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과 유식불교의 인식 메커니즘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 나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나무가 존재한다고 대답하면, 당신은 실재론자입니다. 내(인식 주관)가 보고 있지 않아도 어디엔가 나무가 있겠지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없다고 한다면, 집 주변에 있는 나무들, 뒷산에 있는 나무들, 미국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무엇입니까? 반대로 자신이 보지 않는 한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요. 왜냐하면 내가 죽는다고 나무들이 다 사라지지는 않는 사실은 명확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생각이 다수라 예상됩니다. 하지만 대상에 상관없이 인식 주관이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방점이 찍힌 입장이라면, 당신은 관념론자입니다. 우리는 둘 중 한쪽에 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의 전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고정된 인식 주관(자아)과 인식 객관(대상)이 앞서 존재한다는 가정입니다. 과연 ‘나’라는 고정적인 인식 주관이 있다고 할 수 있나요? 태어났을 때의 나와 쉰이 넘은 지금의 나는 어떤 대상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할까요? 그렇다면 인식객관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나무’는 고정적인 존재일까요?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집 마당에 있던 나무는 그 집이 허물어지고 아파트가 지어질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요. 고정된 영원한 동일성을 문제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의 ‘나’와 ‘나무’를 동시에 특정해서 고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내가 태어났을 때 집 마당에 10살인 대추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 해, 1살이 되었을 나와 11살이 되었을 대추나무가 있었지만, 이 시점의 나와 대추나무가 태어났을 때 나와 대추나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자아든 대상이든 어떤 상태를 특정해 고정할 수 있겠지만, 고정한 순간 다르게 변합니다. 이처럼 고정적인 인식 주관과 대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인식 메커니즘을 알고자 할 때, 어떤 고정된 인식 주관의 입장에서 또는 어떤 고정된 대상인 사물의 입장에서 설명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과학적 사실을 믿습니다. 과학적 증명을 최종 판단 기준으로 두게 되면 실재론, 즉 후자인 대상(사물)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이번 채운샘 강의는 이러한 인식 주관과 대상의 이분법의 한계를 다르게 사유한 후설의 현상학과 불교 학파 중 가장 현상학적(인식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는 유식 불교를 비교하면서 우리의 인식 메커니즘을 이해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후설은 현상학이란 이름으로 어떤 사유를 펼쳤을까요?
후설의 ‘현상학’
후설(1859-1938) 역시 과학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의 시대 모든 학문의 근본은 자연 과학이었습니다. 과학적 성과로 도출된 자연-대상은 객관적 실재로 취급될 소지를 갖습니다. 객관적 실재가 있다는 믿음에 비례해서 객관적 실재를 1차 자료로 삼아 우리의 의식이 구성된다고 생각하던 시대였습니다. 2023년에 사는 우리 역시 이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과학이 무엇일까요? 중립적 과학이 있을 수 있을까요? 복합적 배치의 결과로 출현하는 게 어떤 기술 또는 이론입니다. 태양이 지구를 돌다가(천동설) 지구가 태양을 돌게 되는(지동설)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이 이론들은 시대적 사회적으로 다른 배치에서 출현한 자연법칙 결과로 출현한 이론들일까요?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당연해 보이지만, 객관적 실재를 1차 자료로 삼게 되는 과학적 태도(인식객관에 치우친 태도)는 점검이 필요합니다.
후설이 보기에 이러한 태도(객관적 실재가 있고 의식이 번역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인식 메커니즘)의 한계 지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지식을 알게 된들 그 지식이 우리 자신의 실존에 어떤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작업이 인간의 자유, 실존 이해, 긍정과 어떻게 관계될 수 있을까가 궁금했습니다. 수학자였던 후설은 수학(엄밀하고 논리적인 객관적 믿음, 대상, 실재론)을 심리학(인간의 심리, 마음 작용, 인식 주관, 관념론)으로 해명할 방법이 있는가 또는 심리학을 수학으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 관심은 실재론과 관념론의 이분법(실재론 또는 관념론을 중심으로 설명되는 세계)을 넘어가려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현상’이라고 하면, 플라톤식으로는 본질의 껍데기이지만, 후설에게는 인식 주관(자아)과 인식객관(대상)의 통일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통일체는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요? 후설은 주관과 대상의 이분법을 부정하면서 통일성의 산물인 현상 자체가 세계라고 규정합니다. 후설에게 인식 주체가 개입되지 않는 대상은 없습니다. 이에 따라 세계는 인식주관과 대상이 어떻게 상호종합 되는가(어떤 방식으로 결합되는가)라는 질문을 따라 구성됩니다.
먼저 그는 우리의 두 가지 차원의 인식 태도를 구분합니다. 첫째로 ‘자연학적 태도’는 습관적 태도로서 생물체 진화의 1차적 능력을 우선으로 하는 인식 작용입니다. 어떤 것이 생존에 유용한가를 기준으로 빠르게 선택하게 하는 인식능력이지요. 이 태도에서는 일정한 분별에 의존해 ‘아’와 ‘법’이 실체적으로 생성됩니다. 이렇게 실체적으로 생성된 분별을 세계 자체로 믿어 버리고(소박한 믿음) 이 믿음을 전제로 그냥 살아가는 게 ‘무명’입니다. 이 태도로는 주어진 ‘대상’을 향한 삶만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삶은 ‘고(苦)’를 동반합니다. 이에 후설은 반성적 인식, 즉 떨어져 볼 수 있는 두 번째의 고차원적 사유를 소개합니다. 현상학적 태도지요.
두 번째 ‘현상학적 태도’는 반성적 인식으로 초험적(초월적) 차원의 의식 작용을 말합니다. 자연적 태도를 중단(판단중지-epoche)하는 훈련을 통해 반성적 의식이 드러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이 태도는 판단한다는 의식도 없이 하는 판단, 통찰, 현상학적 환원입니다. 후설은 현상학적 태도로 발견되는 인식과 유사한 유식의 ‘8식’을 ‘선험적 자아’, ‘진아’라 불렀습니다.
후설의 실천적 문제의식은 1차 대전 후 말년에 두 가지 방향으로 확장됩니다. 첫 번째는 타자와 뒤엉킴의 세계에 관한 사유입니다. 이 사유는 장뤽 낭시가 영향을 받아 쓴 <사랑의 공동체>로 이어집니다. 두 번째는 타자를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고, 우치다 다츠루가 쓴 <사랑의 현상학>으로 이어집니다.
앎은 어떻게 구성될까요? 현전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까요? 세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객관적 대상이 있다는 태도(실재론자, 과학적 태도)의 방식과 주관과 상관적 대상이 있다는 태도(현상학자)의 방식입니다. 후자에서는 모두에게 같은 세계는 없습니다. 후설에게 “모든 의식은 ~에 대한 의식입니다.” 의식은 언제나 상관자(지향성)를 가집니다. 그리고 현상학적 방식에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알기 위해 본질 직관이 필요합니다. 본질 직관이란 경험지를 벗어나지 않지만, 경험적 앎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네요. 우리는 대상 전체를 봐서 아는 게 아닙니다. 어떤 대상의 부분을 보고, 알고 있는 다른 부분들을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 무엇인가에 관해 알게 됩니다. 대상에 대한 지향성이란 부분을 바탕으로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종합하는 것 – 의식에 떠올림 - 입니다.(현상학적 환원) 감각 정보에 대상을 향한 지향성이 들어가야 하고, 현상학적 태로란 지향성에 의해 구성된 의식입니다.(감각 정보 자체는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6식이 개입해야 인식이 되지요.)
현상학적 태도를 좀 더 알아봅시다. ‘사건 자체가 뭐다’라는, 즉 그 자체에는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구성되지요. 따라서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동시에 어떻게 나의 삶에 유의미한 게 되는가를 묻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현상학입니다. 이에 따르면 후설의 의식 작용과 더불어 구성되는 대상 세계만 있다는 현상학적 설명은 의식 환원론적인 면이 보입니다. 하지만 의식의 구성과 동시에 객관적 구성 또한 생겨난다는 점에서는 의식 환원론이 될 수 없지요. 주어진 감각 자료들이 세계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건 언제나 부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다관점을 종합하는 작업(대상을 구성하는 방식)이 현상학적 태도입니다. 현상학적 태도에서 타인의 체험(다관점을 종합하는 것)은 초월론적 주관성이자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런 체험을 통해 경험론적 자아를 넘어 초월론적 자아로 갈 수 있습니다.
후설에게는 체험과 무관한 ‘객관적 세계’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구성해 가는 구체적 조건이 있는 ‘생활 세계’가 존재합니다. ‘생활 세계’에서는 자신이 어떤 지평(놓여있는 틀)에 있는지를 아는 것과 자신의 지평에 갇히지 않고 지평을 확장하는 작업이 요구됩니다. 후설의 인식 메커니즘을 따라가다 보면 의식 작용 자체에 실천적 측면을 포함한다는 것이 보입니다. 후설과 유사한 맥락에서 니체는 어떤 해석이 이루어지는 지평이 무엇인가를 묻는 작업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세계가 특정 지평 속에서 주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평을 확장하면서 보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실천적 면이 있지요. 예를 들면 영화<카우>는 암소들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어떤 지평에서 의미화하는가에 따라 이 영화는 다르게 해석되고 의미화됩니다. 암소의 이야기이지만 여성의 지평에서, 생명체의 지평에서, 산업의 지평에서 등등에 따라 그 영화를 해석하면서 우리는 실제로 다른 앎을 구성합니다. 암소 역시 자신에게 다른 객체가 됩니다. 세계의 구성은 지평들을 펼쳐내는 행위와 맞닿습니다.
후설에게 초월적 주관성(자아), 기억(시간, 역사), 식 작용은 주관과 객관에 앞서 존재하는 일원적 무엇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후설에게는 다른 존재가 어떻게 느끼는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지평의 확장)이 자유입니다. 그는 이를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후설에게 실천적 지점은 대상에 대한 지향성 속에서 어떻게 의미화하는 지평을 확장해서 구성할 것인가입니다. 이어서 후설의 인식 메커니즘과 비교할 만한 불교의 유식학파의 인식 메커니즘 강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유식 불교의 ‘식 작용’
유식불교는 인식 메커니즘을 근간으로 세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후설의 현상학과 유사한 지점이 있습니다. 유식에서 식은 전5식, 6식, 7식(말라식), 8식(아뢰아식)으로 구분됩니다. 경험 세계의 작용인 전5식(안,이,비,설,신식)과 6식(의식)에서는 주체인 ‘아’와 대상인 ‘법’이 있지만, 수행자는 명상 수련을 통해 경험 세계가 헛것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본다는 ‘보는 의식(지켜 보는 식)’이 있습니다. 8식(아뢰아식)은 상분과 견분으로 나뉘는데, 견분은 7식이 자신의 식들을 취한 것이 이것으로 나타난 것이고, 상분은 견분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유식불교의 주요 개념 중 식전변(識轉變)은 식 작용이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향(아뢰아식에서 6식으로의 방향)의 작용이고, 훈습(熏習)은 전5식을 종자로 아뢰아식을 형성하는 방향으로의 작용입니다. 유식 불교에서 의식(6식)은 식이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가가 표현된 식이고, 8식은 식의 초월적 차원이자 발생의 근거가 됩니다. 유식은 무의식 속에 자아의식(7식)이 있다고 합니다. 전5식에서 종자를 만들어 8식에 영향을 주는 훈습을 통해 이 식이 6식에서 발현되는(식전변) 윤회가 유식에서의 식 메커니즘입니다. 유식의 3성설(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은 이러한 식 메커니즘에서 일어나는 식의 다른 질들입니다. 경험 세계의 ‘아’와 ‘대상’을 가유라고 하고, ‘아’와 ‘대상’이 가유인 것을 아는 작용이 유식학파의 명상 수행에서 일어납니다. 불교에서 ‘空’은 세계의 본질이지만 경험적 차원에서 알게 되는 지는 아닙니다.
유식 불교의 식 메커니즘에 따른 세계 설명 역시 주관주의처럼 보일 수 있다. 객관에 우선하는 주관(자아)가 있다는 면 –객관을 부정한다는 면 – 에서는 맞습니다. 하지만 유식의 인식 메커니즘이 주관과 객관을 나누지 않는다는 면에서 주관주의라 말할 수 없지요. 유식에서 식은 주관도 객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의 설명들이 유식불교의 식 메커니즘에 대한 채운샘의 강의와 가까이 설명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방대한 체계를 가진 유식불교에 대한 지식이 미천하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후설의 현상학과 불교 유식학파의 인식 메커니즘을 비교해서 유사한 점을 밝히는 작업을 한다고 두 체계가 같다고 할 수는 없지요. 두 체계 간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지요. 서양 철학은 불교 철학에서 말하는 ‘무아’가 아닌 ‘자아’를 전제로 출발한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 철학에서는 자아를 세계로 무한하게 여는 게 궁극적 도달점이 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수행이 공(무아)에 대한 깨달음과 같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아의 확장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아’가 되는 방향이라는 면에서는 두 철학이 같을 수 없습니다. 인식 메커니즘을 중요한 근본으로 세계를 설명한다는 차원에서는 유사해 보이지만, 불교의 ‘자비’라 말할 수 있는 불교의 접근 방식(무아)에서는 현상학과는 큰 차이가 보입니다.
조각나 있던 강의의 기억이 스스슥 합쳐져서 재생되는 듯한 후기네요!
마지막에 서양 철학과 불교철학의 출발점이 각각 '자아'와 '무아'라는 사실이 중요한 포인트 같습니다.
어떻게 자아를 타자로 무한히 여는가 하는 점이 서양 철학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윤리지만,
무아와 연기에 기반한 불교는 자신의 해탈이 다른 존재의 해탈과 연결되어 있기에 자연히 자비라는 윤리가 흘러나오는 것 아닌가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