 지성은 상상력으로 덧대지고 다듬어진 도식들을 처리하여 카테고리화합니다. 상상력의 지위와 운동은 수많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논의를 남기고 있다고 합니다.
이성은 네 번째 인식의 능력이자 최상위의 능력입니다. 이성은 사유하는 능력입니다. 사유는 인식과 다르며, 인식이 가닿지 못하는 것까지도 성찰할 수 없습니다. 이성은 일이관지, 인식한 것들을 통합하고 꿰는 능력입니다. 그렇게 꿰는 원리는 바로 이념(idea)인데요. 칸트는 이성이 작업할 때 그 활동이 향해가는 구심적인 궁극적인 차원들을 이념이라고 부릅니다. 지식들이 수렴되고 통합되는 체계화의 원리인 이념은 계속해서 이성에게 질문을 던지고 잡아끕니다. 채운샘은 칸트의 이념이 동양의 도道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인식의 발생에 직접 개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성은 그것을 따라가며 계속해서 인식들을 꿰려고 노력합니다. 그리하여 이성은 마음에 관한 인식을 성찰할수록 영혼이라는 지점을 향하고, 자연을 주파할 때는 우주로, 도덕과 가치를 탐구하는 일과 더불어 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영혼, 우주, 신은 이성의 궁극들, 즉 이념들입니다. 칸트는 영원히 이러한 궁극들로 이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성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성의 본성인 것이죠. <순수 이성 비판> 서문의 첫 문장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서는 특수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물리칠 수도 없고 그의 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