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벌써 3학기도 절반이 지났습니다. 불교와 함께 의식을 탐구하는 여정은 아직 제게 혼란스럽지만, 주워들은 보따리 짐을 찬찬히 정돈해 써먹을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면 다음 시간(8.23) 공지부터 드리겠습니다!
1)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 1부 ‘불교도의 길’(~63쪽)까지 읽고 옵니다.
2) <의식의 기원> 2권 1~3장을 읽고 옵니다. 발제는 김호정 선생님과 김경아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3) 간식은 저와 이윤지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김경아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죽음의 경험’과 존재론적 전환
의식의 저변으로 여겨져 온 영역인 잠, 꿈, 죽음을 탐구하는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를 다 읽었습니다. 책은, 존경심 넘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불교와 과학의 지혜들이 버무려지면서 생각의 시너지를 일으키는 순간을 담기도 했지만, 그만큼 매듭지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열린 채 남겨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낭송을 마친 저희도, 이 대화에 참여했던 서양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발아되지 않은 많은 물음표를 가진 채 책을 덮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8장의 제목은 ‘임사체험’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죽음에 대해 물으면서, 저희에게는 ‘죽음’이라는 상태를 규정하는 일에서조차 똑뿌러지는 기준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간에는 ‘죽음의 언저리’를 경험한다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과연 어떤 계기, 어떤 가능성, 어떤 변화를 열어줄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에피쿠로스의 말마따나 죽는 순간 죽은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누구도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준하는 체험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순적이지만 그것을 ‘죽음의 경험’이라고 불러보려 합니다.)
근대 문화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가장 피하고 유보해야 할 생의 종결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류학적으로 보면, 존재했던 모든 문화에서는 죽음을 이야기화하고 특정한 가치를 가진 체험으로 의례화해왔습니다. 대부분의 전근대 혹은 원시문화에는 일종의 죽음 체험과도 같은 ‘통과의례’가 존재했습니다. “통과의례는 이전의 존재 방식과 상대되는 것으로서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이해로서의 다시 태어남에 관한 제례 의식입니다.”(262쪽) 이는 단순한 이벤트나 성인식 행사가 아니라, 그 개인의 존재를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정립하는 사건입니다. 입문자는 “정상적인 판단이 분열 또는 파괴되는 등의 변형된 의식 상태”를 경험하거나 “코마에 빠지거나 임사체험 비슷한 것을 겪을 수도 있으며, 이어서 어떤 깨달음과 함께 소생”(262쪽)합니다. 그것은 죽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죽음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경험을 통과한 자들, 이런 죽음의 기억을 몸과 정신에 새긴 자들만이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임사체험을 겪은 이들 중 몇몇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임사체험에서 얻은 깨달음과 관련해 어떤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삶에 대해 더 많은 열정을 가지게 되며, 물질적 삶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며, (...) 영성과 자연에 더 많은 열정을 가지게 되며, 물질적 삶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며, 자신감도 더 많이 생기며 (...)”(287쪽) 그렇다고 합니다. 실제로 ‘죽을 고비’는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지요. 요즘 읽고 있는 <에세>에서 몽테뉴도, 낙마 사고로 기절했던 체험 이후 자신의 가치와 시야가 얼마나 변했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제게 남은 질문은, 왜 모든 ‘죽음의 경험’이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그러니까 왜 어떤 임사체험은 생을 질문케 하고 존재를 일변시키고 그를 보다 명상적이고 영적인 삶으로 이끄는 반면, 우리 생의 수많은 ‘죽을 고비’들은 그런 전환점은커녕 까맣게 잊혀지거나 하나의 무용담으로 남겨지는 걸까요? 교통사고, 암과 같은 큰 질병, 깊은 우울증 등 삶의 위태로운 순간들은 우리에게 이전까지의 삶과 사고를 단절하고 해체하라는 명령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두려워하지만, 수술과 약과 상담은 우리를 복구시키고 안심시켜 이전까지의 삶을 계속 살도록 그 궤도로 돌려보냅니다. 현대의 죽음은, 겁에 질려 도망쳐야 할 낭떠러지이지 통과하여 다른 몸 다른 정신을 가져야만 할 세계로 이어진 터널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사회는 임사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임사는 정말 도처에 많이 놓여 있는데도요.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에필로그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북인도를 거쳐 델리로 돌아가는 도중에 나는 너무나도 선명한 세속적인 삶의 긴장을 목격했다. 파키스탄-인도 국경분쟁으로 촉발된 힌두-이슬람 간의 충돌은 극에 달했다. 서쪽으로는 비극적인 내전을 겪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이 있었으며, 북쪽으로는 중앙 아시아와 여전히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 독립국가들이 있었다. 눈으로 덮인 히말라야산맥 너머에서는 고대 티벳 영토에 대한 중국의 지배가 계속되고 있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금 지구사회의 피부가 지구 그 자체만큼이나 긴장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312쪽)
후쿠시마를 비롯해 전쟁, 경제위기, 기후붕괴 등의 사태들은 지금의 문화와 지금의 생활방식, 경제체제, 욕망의 구조가 일종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최근 터져나오고 있는 칼부림 사태와 같은 사태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임박한 죽음을 체험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자신과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고 외치지 않습니다. 혹은 그 외침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는 누구도 자신 곁을 스쳐가는 죽음의 경험을 반성하고 귀 기울이지 못하는 사태와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의 임사체험-통과의례도 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임사체험-통과의례 없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말합니다. “어떤 점에서 임사체험의 현상은 체험을 해보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임사체험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현상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특별한 형태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311쪽) 죽음을 경험하고 죽음을 존재의 전환점으로 삼기 위해서조차 어떤 훈련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기억과 애도의 훈련일 수도 있고, 반복되어오고 있는 생활 세계의 지평을 애써서(아프게) 바꿔내는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현상이 전부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은 현상학의 효시라고 불립니다. 현상학이라는 말을 몇 번인가 들어보긴 했는데, 이번 강의 때 배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소화한 건 일부지만서도요!). 후설에서 시작한 현상학의 스펙트럼은 다양한데요. 레비나스,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앙리 말디네, 미셸 앙리, 자크 데리다 등이 직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들뢰즈도 그의 용어를 많이 가져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현상학은 20세기 현대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현상학의 목표는,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이 어떻게 통일된 방식으로 나타는가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상’은 플라톤에게는 본질의 껍데기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현상학에서 현상은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의 통일체이자 종합의 산물입니다. 현상이 전부입니다. 현상에 의해 표현되고 재현되는 현상 바깥의 본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지요. 바로 여기가 칸트에서 더 나아가는 지점입니다.
칸트는 감각과 사고를 성립시키는 ‘인식의 조건’을 문제 삼음으로서 현대철학의 시작점으로 평가됩니다. 칸트는 주체의 주관 자체도 사실은 특정 인과율 속에서 종합되는 상관물, 즉 현상임을 밝혀냈죠. 하지만 그렇게 ‘현상’으로서의 인식을 말해 놓고도 칸트는 현상 너머의 ‘물자체’를 말했습니다. 알 수 없는, 그러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원이 있는 것처럼 표현했던 것이죠. 이에 쇼펜하우어는 현상을 표상으로, 그 근원을 의지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후설은 칸트의 발견을 가지고서 칸트의 한계를 넘어갑니다. 인식 주체와 인식의 대상은 애초에 결합되어 있으며 구분될 수 없기에, 물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상이 세계 자체입니다.
후설은, 베르그손과 유사하게도, 어떻게든 주관/대상(실재/관념)의 이원론을 넘어가고자 합니다. 이원론을 넘어간다는 것은 객관세계와 주관세계 중 어느 하나가 더 근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분리하여 무엇이 다른 것에 선행한다는 구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이 중요했던 이유는 그의 시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후설이 살았던 시대는 과학의 시대였습니다. 19세기에 정점을 찍은 근대 과학의 태도는, 물리 화학적으로 작동하는 객관적인 실제 세계가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물질의 운동에서 기원하며 감정, 의식, 정신 같은 주관은 그러한 객관 세계의 반영이자 실재라는 자료에 대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던 것이죠. 후설은 바로 이런 번역 모델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이는 다분히 윤리적인 질문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세계가 이렇다는 앎이 우리의 실존을 어떻게 긍정하게 하는지, 다르게 살아갈 여지를 주는지에 대한 의문이었죠. 후설은 젊은 시절 수학자였고, 수학의 개념을 심리학과 연관시켜 양자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명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는 일찍이 정서를 기하학적 방식으로 탐구하고자 했던 스피노자의 시도와도 비슷한데요. 정신/물질, 주관/객관, 관념/실재로 나누어진 세계를 한 평면 위에 놓고 세계의 존재가 그 둘로 분리불가능한 방식으로 뒤얽혀서 나타남을 밝혀내는 작업이 현상학의 과제였습니다.
사실 ‘의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의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발생을 질문하고 발생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본질과 비본질의 위계(이원론)를 해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상, 그러한 현상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함께 말해야 합니다. 현상학의 중요한 테제는 “모든 의식은 ~에 대한 의식이다”입니다. 이는 ‘지향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는데, 지향성은 아주아주 단순화하면(어렵지만),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즉 대상을 구성해냄에 있어 다른 객체들의 관계와 더불어 종합된다는 의식의 성질이 지향성이죠. 우리가 나무를 볼 때, 사실은 줄기의 앞면과 이파리 몇 개와 실루엣만을 봅니다. 즉 극히 부분적인 것들만을 보는 것이죠. 이런 빈약하고도 실은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 감각정보로부터 우리는 3차원이면서 특정한 의미와 정서를 일으키는 ‘나무’라는 의식을 구성해내는데, 여기에는 이전의 기억과 이미지와 표상들 뿐 아니라 다른 쪽에서 보고 있는 다른 이들의 시선들까지도 개입되고 있습니다. A로부터 B를 의식하는 일에는 C와 D와 E가 함께 밀려들어와 종합됩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마주치는 경험을 생각해봅시다. 사실 그것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사람의 어떤 자세일 뿐이지만, 순간 온갖 표상과 관념과 개념들이 관계 속에서 얽혀 그 대상이 구성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이 현상의 발생입니다. 실제적 존재인 ‘현상’은 ‘지향된 관계들’과 더불어 종합되는 실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상학이 말하는 의식은 타자들의 체험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사태들입니다. 이는 곧 의식의 구성과 객관 세계의 구성이 동시적임을 말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유명한 시가 말해주는 것도, 어떤 것이 바로 그것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지향하고 다른 관계들과 연결시키는 종합작용 때문입니다. 즉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입니다. 의식 작용이 없으면 대상 세계도 그 자체로 실재할 수 없는 것이죠. 누군가는 이를 결국 주관주의가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물론 객관세계의 실체성을 부정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주관주의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객관성보다 먼저 존재하는 주관을 말한다면 이 비판은 틀립니다.
현상학에서 의식을 지향하게 하는 것은 나의 주관이 아닙니다. 나보다 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역사입니다. 의식을 그렇게 지향하게 하는 구체적인 관계들이 배치되어 있는 ‘생활 세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한 구성을 가능케 하는 해석틀인 ‘지평’들도 배치되어 있지요. A가 B로 나타날 때 함께 들어서고 있는 C, D, E의 영역들입니다. 이것들은 한계라기보다는 관계이고, 본질이라기보다는 상호작용입니다. 모든 세계는 객관적으로가 아니라 지평 속에서 주어지며, 그 지평은 이미 다른 지평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실천적인 문제가 제기됩니다. 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지평에서 그것을 출현시키는가의 문제입니다. 꽃이라는 대상을 체험할 때 핵심은 그것의 참이냐 거짓이냐가 아닙니다. 어떤 생활세계와 더불어서, 어떤 문제들과 더불어 그것의 이름을 부르는가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 저것은 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떤 세계를 말해주고 있는가? 후설이 자연과학에서 만족할 수 없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실재론은 그것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사건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물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채운샘께서는 현상학의 개념들을 유식불교와 연결시키면서 아주 풍성하게 설명해주셨는데요. 제가 유식불교를 모르기도 하고, 공지도 길어지고 해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 재미난 연관성과 차이는 윤순샘의 후기에서 확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