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복판, 불교+철학의 여정도 어느새 반이 넘어갔습니다. 우선 세 번째 시간(8/9) 공지부터 드립니다.
1) 오전 낭송 텍스트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7장을 읽고 옵니다!
2) 오후 세미나 텍스트 <의식의 기원> 4, 5, 6장을 읽고 옵니다. 발제는 이기웅 선생님과 최윤순 선생님께서 써주시겠습니다.
3) 간식은 김자영 선생님과 김호정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김호정 선생님께서 써주시겠습니다.
자아는 어디에 : 오온, 마음, 명칭
이번 주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의 내용들은 쉽지 않았습니다! 석학들과 달라이 라마 간에 이어진 대화인 ‘마음과 삶’ 모임은 잠에서 죽음으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정점을 찍은 것 같습니다. 자각몽과 관찰몽에 관한 토의는 꿈의 요가 및 의식의 단계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강의로 이어졌습니다. 자아의 본성이나 청정이나 극미세의식 등의 용어가 나오고 죽음과 바르도와 환생을 넘나들며 설해주신 이야기들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낭송하는 시간도 길어져서 토론 시간이 거의 없기도 했지요. 그래서 여기서는 달라이 라마의 꿈의 요가 강의 중 가장 난해하면서도 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한 가지, ‘자아’에 대한 설명을 잠시 리마인드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불교 외의 문헌들에 따르면 자아는 심리/신체 구성 요소인 오온(五蘊)aggregates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불교 내의 4대 철학파 모두 자아의 존재를 오온과 분리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그러나 자아가 몸과 마음의 집합체인 오온 사이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섯 가지 심리/신체 집합체인 오온을 자아로 주장하는 학파가 있는가 하면, 자아를 마음과 동일시하는 학파도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방식 내에서도 또 다양한 관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제 말씀드린 바 있듯이 의식이 자아라고 주장하는 학파가 있습니다. 유식학파의 경우 알라야식이 자아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프라산기카 중관파의 이론을 살펴봅시다. 이 학파는 오온을 자아에 의해 경험되는 것으로 봅니다. 오온이 자아에 의해 경험되어지는 것이므로 자아를 오온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즉, 경험 대상과 경험자가 결국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자아는 오온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를 오온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게 되면 그 자아라는 것을 찾을 곳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이 주장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프라산기카 중관파에서 도출해낸 결론은 자아는 오온에 근거하여 드러나는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프란시스코 바렐라,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170~171쪽)
정말 쉽지 않습니다. 오온은 유위법인 색수상행식으로 이루어진 심리/신체 집합체라고 이야기됩니다. 이 간단해 보이는 문장조차도 사실 하나하나 질문해 들어가자면 어마어마한데요. 비불교도 혹은 외도로 불리는 학파들은 모두 자아를 이러한 오온의 집합 이상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색수상행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몸으로도 이 개체성과 이 의식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진짜 자아(참나, 푸루샤)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죠. 불교는 이런 영원불변한 자아 개념과 결별하였지만, 그럼에도 사성제에 맞춰 고통을 경험하고 고통을 끊는 개인이라는 의미에서의 현실적 자아의 본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과제는 남아 있었습니다. 즉 자아가 오온과 분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실재하는가 하는 의문인데요. 이는 학파별로 다르게 발전했습니다. “오온을 자아로 주장하는 학파”는 설일체유부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일체법을 지수화풍의 낱낱의 요소들로 나누어 바라보고, 또한 식조차 심왕과 심소로 분석하여 그것들의 동시 작동(구기)가 곧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자아를 마음과 동일시하는 학파”의 경우는 경량부와 유식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학파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구분되는 심소들의 구기가 아니라 상속되어 이어지는 질적 이행을 말하는 경량부나 모든 것을 식에 비춰진 반영으로 보는 유식에서는 자아란 결국 마음의 연속적 운동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이때의 ‘마음’은 오온 중에서도 특히 색과 수가 아닌 상, 행, 식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라이 라마가 가장 수승한 사유로 여기는 프라산기카(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는 자아를 어떻게 볼까요? 자아는 오온 자체도 아니고 오온의 특별한 영역인 의식도 아닙니다. 오온과 분리되지는 않으면서 오온 자체도 아니고 오온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닌 자아. 거꾸로 오온이야말로 “자아에 의해 경험되는 것”입니다. 자아는 오온이라는 경험 대상의 경험자가 됩니다. 오온이 경험되고 있을 때라야 그것을 경험하는 무언가를 자아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명명 없이 자아는 없습니다. 자아는 특정한 거처나 내재적 본성이나 정체성을 모르기에, 결국 “자아란 오온에 근거하여 드러나는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논의입니다만, 나중에라도 다시 돌아와 곱씹어볼 기회가 있길 바라며 정리되지 않는 것을 정리해보았습니다.
과거라는 시간성 : 의근과 기억 원뿔
3학기 두 번째 강의의 주인공은 베르그손이었습니다. 올해 들어 운 좋게도 베르그손 세미나를 이어가고 있는데, 불교 공부에서 만나니 더 반갑고 뜻 깊었습니다. 인간의 내면과 의식을 탐구해 들어가다보면 같은 곳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것도 같습니다. 베르그손 사유의 많은 변주들 중에서도 베르그손에게 계속 반복되는 주제는 ‘물질과 정신’입니다. 그래서 베르그손의 3대 저서 중 한 권만 읽는다면 <물질과 정신>(1896)을 추천하신다고 채운샘은 말씀하셨죠. <시론>(1889)이 어떻게 의식이 지속 속에 존재하는가를 탐구한다면, <물질과 기억>은 물질-이미지 속에서 기억이 어떻게 의식을 종합해 내는지를 밝히고, <창조적 진화>(1907)는 생명 진화의 노정에서 의식이 어떻게 지성이라는 능력을 개화시켜냈는지에 대한 방대한 분석이 이어집니다. 물론 이 모든 사유에서 핵심으로 등장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의식은 어떻게 시간 속에서 구성되는가 혹은 시간이 어떻게 의식과 더불어 펼쳐지는가에 대한 문제 말이죠.
의식의 작동에 대한 탐구의 역사를 거칠게 요약하면, 먼저 단순히 ‘신체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이라는 뜻으로 쓰이던 내면interia 혹은 영혼을 아우구스티누스가 보다 더 실체화하여 분석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영혼을 더 특권화하여 신과의 연결고리가 되는 영역으로 삼았고, 데카르트에 이르러 의심될 수 없는 명석 판명한 코기토-자아가 등장합니다. 데카르트는 의식을 대상 세계 낱낱을 비추는 점들의 합으로 보았습니다. 부분들의 합으로서의 의식이죠. 흄은 의식이 단순한 합이 아닌 그 감각과 관념 다발들의 역동적인 연결-연속으로 봅니다. 즉 정신이 ‘그리고’(and)로 엮이며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죠. 이것이 그 유명한 ‘관념연합론’ 베르그손은 이를 비판하지만, 지난번 강의에 등장했던 윌리엄 제임스는 이 연합을 침투로 바꾸어 “의식은 흐름이다”라는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하나가 사라지기 전에 하나가 더해지는 방식으로 상호 침투하는 과정이 의식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베르그손은 한 발 더 들어갑니다. A와 B를 ‘and’로 연결시키기 위해서조차 무엇인가가 전제되어 있어야 하죠. 그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의식은 시간의 흐름이고 동시에 시간은 바로 의식이 종합하는 결과입니다. 그리고 의식의 종합원리이자 변형 중인 데이터베이스인 그 시간이 바로 기억이고 과거입니다. 운동-물질의 평면 위로 부풀어있는 그 원뿔-과거 말이죠.
물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베르그손에게 놀라운 점은 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물질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분명 물질은 정신과 똑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원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질과 정신 둘이 서로를 전제한다는 데에서 출발해야겠지요. 베르그손에게 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입니다. 이미지라고 하면 저희는 보통 바깥에 있는 대상들에 대해 형성한 내적인 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재에 대해 2차적인 무엇 말이죠. 하지만 베르그손에게 이미지는 실재도 아니고 가상도 아닙니다. 실재인 동시에 가상이기도 하지요. 물질 세계는 이미지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수많은 신체body들 중 가장 특권적인 것은 모든 느낌이 즉각적으로 작동하는 나의 신체입니다. 나의 신체는 시시각각 다른 신체들과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면, 주변의 신체들을 자신의 유용성과 욕망에 기반해 특정한 방식으로 포착해내는 것(취하는 것=끊어내는 것=절단해내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이를 절단-채취라고 했는데요. 이는 의식이나 분석이나 판단 이전에 일어나는 일로서, 그런 상호작용 일체가 바로 끊임없이 이미지들의 단면을 만들어냅니다. 즉 이미지는 물질의 단면입니다. 불교의 용어로는 ‘촉’(觸)이죠. 촉과 더불어 수상행식이 나오듯, 이미지들의 독특한 구성과 배열 속에서 지각과 정서와 의지와 의식이 출현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의식과 정신을 논하는 베르그손 철학은 우선 물질에 기반해 있으며, 불교 역시 아무리 마음을 핵심으로 삼아도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기억의 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사실 신체들의 상호작용과 이미지들의 배열은 아무리 신체들의 유용성을 반영한다 해도 그 자체로는 깜빡깜빡 명멸하는 현재적 지각밖에는 형성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곧 잃어버리고 말 현재적인 나타남과 반응에 불과하지요. 이런 지각들이 중첩되고, 거기에서 인과를 짜고, 유사성과 차이를 발견하고, 피하거나 취해야 할 나름의 목록을 형성하면서, 즉각적인 반응에 비결정성을 도입하며 유보하는 일, 즉 지각이 의식적이 되는 일에는 기억이 필요합니다. 즉 휘발되지 않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 개입되는 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의식은 지각에 기억이 더해지기 시작하면서 나타납니다. 기억은 시간이고 곧 역사죠. 즉 한쪽에서 부풀고 있는 과거-기억이 돌아와야 합니다. 그럴 때 지각은 순수하지 않게 되고 언제나 과거의 데이터들과 더불어 현재를 맞이합니다. 현재의 이미지-운동 평면은 기억이라는 원뿔과 더불어 구성되고 있지요.
의식의 구성원리로서의 베르그손의 기억은 불교에서 말하는 의근과도 비슷합니다. 안이비설신이라는 오근은 대상과 접촉해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역량(감각기관 이상의)이지만, 그것의 감각 작용을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자극에 그치지 않도록 연결짓고 의미화하고 해석하는 일은 의근이 더해져야만 가능합니다. 의근은 일종의 데이터 메모리 센터로 식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매 찰나마다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전 찰나의 의근은 다음 식의 작용이 계속 이어지게 하는 조건인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니까요). 의근 없이는 사실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지 모르므로 다른 근들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기억에 의해 종합되는 의식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지각이 실재가 아니라 권리상으로만 존재할 수 있음과도 같습니다. 모든 지각에는 이미 의식이, 곧 시간-과거가 개입되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저는 기억 원뿔 자체의 역동성에 관한 이야기가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베르그손에게 과거는 영원히 보존되지만 원본 그대로 정적으로 보존되지는 않습니다. 아니, 설령 손상이나 변형 없이 보존된다 해도, 그것이 현재의 지평 위에서 불려나오는 방식 자체가 동일할 수 없으며, 그렇게 구성되는 현재가 또 다시 과거로 넘겨져 기억 원뿔을 부풀리기 때문에, 기억 원뿔 전체는 단 한 찰나도 동일한 채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물질로서 상호작용하고 있는 한 원뿔 자체의 조성은 변합니다. 기억 역시 상호침투하는 지속의 장을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죠. 과거 자체의 회전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지는 윤리적인 혁신을 제공합니다. 채운샘께서 들어주신 예처럼, 우리가 한 사람의 모든 행동 경로와 패턴을 데이터화했다고 해서 다음 순간 그 사람의 행위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원뿔은 이미 다른 조성으로 돌고 있고, 물질의 평면 역시도 그 지속 속에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배치를 이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심층 의식과도 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살던 대로의 삶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숨막히도록 무거운 업이 떠넘겨지고 있어도, 999명을 살해했더라도, 돌아오는 이 순간은 아직 예정되지 않은 이탈이 일어날 수 있는 장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벌어지는 행위가, 1000명의 살해를 완성하느냐 아니면 거기서 돌아서느냐 하는 행위가 그 이전까지의 과거 전체를 뒤바꿔버립니다. 역사는 다른 색을 띠고 나타납니다. 현재의 행위는 과거의 행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목놓아 외쳤던 “과거 일체를 구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끔찍한 삶을 다시 살겠느냐는 질문에 ‘YES’라고 말할 때, 과거는 전과는 다른 조성 다른 색채로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베르그손의 의식 탐구는 바로 이 감격적인 가능성을 열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