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뒤돌아서기도 전부터 잊어먹는 일이 많아 공지를 여러 번 찾아 봅니다. 저같은 분들이 혹여라도 있을까 하여, 우선 다섯 번째 시간(8/16) 공지부터 올립니다.
1) 오전 낭송 텍스트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8장, 에필로그를 읽고 옵니다!
2) 오후는 채운샘 강의가 있습니다. 그래도 다음 주 세미나 텍스트 <의식의 기원> 2권 1~3장을 천천히 읽기 시작합니다.
3) 간식은 김경아 선생님과 이기웅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최윤순 선생님께서 써주시겠습니다.
대략 난감입니다. 몸과 정신이 ‘대략난감’이라는 이름 아래 대동단결하여 한 주를 웃프게 보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들을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찡찡댔는데 하필 후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쓰기도 전부터 한숨이, 에휴. 게다가 땀띠로 추정되는 피부 발진이 하필 앉는 부위에 생겨 며칠째 잠시 서 있다가, 주로 엎어져 있다가, 무릎 걸음으로 앉아 있다가 하면서 휴식인지 벌인지 모를 자세로, 책을 들었다 놨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습니다. 제게는 항상 아름다운 휴식의 이미지였던 ‘뒹굴뒹굴’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fun'이 떨어져 나가는 체험을 한 시간이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지난 시간을 복기하자면, 오전엔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7장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구 의학에서 죽음은 신체 기능의 정지입니다. 신체는 신체기관들로 이루어져 있고, 기관들은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포들이 생명의 정수입니다. 신체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세포는 에너지원과 노폐물 제거가 필요합니다. 에너지의 적절한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몸은 병들고 죽습니다. 서구 과학에 있어 생명은 이 에너지에 기초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현대 의학은 이제 생명에 필요한 거의 모든 인체 기관에 대한 치료가 가능해졌습니다. 인공 기관을 쓰거나 기관 이식을 하기도 합니다. 신체 이식을 위해서는 살아있는 장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호흡이 멈추거나 심장이 뛰지 않는 상태를 죽음으로 이해했지만, 지금은 심장이 뛰어도, 즉 장기가 살아 있어도 뇌가 죽으면 ‘뇌사’라는 이름을 붙여 죽은 상태로 취급합니다. 뇌사 상태인 경우 신체를 기증할 수 있게 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 개선, 생명 연장을 위해 ‘죽음’의 정의도 바뀐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습니다. 뇌사를 개인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했었는데, 제 생각의 바탕에는 ‘의식’=개인의 고유성, 존엄성이라는 전제가 있었던 거디었더라구요.
불교에서는 신체 특정 부분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으며 사람의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죽음은 생명과 더불어 이해되어야만 하며 생명의 기반은 ‘의식’입니다. 몸이 의식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면 죽음이 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우리는 죽음에 대한 복잡한 마음만 나누었습니다. 최근 신림역과 백화점에서 불특정 다수를 공격해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든 죽을 수 있다는 불안과, 이런 불안이 일상적인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황을 우리가 만들었다는, 정부의 대책은 왜 이렇게 졸속이며 불안과 공포를 더 심화시키냐는 등등.
양원적 정신이라는 미로를 헤매며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부쳐준 전과 정성스러운 반찬들을 맛있게 먹었는데도, 뭔가 허전하네요. 기웅샘의 커피가 빠졌군요. 배달까지 완료한 후에야 휴식을 취하던 기웅샘의 커피를 담 시간에는 맛볼 수 있기를. 오후엔 의식의 기원 4,5,6장 양원적 정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윤순샘이 저 같은 사람도 알아듣기 쉽도록 발제를 잘해왔지만, 여전히 저는 큰 줄기를 못 잡고 헤매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양원정신이라는 것을 가져와서 의식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양원정신’, ‘신의 목소리’라는 단어에 걸려 앞으로 나가질 못하네요. 저자도 말했듯이 양원적 정신이라니 도대체 그런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이며 신들은 왜 있는 것인지(178) 당최 모르겠네요. 그래도 윤순샘의 발제와 여러 학우들의 친절한 설명에 의지해 제가 이해한 바를 풀어보겠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사변적(178)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말한 바에 따라 도출되는 자명한 결론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따라가려면 그의 공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저자가 앞에서 주장한 바(의식은 언어에 근거를 둔 것이다)를 받아들이고 논리를 따라가면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의식이 없는 문명’이라는 것이 상상이 잘 되지 않아 책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고 판단하고 추리하고 문제를 푸는 등 우리가 하는 일을 대부분 수행하면서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인종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면서(80), 의식이 없는 어떤 문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면 이하의 논의는 설득력도 없고 모순적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 의식이 없다는 것과 같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수학의 세계가 사물들의 질량의 세계와 비슷한 것처럼 의식이란 것이 행동의 세계와 비슷하며, 언어에 근거를 둔 유사 세계의 창조라고 했습니다.(105) 의식이 언어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의식은 언어 이후에 나타난 것(105)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언어 이전에는 의식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는 의식의 기원으로 양원적 정신을 가정했고, 이 양원적 정신을 가능하게 한 것이 언어의 진화였다고 주장합니다. 의식은 이 양원적 정신이 변형되면서 인간에게 남겨진 것입니다. 한때는 인간의 본성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 부분은 신으로 불리는 집행부고, 다른 부분은 인간으로 불리는 실행부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뇌의 한 반구에만 관여하고 다른 반구는 신의 언어를 위해 남게 되었는데 신의 목소리가 이 두 반구를 연결하는 경로를 따라 인간에게 명령하고 그 명령은 곧 인간 자신의 의지이기에 인간은 그 명령에 순응하여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의 뇌가 신의 목소리 대신 의식이라는 새로운 구조를 갖게 된 것은 자연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뇌의 가소성(유연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뇌는 놀라울 만큼 충분한 여분의 신경원을 가지고 있어 부상이나 선천적 장애로 결손된 구조들을 상당한 정도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는 신경계는 손상되지 않은 조직을 사용하여 통상적으로는 따르지 않는 발달 경로를 따라 장애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만, 발달의 초기에만 다중 통제 체계의 재조직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미 신경원의 조직화가 이루어진 시점에서는 늦어버린 거죠. 이렇게 보자면, 양원적 시대에 양원성이 발달의 초기 단계에서 억제되면 그 영역이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현재 의식의 신경적 구성이 어떠하든지 그것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뇌조직의 기능은 변할 수 있고, 다른 발달 프로그램이 주어지면 다른 조직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음 장부터는 양원적 정신을 문명의 기원으로 보는 증거들을 찾아보겠다고 하는데, 제가 잘 따라가 보기를 바랍니다. 못 따라가면 지난 시간처럼 도와주세요.
대략난감의 와중에도, 헤멤이 그대로 녹아있는 공지와 후기를 올려주긴 호정샘께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의식이라는 우리의 내면 세계를 양원성이라는 개념(분석)으로 볼 때의 효과들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간 적당한 설명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논의의 바깥에 놓여온 현상들이 이야기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간질에 대한 역사적 의미화를 생각해보는 일이 재미있었어요! 어렵지만 두고두고 떠올릴 것 같은 책이네요 ㅎㅎ
대략난감의 와중에도, 헤멤이 그대로 녹아있는 공지와 후기를 올려주긴 호정샘께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의식이라는 우리의 내면 세계를 양원성이라는 개념(분석)으로 볼 때의 효과들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간 적당한 설명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논의의 바깥에 놓여온 현상들이 이야기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간질에 대한 역사적 의미화를 생각해보는 일이 재미있었어요! 어렵지만 두고두고 떠올릴 것 같은 책이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