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 66-115쪽
정해진 분량의 책을 돌아가며 낭송을 하고 난 후, 명상에 관한 내용이니 만큼, 윤지 샘의 지도하에 실제로 짧은 (사마타) 명상을 두 차례에 걸쳐서 해 보았습니다. 티베트어로 명상을 '곰'이라고 한다고 하네요. 이 단어는 '반복해서 어떤 것에 익숙해진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하려고 애쓰기보다 잠깐씩 자주 하여 명상과 친해지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윤회와 열반 속 현상들의 근본 그리고 기반은 근본적인 청명한 빛이다(74쪽). 윤회와 열반의 모든 현상은 이 가장 심오한 의식까지 내려오면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새롭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이며 선천적으로 일어난 가장 심오한 의식 속에서 총체적이고 완벽한 것이다. 모든 것이 이 가장 심오한 의식의 영역과 관점 속에 담겨 있다(68쪽).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에 나왔던 '미세의식', '청정의식'이라는 용어들과 이 책에 나오는 '금강불괴심', '가장 심오한 의식' 등이 어떤 것인가를 토론하다가 언급하게 된 문장들입니다. 윤회의 현상만이 아닌 열반까지도 근본적인 청명한 빛, 가장 심오한 의식의 바탕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열반을 무위법이라고 부르고, 어떤 원인이나 조건에 연루되지 않는 마음이며 의식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조금 상충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윤순 샘이 무위법이라고 말하면서 어떤 상태를 전제하고 설명하려는 순간 유위법이 된다, 그걸 떠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아, 내가 또(?) 열반을 실체화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뇌의 자리가 곧 깨달음의 자리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어도, 여전히 열반에 대해 무균질의 진공 상태에 둘러싸인 광대하고 찬란한 어떤 무엇이라는 그런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또 다시 위 문장은 이번에는 '가장 심오한 의식' 또는 '청명한 빛의 금강심'을 실체화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우리 의식의 심층 저 밑에 절대로 부수어지지 않는 금강 같은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그러나 이는 의식의 실체성을 말한다기 보다는 아마도 실제로 그런 의식 상태 혹은 앎을 경험한, 부처님을 포함한 선지식들이 있어왔다는 의미이고, 그런 바탕에 따라 수행의 차제를 체계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2. 채운 샘 강의
이번 강의는 프로이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관한 이야기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더 궁금했는데, 그런 제 마음을 어찌 아셨는지 딱 그런 방향의 강의를 해 주셨네요. 우선 19세기라는 근대와 탈근대적 관점에서 바라본 프로이트를 말씀해 주시고, 프로이트의 생각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나름대로 요약해 보았으나 어설프고 오류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근대 주체를 해체한 프로이트
서양철학에서 19세기는 근대 주체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프로이트(1856-1939)는 니체(1844-1900), 마르크스(1818-1883)와 함께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 세 사람은 계보학의 방법으로 당대의 우상을 파괴하려는 사상을 펼쳤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어떤 하나의 원인과 결과를 고정적으로 짝지어 놓고 그것 자체를 불변의 것으로 생각할 때, 그 인과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고 묻지 않을 때 그것은 우상이 된다. 계보학은 그 인과의 메커니즘을 묻고 탐구하는 방법이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물신화의 과정을 밝히는데, 이는 저마다 매우 구체적이고 각기 다른 가치를 지니는 상품이 화폐라는 단일하고 절대적인 척도에 의해 그 위계가 매겨지는 것이다. 니체는 이성, 형이상학, 진리라는 우상을 깼다고 얘기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화폐와 같은 역할을 하는 진리는, 그것에 비추어 봤을 때 누군가는 옳고 누군가는 틀린 게 된다. 니체는 중립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진리라는 이데와의 싸움에서 힘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허무는 주체라는 우상은 이 두 가지에 귀결된다. 주체는 진리와 화폐라는 척도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진리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평가받으며, 자신이 하는 작업과 생산, 그리고 관계 맺는 사물에 대해서도 얼마의 가치로 평가된다. 프로이트는 데카르트 이래 단일하고 동일하고 통일되어 있다고 전제되어 왔던 코기토적 주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왜곡과 조작이나 변형을 거쳐서 나타나는 징후, 즉 환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병적 증상으로 표면에 나타난 것으로써 무의식의 존재를 탐구하고자 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세 사람은 근대 주체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관계라는 삶의 조건 속에서 주체가 구성된다는 것을 고찰하였고, 니체는 이성이 우리를 구성하는 다양한 힘 관계들의 복잡한 결과물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성과 주체를 동일시하는 주체적 사유를 허물었다. 프로이트는 의식적 주체가 사실은 그 주체를 형성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의식의 표면 효과라고 말한다. 이들은 모두 드러난 것을 드러난 것으로써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구조를 밝히려 했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에는 모든 철학이 갖는 탈주적이면서도 동시에 반동적인 지점, 절대적 주의로 변모하면서 봉착하게 되는 위험성 또한 내재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주체의 해방을 위한 삶의 조건의 변혁을 위해 다시 의식적 주체를 끌어들이게 되고, 니체주의는 이성이 아닌 힘의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파시즘으로 치닫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데카르트적 주체라고 하는 환자를 만들어내는 무의식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엄마와 아빠라는 가족적 표상에 갇힐 위험성을 깔고 있었다.
불교 또한 자기를 구성하는 인연 조건을 보기 보다 마음의 평온에만 집중하기 쉬운 측면이 있다. 부처님이 자기의 인연 조건에서 어떻게 질문했었는지, 또한 우리의 삶의 조건에서 내 몸과 마음을 그런 방식으로 현상시키는 메커니즘을 같이 보아야 한다.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구별되지 않는다.
프로이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꿈의 해석』은 프로이트의 전기 저작으로, 쓰여진 연대는 1896년이지만 1900년에 발표되었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의식을 의식과 전前의식, 그리고 무의식의 세 층위로 나눈다. 프로이트는 우선 의식이 부분적이라고 얘기한다. 나와 동일시할 만큼 전체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무의식보다 언어로 표상화되어 떠오르는, 분석 가능한 영역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전의식은 언어를 매개로 언제든지 의식화될 수 있는 잠재적인 차원을 말한다. 그는 꿈을 '꿈 작업'이라는 활동으로 여겼는데, 일종의 복잡한 심리적인 무의식의 과정이 어떤 메카니즘 속에서 꿈이라는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이미지를 이야기한 (그 과정에서의 왜곡과 조작을 포함한) 결과를 가지고 다시 분해하는 역방향의 꿈 해석을 시도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데카르트의 주체 철학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19세기 당시의 신경생리학자들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의식을 뇌로 환원하고 과학주의에 입각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당시의 입장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후기의 저작인 『자아와 이드』(1923)에서는 이드, 자아, 초자아의 구도를 바탕으로 어떻게 자아가 형성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저마다의 자극에 따라 끌려가는 의식화되지 않는 수많은 자아들인 이드와, 그것들을 걸러내는 사회 규범과 척도인 초자아의 경계에서 자아는 형성된다. 무의식과 이드의 원리와 의식과 자아를 형성하는 원리는 전혀 다른 원리이다. 일단 형성된 자아는 더이상 무의식의 원리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프로이트에게 의식과 무의식은 주체인 나조차도 모르는 채로 존재하는 것으로 분석의 영역이 되지 못한다. 분석해야 하는 것은 의식화되는 징후들이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올라올 때 왜곡되고 조작되고 대체되어 드러나는 징후들을 통해, 사실은 무엇을 계속 드러내지 않으려고 억압하고 있는가를 거꾸로 추적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는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굉장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들뢰즈는 무의식의 표상 불가능성 그 자체의 혁명성을 강조한다. 프로이트는 언어로 표상될 수 있는 의식화되는 부분에 더 집중함으로써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영역을 사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프로이트는 사회 규범이나 척도 안으로 절대 욱여넣어지지 않는 무의식보다는 언어로 표현되는 것의 권위적 해석에만 천착함으로써 인간을 규정성 안에 가두고자 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한 프로이트주의자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상을 가족적 자본주의의 반동적 사유로 귀결시킨다.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해석하라'는 테제에 반해 '실험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언어로 표상되는 의식적 징후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 오이디푸스화(사회화)하는 것이 프로이트의 방법이라면, 그에 비해 들뢰즈는 자기의 주체적인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멍과도 같은 무의식을 계속 마주하면서, 그것을 규정지으려는 사회의 법을 오작동시키는 방식으로 삶을 실험하는 새로운 용법을 제시하였다.
정말 샘 말대로 저도 잘 모르면서도 열반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미지가 또 발목을 잡게 되는 것 같아요.
니체 맑스 프로이트라는 근대 3인방의 이야기는 정말 흥미로웠죠.
"드러난 것을 드러난 것으로써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구조를 밝히려 했다는 점"이 커다란 위대함인 것 같습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요약될 수 없는 프로이트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을 꼼꼼 세심하게 정리해주셔서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