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 3학기 일곱 번째 시간(8.30) 공지드립니다.
1) 낭송 텍스트 <달라이라마, 명상을 말하다> 9절(~115쪽)까지 읽고 옵니다.
2) 강의가 있는 주입니다(드디어 프로이트네요!). 그래도 <의식의 기원> 2권 4~6장을 차근히 읽어갑니다.
3) 간식은 정혜윤 선생님과 이미영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정은이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달라이라마, 명상을 말하다> 도입
3학기 낭송의 두 번째 텍스트는 <달라이라마, 명상을 말하다>입니다. 이번 주 범위에서는 서문부터 인트로에 해당하는 1부 ‘불교도의 길’을 읽었습니다. 달라이라마의 말씀은 화려하지 않지만 언제나 묵직한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제게 다가온 문장은 존자님 또한 한계를 갖고 계시며 우리와 다르지 않은 마음의 부침을 겪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대응 역시 대단히 특별하지 않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만 잘 매듭짓지 못하는 돌아봄의 훈련이었습니다.
“나는 일개 승려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한계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수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나는 이 생각들을 일상의 삶 속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그러하다. 물론 나 역시 가끔은 실패한다. 가끔은 짜증을 내기도 한다. 때로는 나 역시 심한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할 때, 나는 바로 “아, 이게 아니지”라며 생각을 바꾼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자비와 지혜의 수행을 내 삶 속에서 내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달라이라마, 명상을 말하다>, 25쪽)
몸을 가지고 사는 존재인 한, 마찰을 겪지 않을 방도는 없습니다.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신 달라이라마조차도 가끔은 짜증을 내시는데 저희야 말할 것도 없죠. 차이는 그 빈도 그리고 대처의 능숙함의 정도인 것 같습니다. “아, 이게 아니지”라는 자각과 거기서 생각을 바꿔내는 힘. 어떤 커다란 사건 앞에서도(뉴스를 켜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하죠...) 이렇게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어쩌면 평생의 수련을 통해서도 개발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혜의 수행을 내 삶 속에서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 그런 목표라도 갖는다는 것. 그런 삶의 결은 어떤 빛깔일지 새삼 자문해보게 됩니다.
물론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고도의 논리와 체계를 갖춘 지난한 과정일 수 있지만, 언제나 첫 걸음은 존재합니다. 달라이라마는 그것을 매일매일 해가는 잠깐의 명상이라고 말하빈다. 그렇게 하면 “좋은 것, 나쁜 것 등에 대하여 생각을 달리게 하는 분별심을 쉬게 될 것이다. 잠시 동안의 무분별심이 그동안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휴식을 줄 것이다.”(44쪽) 제가 새기고 싶었던 ‘자기 마음을 아는’ 쉼(止)의 방법을 적어보겠습니다.
1.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생각하지 마라.
2.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마음이 그 자신의 흐름대로 가도록 놓아 준다.
3. 마음의 빛나는 명료함이라는 본질을 관찰한다.
4. 그 본질을 인식하며 한동안 머무른다.
양원적 인간의 몰락
<의식의 기원> 2권 ‘역사의 증언’에서 줄리언 제인스는 문명의 여명기를 훑으며 양원 정신의 흔적을 거침없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의식이 무엇인지는 선명하게 정의되지 않고 있습니다. 1권에서 얼핏 “의식은 어휘적 은유작업”(95쪽)이라고 암시하기만 했을 뿐이죠. 그리고 부제에 나와 있는 힌트는, 의식의 기원은 ‘양원 정신의 붕괴’(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양원 정신의 존재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진화했고 어떻게 쇠락(혹은 자연선택적 소멸)했는지를 밝혀내고자 합니다. 그 자세한 여정은 불교 숙제방에 올라와 있는 호정샘과 경아샘의 발제에 잘 담겨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피라미드나 만리장성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일은 가능할까? 이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면서 제게 남은 질문입니다. 답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인간들에게 그들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강도 높은 노동에 매달리게 하는 유일한 동기는 화폐입니다. 물론 명예나 도덕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동기들도 사람을 움직이지만, 커다란 개인차를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한 가문이나 마을이나 국가 전체를 수십 년간 동원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것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이익 원리에도 안 맞고 기본권을 주장하는 인권 원리에도 안 맞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불가사의한 건축물이 쌓아올려지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정신을 가진 인간이 존재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정신은 분명 다른 목소리를 듣고 다른 의지력을 갖고 있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신-왕의 목소리이며, 뇌신겨경학적으로(우뇌의 영향력으로) 그 목소리를 계속해서 재생하고 수행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양원적 정신이었습니다.
세미나 시간에, 지금의 우리가 양원 인간들과 그렇게 다른가, 하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신들의 목소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목소리-충동들이 존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죠.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가장 큰 차이는 양원 정신의 인간에게는 우리와 같이 개인화되고 독립적인 자기의 관념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타자의 것으로 간주되는’ 목소리-충동의 영향력과 더불어 행위하고 느끼며 세계를 구성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양원 정신을 주관 정신과 구분합니다. 두 정신 사이에는 그가 말하는 의식의 출현이 있지요. 양원 정신의 인간들은 “타인을 기만하거나 타인들의 기만을 서술해 낼 수 없”(219쪽)었고, 그렇기에 어떤 사건 앞에 체념하거나 절망하지도 않고, 자신을 통해 벌어진 일을 책임지거나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피라미드는 대단한 간절함이나 의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거친 노동이 간절해 보였다 해도 그것은 결코 개인의 간절함이 아니라 파라오의 간절함 혹은 신의 간절함이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양원적 정신이 과연 미개하고 덜 진화된 정신이었나 하는 물음입니다. 과거에 존재했다고 해서, 사라졌다고 해서, 우리와 같이 잇속이 분명하지 않다고 해서 미개하다는 판단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만일 그들이 우뇌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에 따른다고 해서 ‘노예적’이라고 한다면, 그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데 자잘한 금전적 이익과 허영심에 자기 존엄을 팔아넘기는 지금의 인간들이 더 노예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주관적 개인적 정신의 출현은 진보가 아니라 특정한 조건들(결코 보편적이지도 올바르지도 않은)과 더불어서 이뤄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질문은, 어떤 계기들과 더불어 양원적 정신에 기반한 문화가 몰락하게 되었는지, 양원적 목소리가 어떻게 안 들리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변동은 급격했다고, 줄리언 제인스는 말합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문자쓰기 문화의 도래와 함께 청각적 능력(우뇌)이 약회되었습니다. 왕 혹은 지배자의 명령을 뇌와 신체에 각인할 필요가 점점 줄었던 것이죠. 또한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배영역이 넓어지고 접경지역이 많아짐에 따라 환각적 통제력이 약화되었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면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자신의 왕-신으로부터 환각을 듣던 존재가 들리는 목소리들이 상충되고,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듣는 존재들을 발견한다고 할 때, 그는 혼란에 빠지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서서히 자기 내부의 주관적인 감각과 경험에 기대 서사를 구성해야 했고 그 기억을 판단과 행위의 동기로 삼아야 했을 것입니다. 곳곳에서 타향의 이야기, 영웅의 이야기인 서사시가 들려오고, 타인을 기만하는 존재들을 마주칩니다. 배반하고, 예상하고, 조절하고, 계산하고, 잇속을 차리는 존재들이 나타납니다. 양원적 정신을 가진 민족과 주관적 정신을 가진 민족이 전쟁을 벌인다고 생각해보면, 전면전의 경우 전자가 유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잉카나 이집트의 성장은 그들의 목숨을 무릅쓰는 대범함에서 나왔겠지요. 하지만, 특정한 지리적 조건에서 이민족의 침투가 많아진다고 할 때, 중앙의 목소리에 따르는 정신의 싸움은 무모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전장에서는 몸을 보존하고 속이고 계략을 짜는 인간들이 승리하기 쉬위지겠죠. 이처럼 복잡 다단한 조건들과 더불어 양원적 정신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슬슬, 어떻게 우리의 주관 정신이라 할만한 것이 태동하는지 시원하게 이야기해주면 좋겠는데, 저자는 더 풍부한 자료들을 제공하느라고 아직 그럴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음이 기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