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업과 악업
지난 시간에 삼귀의와 업의 법칙에 대한 부분을 낭송했었는데, 십억 생을 다시 태어나도 업의 종자는 힘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적당한 조건이 일어나면 반드시 실현된다고 한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시험 전날 당일치기하던 습관이 지금은 많이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해야 할 일이 어렵다고 느껴지면 최대한 미루던 습관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시간들을 경험하는 한 주였습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괴로움의 원인을 악업과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악업은 결과가 괴로움인 모든 행동이고 선업은 결과가 즐거움인 모든 행동입니다. 살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은 마음에 업의 씨앗을 심습니다. 이 업의 종자는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가 알맞은 조건이 갖추어지면 결과로 발현합니다. 무르익은 업이 선한 것이면 즐거움을 경험하고 악한 것이면 괴로움을 경험합니다. 선업은 더 나은 선업을 부르고 악행은 더 악한 행을 부릅니다. 선행은 언제나 기쁨을, 악행은 언제나 괴로움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것이 즐거움이고 괴로움이냐는 거죠.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회마다 그 기준이 다르고, 같은 사회 안에서도 개인마다 느끼는 바는 다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선행이고 악행인지 헷갈립니다. 경아샘 말대로 어떤 것을 선과 악으로 실체화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업을 반복하는 일일 것입니다.
불확정성 원리
2교시에는 불확정성 원리, 소립자와 자연의 힘들 4가지(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 블랙홀에 대한 부분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잘 모르거나 이해 안 되는 것들을 꺼내놓으면 더 많이 알거나 이해한 분들이 설명을 해주면서 관련된 이야기들을 보태는데, 내용을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한 번의 독서로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렵겠죠. 이번엔 불확정성 원리와 관련된 제 소감 정도를 쓰는 것으로 후기를 작성하겠습니다. 블랙홀은 담주에도 내용이 이어져서 그때 마저 이야기하는 것으로.
20세기 초까지 위치와 속도를 안다면 뉴턴의 법칙을 이용하여 다른 시간에서의 태양계의 상태를 계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과학적 결정론이 대세였습니다. 현재의 위치와 속도를 알기 위해서는 측정을 해야 합니다. 1926년 하이젠베르크는 어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둘 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합니다.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려 할수록 그 속도는 덜 정확하게 측정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재면 그다음 순간 입자가 훌쩍 먼 곳으로 큰 운동량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결정론적인 우주 모형에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이 원리를 기반으로 1920년대에 하이젠베르크, 에르빈 슈뢰딩거 그리고 폴 디렉은 기존의 역학을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재정식화시킵니다. 이 이론에서 입자들은 더 이상 분리되고 명확하게 정의된 위치와 속도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입자들은 위치와 속도의 조합인 양자상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양자역학에서 우리는 지금 입자의 위치를 알아도 잠시 후의 입자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입자가 그 위치에서 발견될 확률만 예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양자역학의 예측은 확률적이기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은 과학에 예측 불가능성 또는 임의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요소를 도입시킵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말은 형용모순 같습니다. 유수의 과학자들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여 발견한 ‘원리’에 ‘불확정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몹시 ‘안’과학적으로 느껴지는데, 그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과학자들의 자신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물리학 책을 더듬더듬 읽어나가면서 드는 생각은 과학이 내가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겁니다. 과학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법칙을 발견하고 그 과정을 과학적인 방법을 거쳐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모든 것에 적용되는 법칙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하고, 아는 범위 안에서 작동하는 원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 범위 내에서 예측을 하는 학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세상 만물이 이렇게 다 다른데, 모든 것에 일률적으로 작용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법칙이야말로 예외적인 것이 아닐까 싶네요. 생명은 다 태어나고 죽는다는데, 그렇지 않은 생물도 있다고 합니다. 홍해파리는 외부 힘에 의해 죽을 수는 있어도 노화에 의해 죽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늙어 죽지는 않는 것이죠.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했던 생사의 법칙에도 예외가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내가 아는 것들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것이 과학적이지 않은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