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전시간에는 『달라이라마의 대화』 책을 강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잠, 꿈, 죽음에 대한 서구과학과 불교의 입장을 여러 각도에서 다채롭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4,5,6장을 같이 읽고 얘기 나눴습니다. 날도 덥고 시간이 여의치 않아 토론 시간은 짧게 진행되었습니다. 못 다한 얘기는 저의 짧은 단상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아직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잠, 꿈, 죽음이라는 극히 수동적이고 정적인 상태들이 굉장히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겉보기에 활동을 멈춘 상태이지만 실제로 과학적 수치나 불교에서 경험으로 파악한 바로는 우리가 깨어있는 상태 못지않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의지하고 욕망한다는 겁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분명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3분의 1을 잠으로 흘려 보내왔고,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꿈에 뒤척여왔으며, 죽음의 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지만,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뭔가 할 수 있음에 의지가 불끈 솟는 건 왜일까요?ㅎㅎ
수면 중 자각몽은 이런 적극적인 자기 성찰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꿈을 꾸는 내용을 인식하고 변화시켜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는 연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겁니다. 깨어있을 때 놓쳤던 부분을 꿈 속에서 다시 되뇌이며 자신을 변형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각몽은 어찌 보면 수행차원에서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관찰몽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자각몽이 1인칭이라면, 관찰몽은 3인칭입니다. 나를 멀리서 지켜보는 겁니다. 관찰몽은 꿈과 분리되어 조용하고 평화로운 내면 의식을 경험하는 꿈을 말합니다. 어찌보면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인 거 같기도 합니다.
죽음에 대한 서구세계의 인식이 변화한 지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점 관점이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는데, 1800년을 전후해서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나 자신의 구원이 가장 중요합니다. 고로 나의 죽음에 집중합니다. 근데 기독교가 희미해지면서 나 자신의 죽음보다는 타인의 죽음에 더 많이 집착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깊은 슬픔을 유발하게 되는 거죠. 그 전에는 하느님을 통해 너도 나도 모두 구원받고 하늘에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 그리 슬픈 광경은 아니었을 겁니다. 기독교의 쇠락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이별, 죽음은 끝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죽음을 더 큰 슬픔으로 확대해석해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불교에서는 잠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잠은 죽음의 축소판이 되는 거겠죠. 잠과 죽음은 인간에게는 당연한 귀결인 거 같지만 충분히 뭔가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는 세계임에는 틀림없는 거 같습니다.
2. 오후시간에는 베르그손이 말하는 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채운샘이 강의해주셨습니다. 베르그손의 독특한 점은 의식을 발생적 차원에서, 발생의 메커니즘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내면, 정신, 의식은 단순히 신체로 환원되지 않는 것, 내지는 주체가 대상을 포착한 것의 단순한 ‘합’이 의식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었죠.
베르그손은 먼저 의식을 논하기 전에 물질을 얘기합니다. 의식은 물질을 떠나 생성될 수 없다는 거죠. 베르그손에게 물질이란 이미지들의 총체입니다. 한마디로 물질은 이미지란 겁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신체(BODY)가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 상호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유용한 방식으로 서로의 신체를 절단, 채취하게 되는데, 그 절단하는 행위가 지각이고 그것의 결과로 드러난 것이 이미지입니다. 서로 상호작용하며 끊어낸 물질의 단면이 이미지인 것입니다. 세계는 그런 이미지들의 총체가 되는 것입니다.
지각한 것이 의식되려면 기억이 더해져야 합니다. 지각은 현재적 차원에서 드러난 것인 반면 의식은 지각에 기억이 더해져서 나타난 것입니다. 현재의 지각과 과거의 기억이 맞물려 미래?의 의식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은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각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각한다는 것은 내 신체가 대상인 신체를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간단하고 명료하게 절단 채취하는 행위입니다. 지각은 저장되지 않고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번복합니다. 과거의 기억, 경험이 현재의 지각과 맞물려야 우리는 현재의 사건을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 의식의 형성이 신체의 상호작용에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신체와 신체가 마주치는 지점에서 의식은 발생합니다. 의식이 먼저 있고 대상을 비추는 게 아니라, 신체와 의식, 물질과 정신은 동시발생적이고 내재적이라는 겁니다. 베르그손에게 의식은 과정이며 활동입니다. 지각정보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전의 기억과 함께 계속 재구성하는 활동이 의식입니다.
의식의 이러한 역동적 활동은 우리들의 의식을 속이기도 합니다. 감정상태를 양화하거나 비교하는 건 우리의 익숙한 습관입니다. ‘너무 기쁘다, 더 슬프다, 아주 힘들다’...이런 표현들은 진짜 사실일까요? 실제로 감각의 변화추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정은 양적이 아닌 질적으로 변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쁨이란 감정은 미래로 열려있는 기대감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감정을 양적인 단어로 규정짓는 이 습관은 사실 유용성의 입장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생명은 생존이 우선입니다. 살기 위해선 빠른 인식이 필요했고, 양화하는 습관이 가장 유용했던 거죠. 근데 그러한 습관적 인식이 우리를 얽매이게 합니다. 살기 위해 인식했는데, 역으로 그 인식으로 인해 살맛이 나지 않는 거죠. 인식의 늪에서 자유롭지 않은 겁니다.
실제 세상은 질적으로 변화합니다. 근데 우리는 양적으로 인식하기가 쉽습니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고착된 인식에서 자유롭기 위해 우리의 의지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습관적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베르그손은 원뿔도식에서 기억의 지층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기억에도 깊이가 있다는 겁니다. 습관적 인식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가까운 지층에 분포하지만, 우리가 진정 노력해야하는 건 심층기억, 무의식, 보다 광범위한 기억의 지층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편리하다는 핑계로 얕은 기억의 지평을 오가기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을 해석하는 도구가 편협하게 됩니다. 하지만 보다 넓고 깊은 기억의 심층을 가져와 다양하게 지금 내가 겪는 사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삶은 더 살만하게 될 수 있는 거죠. 기억의 지층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것이 진정 베르그손이 말하는 자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베르그손의 이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인식메커니즘은 확실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는 거 같습니다. 인간이 지각하는 지점에만 머문다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거 같습니다. 그건 자동적으로 우리 신체가 알아서 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기억이 개입되어 인식하는 지점에서 우리의 의지가 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인식은 신체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체와 정신, 물질과 기억은 이처럼 둘이지만 하나처럼, 하나처럼 보이지만 분명 제각각 기능을 가진 것으로서 기능하며, 동시적이고 복합적인 협력체계입니다.
이러한 협력체계는 결국 열린 미래를 나아갑니다. 결정되어 있는 건 없는 거죠. 기억은 저편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을지라도 서로의 경험치에 따라, 각자의 기억을 끌어올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우리의 의식은 얼마든지 무한변수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열려 있게 됩니다. 베르그손에게 이처럼 시간은, 기억은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베르그손의 철학은 불교철학과 비슷한 지점이 많다고 합니다. 유식에서는 식을 8가지로 구분하고 있는데, 그 중 제8식인 아뢰야식은 베르그송의 심층의식과 맞닿는 지점이 있습니다. 아뢰야식이나 심층의식은 모두 개인의 기억, 인간의 기억, 생명의 기억을 모두 보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프로이트 무의식처럼 억눌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의식으로 올라올 수 있는 잠재태입니다. 불교에서 6근 중 의근을 과거기억의 총체로 규정한다면 이 역시 베르그손의 심층기억과 맞닿는 지점이 있어 보입니다. 의식이 물질세계의 상호작용 안에서 발생한다는 점은, 오온 중 색과의 접촉에서 모든 마음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될 수 있습니다.
의식의 활동 출발점이 신체의 촉이라는 점을 쉽게 잊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반대로 의식(정신)이 신체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서 자꾸만 정신으로 계획했지만 행동으로 실천이 안되는 반복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의도적으로 신체로 계획하고, 정신으로 행동하기 방향으로 가야겠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에게 당장 유용한 개념들이라는 느낌만 들었는데, 샘 후기를 읽다 보니 우리에게 좋은 의식의 활동 방향과 신체의 활동 방향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기억을 소환하는 게 아닌 기억이 창조되는 것을 체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