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시간에는 저희들끼리 낭송하고 맘에 와 닿는 구절을 서로 나눴습니다. 이번 주에는 『달라이라마,깨달음 말하다』 4,5,6장을 낭송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의 가치 그리고 죽음을 바라보는 불교의 관점에 대한 구절이었는데요, 수업 당일 가자지구에서 병원폭격 소식을 전해 듣고 인간의 잔인성과 무고한 죽음에 대한 여러 감정으로 텍스트가 더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무척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더 깊은 진리를 파악하고 소통할 수 있는 수행에 있어 꼭 필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업에 따라 육도(천신,인간,아수라,지옥,아귀,축생)를 윤회하지만 그 중 인간보다 더 좋을 거 같은 ”긴 수명을 가진 천신“도 인간보다는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유한함을 절실하게 깨닫고 성찰해야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다는 것, 인간만이 그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넘어갈 수 있다는 거죠. 그러고 보면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 어찌 보면 좋은 조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계 앞에서 한계를 논하고 그 한계를 넘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자세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이런 수승한 자재를 가진 인간의 전쟁에서 보여주는 극단적 잔인성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두 전쟁에서 인간의 잔인성을 보면 축생보다 못한 것 같아 분노와 연민이 올라옵니다. 근데 호정샘이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지금의 이 사태를 단지 영상과 정보로만 접하면서 단지 숫자와 자극적인 장면에만 호도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분노와 연민의 감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긴 합니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단지 올라오는 감정만을 표출하는 게 다 일 거 같지 않다는 겁니다. 공부하면서, 불교 공부하면서 불합리한 사회현상들을 맞닿아 분노와 비판밖에 쏟아내지 못한다면 공부한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건 공부 안 해도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인간사회에 있음직한 여러 현상들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유용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공부하면서 항상 고민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2년 남짓 불교공부를 하면서 나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다르게 보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글쎄요,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아 부끄럽기도 합니다.
작년에 효암스님께서 이태원참사 때 마냥 슬퍼만하지 말라며 건네주신 기도문이 있습니다. 바르도 기도문인데 죽음을 앞둔, 또는 죽은 이에게 읽어주면 좋다고 합니다. 『티벳사자의 서』의 약식버전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책상 앞에 붙여놓고 가끔 읽곤 하는데 그때마다 들뜬 마음이 가라앉곤 합니다. 분노의 감정은 잦아들고 희생당한 사람들이 좋은 길로 인도되길 바라는 마음만 순간 남게 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거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의 괴로움과 두려움의 상황은 죽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근데 “인간의 몸을 받아 불법을 만나고 스승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허송세월을 보내다간 죽음의 순간 빈손으로 떠나는 ‘거지꼴’을 면치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을 잘 관찰해서 “두려움으로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서운 마음이 들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익혀서 닦아야 한다.”라고 강조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자신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 역시 우리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낭비하는 것이다.”라고 따끔하게 경고합니다. 그럼 어떻게 익혀 수행해야할까요?
불교에서는 각자의 근기에 따라 세 종류의 길(상·중·하사도)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 세 길이 서로 대치되거나 우열을 나타내는 건 아닙니다. 궁극에는 모든 이의 깨달음의 성취를 바라는 보리심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수행해야 하지만, 이번 생에 처한 자신이 처한 조건에 따라 적절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점 역시 분명히 해둔 것이죠. 따라서 현생의 안락을 위해 수행하는 하사도를 향한 중생의 맘을 단순히 기복신앙이라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그 다음 생의 인연조건이 또 있을 테니까요.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강의 정리하면서 인간은 정말 분별하고 우열을 가리는 게 일 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두는 평등하다’라고 그렇게 강조하는데도 우리는 이게 낫네, 저게 못 하네 라고 논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로 그게 아님을 자각하려고 노력중이긴 합니다. 오후시간에는 그 따지기의 끝판 왕처럼 느껴진? 현대철학의 효시이자 대부인 칸트를 만납니다.
칸트...개인적으로 첨 접해보는 철학자입니다. 예전에 칸트를 모르고서는 현대서양철학을 논할 수 없다, 정말 위대한 철학자라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칸트는 본격적으로 마음에 대한 매커니즘을 종합적으로 설명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어떠한 매커니즘 속에서 표상을 산출해내는지를 본격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유식이 마음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요, 이 두 분야는 최근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칸트의 3가지 비판서, 순수 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중 이번학기 저희 주제인 시간과 관련해서는 순수이성비판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칸트가 인간의 인식능력의 작동메커니즘을 얘기하면서 시간을 어떻게 보았는지 설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먼저 칸트의 책을 읽을 때 두 가지 단어의 해석에 주의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칸트에게 ‘초월적’이란 개념은 초월적(transcetent),즉 신학적의미의 경험적 세계를 벗어난 의미가 아니라, 초월론적,초험적(trascentental),즉 범주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둘째, 칸트가 세 가지 비판서에서 얘기하는 비판(critic)이란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일반적인 비판이란 어휘와는 다릅니다. 어원은 그리스어 krinein(자르다.해부하다)에서 나왔는데요. 인식이 어디까지 가능하고 불가능한지 가능한 영역을 잘라내어 보고 해부해보는 겁니다. 칸트에게는 이것이 비판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욕하고 따지는 게 아니라 한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럼 칸트가 왜 현대철학의 효시라고 말할까요? 칸트 이전에는 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얼마나 정확히 재현하느냐의 차원이 진리였습니다. 인식이 있고,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을 정확히 인지하는 게 바로 인식의 역할이었습니다. 따라서 진리는 외부 대상세계에 있는 거죠. 하지만 칸트는 인간이 어떤 조건에서 대상세계를 인식하느냐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인간의 인식 조건을 통해 형성된 인식을 통해 대상은 우리에게 드러나는 겁니다. 인식 밖에서 조건을 찾은 게 아니라, 인식 안에서 원인을 찾았다는 점, 인식과 인식의 내용물, 원인과 결과가 서로 외재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현대철학의 출발점으로 본다고 합니다. 따라서 칸트에게는 주체의 인식능력이 얼마나 조화롭게 작동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칸트철학에서 항상 논란의 쟁점이 되는 것이 ‘물자체’라는 개념입니다. 칸트는 인식에 의해 출현되는 현상계 말고 뭔가 근원적인 세계를 상정해 놓은 듯 한데요. 그래서 오늘까지도 여러 철학자들이 이 개념의 해석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문제는 칸트가 이 물자체에 대해 딱히 뭐라고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인식 조건을 통해 출현시키는 현상계 말고 물자체가 있다?...그럼 우리는 진리, 근원, 신?의 경지의 세계가 외부에 있다고 당연 생각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칸트철학의 한계라고 폄하하게 됩니다.
채운샘은 이럴 때...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알 수 없다’라는 표현에는 ‘진짜 알 수 없다’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해석이 있다는 거죠. 칸트는 물자체에는 시공도 범주도 규칙도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식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거죠. 더 이상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거 같습니다. 있긴 있는데 더 이상 묻지 말아라, 나도 알 수 없다. 라는 뉘앙스입니다. 물론 칸트는 그럼에도 우리 외부 세계에 뭔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 있다 라는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칸트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핵심을 놓쳐서 안 됩니다. 칸트는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계가 주 관심사였습니다. 그리고 인식주체에서 시작했습니다. 나타난 것에 대해서만 얘기했고,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 조건(apriori)을 얘기했습니다. 기존의 형이상학과 대비되는 지점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출현시키는 것은 우리 인식 주체의 매커니즘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칸트는 신학적 환상, 신학적 형이상학, 기존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독단론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스스로를 논하기도 했습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설명하는 현상계를 파악하는 인식능력들(function)에는 총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감성’은 외부의 정보를 처리하면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처리의 형식으로서 시간과 공간이 개입된다. 그 이전에 시간은 우리의 인식주관과 별개로 외부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둘째, ‘지성’은 감성의 잡다한 정보들을 능동적으로 종합하여 범주화합니다. 범주화에는 총12가지이며 양,질,관계,양태, 4가지 범주로 나뇝니다. 셋째, 감성과 지성 사이 이 둘을 매개해주는 ‘상상력’이 있습니다. 이는 도식화의 과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주화를 통한 의미화 작업 이전에 1차 가공, 즉 정보들을 기계적으로 분류하는 작업으로 이해됩니다. 상상력이라는 이 인식능력은 칸트 이론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 해석이 다양하여 논란이 많다고 합니다. 넷째, ‘이성’은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사유 능력의 핵심입니다. 사유한다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알게 된 것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통합하고 체계화하게끔 하는 원리가 Idea입니다.
칸트에게 또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이 이념(idea)입니다. 이념은 계속 질문하게 하는 대전제입니다. 이성이 계속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지평입니다. 칸트는 늘 조건을 얘기합니다. 위에서 얘기한 인식의 능력들도 근본적으로 이들을 작동하게끔 하는 것이 있는 거죠. 이념에 대표적인 것으로 영혼, 신, 우주가 있습니다. 이 3가지는 우리를 포괄하는 거대한 세계이며, 인간을 초월하는 것으로써 우리에게 물음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 계속 사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념(idea)은 이성의 조건이며 형식입니다. 이처럼 질문하고 사유하게 하는 것이 이성의 본성이자 힘입니다. 경험적 차원을 넘어 궁극의 차원을 향한 끊임없는 의구심은 계속 우리를 이성의 힘으로 사유하게 만듭니다. 물론 답은 없습니다. 그 답도 없는 질문을 한다는 것...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칸트는 이렇게 인식에서 출발했던 거 같습니다.
2주후에도 역시 칸트에 대해 강의해 주십니다. 그 전에 나눠준 순수이성비판 머리말, 해제, 시간에 대한 부문을 읽고 오는 것을 숙제로 주셨습니다. 후기 쓰기 전 머리말을 대충 읽어봤는데요. 이해하긴 어렵지만 채운샘 말대로 의외로 감성적인 따스함이 느껴지더라구요. 칸트에 대해 잘 모르면서 오해 아닌 오해도 있었는데 이번을 계기로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후기가 좀 난삽하죠? 올 해 마지막 후기라 양과 질에 구애받지 않고 맘대로 적어봤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음을 잘 관찰해서 “두려움으로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서운 마음이 들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익혀서 닦아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직면하지 않을 수 있도록 갖은 방도를 마련해 놓은 것처럼도 보입니다(베르그손은 그런 방어기제가 생명의 작업 중 하나라고 합니다만).
'내가 사라진다고?!' 이 문제를 절절히 깨닫게 하는 의례 혹은 사건들이 역사 속의 모든 사회에는 마련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요.
빈손으로 가지 않기 위해, 겁에 질려 빠르게 다음 생으로 도망쳐 윤회하지 않기 위해는 정말 훈련만이 의지처인 것 같습니다.
양과 질에 구애받지 않은 후기 아주 재밌게 유익하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