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시간(11.1) 공지드립니다.
1) 낭송 텍스트 <달라이라마, 깨달음을 말하다> 9~10장(235~291쪽)을 읽고 옵니다.
2) 강의가 있는 주입니다. 이번에도 칸트의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받은 <순수이성 비판> 프린트를 읽고 옵니다.
3) 후기는 최윤순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4) 간식은 김자영 선생님과 정은이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불법승 삼보라는 귀의처
이번 시간에는 <달라이라마, 깨달음을 말하다>의 7장과 8장을 낭송했습니다. 7장에서는 우리가 귀의하는 대상인 불, 법, 승의 의미와 보배로움에 대해 말씀하시는데요. 경전이나 설법이나 다짜고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합니다’라는 멘트가 등장하는데, 그래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질문하지도 답을 듣지도 못하다보니 이런저런 의문이 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차분하고 명료한 설명을 따라가면서, 저희는 그간 품어온 ‘귀의’에 대한 의구심과 반감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명료하지요.
“우리의 스승 석가모니 붓다께서는 많은 생에 걸쳐 무수한 스승 아래에서 배우셨다. 그리고 불법의 진리 수행이 당신을 깨달음으로 이끄셨다. 따라서
불법이 진짜 귀의처이며, 붓다들은 귀의처의 스승이시고, 승가는 귀의처의 동료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깨달으신 분들은 우러른다면, 그분들을 깨달음으로 이끈 그 힘을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192쪽)
흥미로웠던 점은 진짜 귀의처는 불법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깨달음 자체입니다. 이것이 제1목표이지요. 하지만 그것을 정말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길을 실제로 간 존재들을 스승으로 모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경심은 그들이 깨달음에 이르게 한 배치이자 동력원인 승가를 향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세 가지 보배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합당한 이유에서 귀의처인 것입니다. 단, 이제 문제는 이 시대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고통이 우리에게 펼쳐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어떤 스승과 조건이 거기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지를 면밀히 분석하는 일이 필요한 듯합니다. 불법 자체가, 깨달음이 무엇인지가 질문되어야 하지요. 문제는 믿음에 고집이 들어가 듣지를 못하는 상태죠. 이어지는 말씀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불법 혹은 가르침은 맹목적으로 믿거나 따라야 할 일련의 가르침이 아니다. 불법의 수행은 반드시 논리와 궁리에 기반을 두고 실천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수행의 한 부분이나 교리를 맹신한다면, 잘못된 논리를 가지고 받아들여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은 교리와 논리 사이의 모순을 발견할 때 언제나 논리를 우선으로 한다.”(192~193쪽)
미시세계 : 결정론이 무너진 세계
오후 세미나에서는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4, 5, 6장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난 시간이 거시 세계에 대한 과학사의 개괄이었다면, 이번에는 미시세계의 발견들을 탐구하빈다. 여기서 미시세계란 원자보다 더 작은 세계로, 방사선을 비롯한 소립자들의 운동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한 2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합니다. 자세하고 꼼꼼한 발제문들이 불교 숙제방에 올라와있으니 참고해주세요! 자세한 내용은 호정샘의 후기를 읽어주시고, 저는 여기서 마음에 남은 몇 가지 개념들과 의문점들을 아주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과학은 그것의 출현 이후로 결정론의 방향으로 치달아 갔습니다. 언어와 논리, 인과법칙과 수학에 힘입어 “결정론은 20세기 초까지 과학의 가장 표준적인 가정이라는 지위를 누렸다”(68쪽)고 합니다. 하지만 그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와 더불어 그 기차는 탈선하고 맙니다. 불확정성의 원리의 정식은 ‘관측 자체가 교란’이라는 것입니다. 결정론의 핵심은 과거 혹은 현재의 상태로부터 미래의 상태를 확정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상태’란 공간상의 그 물체의 위치이죠. 다음 위치의 예측을 위해서는 어쨌든 현재의 위치와 속도(운동량)를 알아야만 합니다. 즉 관측해야죠. 눈에 보이는 물체나 천체들을 관측하는 일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립자의 세계로 내려가면 달라집니다. 관측의 수단은 빛을 쪼여서 산란시키는 일인데, 진동수가 높은 빛을 쪼이면 위치는 정확하나 속도가 불확실해지고, 진동수가 낮은 빛을 쪼이면 속도는 정확해지나 위치가 불확실해집니다. 측정 자체가 측정되지 않는 영역을 양산한다니. 결정론이 설 자리는 위태로워진 것입니다. 결정성을 찾으려는 순간 비결정성이 볼록 튀어나오니까요.
하지만 의문이 들죠. 측정한다는 행위, 예상하고 계산한다는 행위가 사물의 인과 연기에 영향을 준다면, 그런 예측과 관측의 시도조차도 전체의 인과 행위 안에 들어 있던 것 아닐까요? 측정을 위해 쪼이는 빛과, 거기에 반응해서 운동량과 위치를 바꿔대는 소립자, 그리고 측정하기로 마음먹고 불확정성에 당황하는 과학자, 또한 이렇게 몽상을 이어가는 저 자신 또한 한 덩어리로 엮여서 흘러가고 있는 것 아닌가... 모든 개체들의 심리작용 및 자잘한 사고 조각들까지 인과계열장 속에 들어서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전체 인과를 누가 알고 있을까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신이 아니고서는. 결정론을 버리지 못하는 한 언제나 초월자의 관점을 전제하게 되는 것 같네요. 호킹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미시계와 거시계의 모든 현상을 포괄할 ‘대통합 이론’을 만들려는 것은 그런 관점을 구연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일까요?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들이 어떤 면에서 파동과 흡사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입자들은 분명한 위치를 점하고 있지는 않지만, 특정한 확률분포로 ‘퍼져 있다’는 것이다. 양자역학 이론은 실세계를 더 이상 입자와 파동이라는 개념으로 기술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인 수학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다. 양자역학은 그러한 개념으로 기술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관찰들일 뿐이다. 따라서 양자역학에는 파동과 입자 사이의 이중성이 존재한다.”(73쪽)
불확정성의 원리는 더 나아가 물질의 파동-입자 이중성으로 확장됩니다. 빛이 파동이면서 입자인 것은 알겠지만, 질량을 가진 전자와 같은 입자도 파동적 특징을 갖습니다. 관측하지 않고 있을 때는 제 궤도 영역 전체에 파동처럼 편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위치와 속도가 확정되지 않은 채 뿌옇게 남아 있지요. 그런데 대체 그것들을 언제 입자로 언제 파동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그리고 어느 정도 크기의 입자들부터 이중성을 고려할 수 있을까요? 전자는 되지만 양성자나 중성자 혹은 원자 자체도 파동으로 기술할 수 있을까요? 고양이나 인간 혹은 별은 왜 양자역학적이지 않은 걸까요? 이런 것들은 정말 규모의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입자의 크기가 빛의 파장보다 커진다면, 교란은 작아질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시계의 불확정성을 정교한 장치로부터 거시계로 확장시켜놓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고양이는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세계는 평행우주로 갈라질 것인가...
저희는 표준모형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입자의 측면에서 세계를 기술하는 방법이지요. “우주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입자는 두 그룹으로 나뉠 수 있다”(89쪽)고 합니다. 하나는 물질입자들(쿼크와 렙톤)이고 하나는 힘 전달입자들(글루온, 보손, 광자, 힉스)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아는 입자다운 입자, 질량을 가지고 서로 중첩되어 붕괴될 수 없는(배타 원리를 따르는) 입자들은 물질입자입니다. 힘 전달입자들은 말하자면 가상입자로 배타 원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 입자들은 물질입자들 사이에서 교환되는데, 그 숫자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힘 입자들이 흡수되고 방출될 때마다 물질입자들의 속도는 달라집니다. 즉 힘을 일으키는 것이죠. 그것이 측정 가능한 효과이기에 힘 입자들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높은 질량을 가진 힘입자들(글루온과 보손)은 근거리에서만 작용하고, 질량이 거의 없는 힘입자들(광자와 중력자)은 멀리까지 작용한다고 합니다.
스핀, 반입자, 대칭성, 블랙홀, 사건의 지평선, 우주검열관 가설 등 그거 하나만 가지고도 길고 길게 떠들고 싶은 개념들이 나왔지만 시간과 앎의 부족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했습니다! 호정샘 후기를 기대해주시고, 다음 토론에서 또 재미나게 블랙홀 이야기를 해보길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