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3 3학기 6주차 불교+철학 후기
1. 강독 :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 <1장 불교도의 길>
이번 주부터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를 같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1984년 여름 런던에서 있었던 달라이 라마 존자님의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세계가 직면한 절망스러운 상태에서 외적인 평화는 내적인 평화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자비를 강조하십니다. “따뜻한 마음과 인내심으로 타인의 관점을 인정하고 차분하게 의견을 교환한다면 서로 공감할 부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문장 속에 어려운 말은 하나도 없는데 그걸 내 일상의 삶으로 가져오는 것이 힘든 거겠죠. 이래라 저래라 당위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 좀 불편했다는 샘도 있었는데 그럴 줄 아시고 달라이 라마 존자님도 “실현 불가능하고 너무나 뜬구름 잡는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자비로운 마음 밖에는 대안이 없다.”라고 하시네요.^^
불교의 자비는 누군가를 위해 부러 마음을 내야 생기는 그런 도덕심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의 한 부분이고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본성이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공과 연기를 깨닫는다는 것은 욕심이고요 우선 내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마냥 다른 존재들도 나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 “동감”으로부터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키는 디테일한 연습 방법을 제시해주십니다. 탐진치로만 마음을 쓰는데 익숙한 우리에게는 운동의 기본자세를 반복 연습하듯이 자비의 마음을 끌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들이 조금 불편하고 억지스러워 보일 수 있는데, 그만큼 자비의 마음과 다른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탐진치만으로 치닫는 마음을 멈추는데 도움이 될 듯도 합니다. 지관(止觀) 수행 중 멈춤에서 시작하는 지(止)수행입니다.
명상은 흩어진 마음을 모아서 마음의 힘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명상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고 수단입니다. 집중 상태의 명료함이 없다면 지혜가 실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 지혜를 위한 준비로서 명상이 필요한 것이죠. 집중 명상으로 번뇌를 누르거나 피할 수는 있으나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무아와 공을 깨닫는 지혜를 통해서만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에 반드시 논리를 통해 대상을 사색적으로 분석하는 분석 명상을 해야 합니다.
“마음의 실체는 오직 비춤과 오직 앎, 그리고 개념 분별 이전의 경험뿐임이 그 본질”(39쪽)이라는 부분이 궁금했는데 뒤에 분량을 슬쩍 뒤적여보니 이 “청명한 빛의 본래적 마음”을 설명하는 게 이 책의 핵심인 듯 보입니다. 저는 비춤이라는 말에서 거울이나 맑은 물처럼 마음은 무언가를 비출 수 있고 그렇게 비춘 것을 인식하는 이 두 가지 마음 작용을 ‘빛남과 앎’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 마음의 실체를 ‘청정한 빛’으로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우리가 배운 것들을 통해서라도 마음 작용을 이해하여 마음의 본질을 사유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2. 세미나 : 『의식의 기원』
<제2권 역사의 증언> ‘1장 신과 무덤과 우상’, ‘2장 문자시대의 양원적 신정정치’
‘양원적 정신’은 이 책의 저자 줄리언 제인스가 만들어낸 생소한 개념으로 이 책의 키워드입니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미국의 하원, 상원의 양당제처럼 좌뇌와 우뇌가 함께 작동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거나 토론하고 이야기할 때 언어 작용을 통제하는 좌뇌가 주도합니다. 그런데 인류는 좌뇌의 주도로만 살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을 양원적 정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양원적 정신에 대비하여 지금은 주관적 정신의 시대이고요. 주관적 정신이란 자기 안에 내면적 공간이 생기면서 내가, 내 의지가 무언가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관적 정신은 저자가 말하는 의식이라는 말로 연결됩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는 개인의 ‘단일한 인격’에 대한 의식이 없습니다. 신체에 대해서도 내 몸이라는 개념보다는 팔, 다리, 장기 들이 각자의 부분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를 때렸어도 내가 때린 게 아니고, 내 팔이 때린 겁니다. 왜 때렸냐고 묻는다면 신이 그랬다고 답할 겁니다. 우리에겐 황당한 핑계로 들리지만, 그들에게는 신의 목소리와 행위 사이에 간극이 없었습니다. 따르거나 안 따를 수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체와 정신이 작동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외부적인 힘, 즉 신의 뜻입니다. 그 신은 유일신과 같은 저 너머의 초월적 신이 아니라 자기 안의 환각으로서의 목소리입니다. 갑자기 어떤 느낌이나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당연히 자기의 판단이나 의지라고 생각하듯이, 그 시절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는 자기 안의 목소리인 신의 뜻이었다는 거죠. 이 신의 목소리가 작동했던 곳이 우뇌이고 그것이 좌뇌로 바로 전달되어서 그들의 생각과 행동 사이에는 간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양원적 시대의 “신속히 행동하여, 너의 신을 기쁘시게 하라”는 수메르 속담은 우리의 주관적 정신 구조에서는 “생각을 하지 말라. 양원적 목소리를 듣는 것과 그에 따라 행하는 것 사이에 어떤 시간 간격이 없게 하라”고 번역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고 자연재해와 전쟁, 민족이동과 같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양원적 정신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기 시작했습니다. 환각적 목소리로서 신이 결정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아지고 상황들도 복잡해지면서 사회 통제의 효율성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양원적 정신이 약화되는데 있어서 두 가지 큰 원인은 교역과 문자쓰기입니다. 다른 공동체와 교역으로 자기들과 다른 환각적 목소리에 복종하며 다른 말, 행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접하게 되면서 나와 다른 ‘타자’의 개념이 자리 잡습니다. 나와는 다른 생각, 의견, 망상이 상대의 내면에서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면서, 반사적으로 자기의 내면도 가정하게 됩니다. 의식은 타자, 자아, 내면이라는 개념들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겨난 의식으로 이전의 환각적 목소리의 신이 지배하던 양원적 정신은 점점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신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면서 문자를 통한 지배가 보편화되고 청각적 환각은 쇠퇴하고 시각적 기록 즉 문자의 영향력이 더 커지게 됩니다.
초기문명과 당시 인간은 우리와는 정신구조가 전혀 달랐을 개연성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당시 인간은 우리처럼 의식이 없었기에 그들의 행위에 책임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방대한 수천 년 세월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들은 비난받을 일도 칭찬 들을 일도 없게 되어 있다는 것, 각인은 자신의 신경구조 속에 성스러운 부분을 지니고 있어서 이것을 통해 마치 노예처럼 우리가 의지력(volition)이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하는 목소리 또는 목소리들에서 실제 명령을 받았으며, 그 목소리들은 자신들이 명령한 것에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 이 목소리들은 정교하게 조직된 위계질서상의 타인들의 환각된 목소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 등을 밝히려는 것이다. (274쪽)
신들은 언어진화 과정에서 파생된 한낱 부수효과였고 동시에 호모사피엔스 탄생 이래 삶의 진화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특징이기도 한 가공물이 아니었다. 신이 하나의 허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력이었다. (275쪽)
양원적 정신을 왜 이야기하는지, 이 책에서 말하는 ‘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들이 토론시간에 반복되곤 합니다. 양원적 정신은 나카자와 신이치가 인류학에서 대칭성을 이야기하는 맥락과 비슷해 보입니다. 대칭성은 인류학적으로 나와 타자(나를 구성하는 것들)를 구별하지 않던 시절을 보여주면서 우리처럼 나와 타자를 완벽하게 구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개념입니다. 양원적 시대도 주관적 의식을 당연히 여기는 우리와는 다른 삶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신석기부터 시작하여 사라진 고대 문명들의 문화적, 사회적 흔적들로부터 양원적 정신의 증거들을 인류학 보고서처럼 상세히 제시합니다.
지난 시간에 읽은 부분들에서는 의식을 딱히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기에 오히려 의식 작용이 아닌 것들을 나열하면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코흐의 『의식』이라는 책에서도 의식을 정의하기 어려움에 대해 운을 뗀 후 의식을 ‘상식적 정의’, ‘형태론적 정의’, ‘신경단위적 정의’ 등으로 분류합니다. 그만큼 의식이 무엇인지는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통설인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의식은, 불교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특히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식작용은 아닌 듯합니다. 굳이 매치시켜보자면 자아의식의 토대가 되는 제7식인 말라식과 제6의식을 포함하는 정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식은 자기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성립이 안 되니까요. 그렇다고 자의식이 곧 의식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의식 작용에 대한 논의가 너무 협소해진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주관적 의식 없이도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의식이 생존의 필수는 아니라는 점,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의식을 잉여적인 것(339쪽)이라 표현한 것과 통합니다. 우리도 깨어있는 많은 순간 의식하지 않고도 잘 먹고 잘 걷고 있습니다. 의식이 필요한 순간은 타자를 전제하는 나를 의식할 때입니다. 의식은 자연 중에 가장 나약한 인간종족의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무리의 본성에서 기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이 개별적이고 개인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것이 의식으로 옮겨지는 즉시 무리의 관점으로 해석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입니다. 의식으로 표상되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단순화되고 평균적인 무리적인 기호입니다. 그래서 의식이 강해질수록 무리로서만 살게 되는 것을 니체는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그 무리적 기호가 언어입니다. 줄리언 제인스도 “의식은 모두 언어는 아니지만 언어로 생성되고 언어로 접근된다.”라는 문장으로 책을 시작합니다.
이런 의식이 없던 양원적 시대는 세계와 자아 구분이 없었으며,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 개념 없이 그 행위로 완결되며, 행위에 별도의 의미 부여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충만한 시절이었습니다. 루카치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표현한 이 시절이 우리보다 불행하고 뒤쳐진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시절을 이상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양원적 정신을 통해 주관적 정신의 시대인 지금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 조금이라도 이 시대를 낯설게 보이도록 하는 게 저자의 의도가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의식이 그 자체로 인간의 본질이 아니고 기원을 가졌다는 계보학적 접근으로서의 ‘의식의 기원’이라는 책 제목 자체가 의미심장해집니다. *
아주아주 풍성한 후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이번 학기의 목표인 '의식'의 문제를 지긋하게 질문해 가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되네요!
탁월한 뇌신경학자 코흐도, 줄리언 제인스도, 니체도 의식을 뭐라고 정의하지 않으며 더듬어가고 있음이 보이네요.
저희도 그들의 흔적을 찬찬히 정리하며 따라가보는 것이(어렵지만)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