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8주차(9.6)가 다가오네요! 3학기 불교+의식도 거의 마무리 되어갑니다. 그래서, 저희는 의식의 문제에 좀 가닿게 되었을까요? 마지막 세미나에도 잘 헤매보아야겠습니다.
1) 낭송 텍스트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 3부(~159쪽)까지 읽고 옵니다.
2) 세미나 텍스트 <의식의 기원> 2권 4~6장(300~422쪽)을 읽고 옵니다. 발제는 정혜윤 선생님과 김자영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 <의식의 기원>을 정리하고 질문을 만들어오기로 했었죠!
3) 간식은 최윤순 선생님과 김호정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김자영 선생님께서 써주시겠습니다.
생각을 멈추는 충격 “팓!”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의 3부에서는 ‘가장 심오한 의식’에 대해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이는 ‘근본적인 청명한 빛의 마음’이나 ‘청정한 빛의 금강심’, ‘허공에 가득 찬 금강’, ‘평상심’, ‘스스로 풀림’등 각자 강조하고 싶은 경지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렇다면 달라이 라마께서는 이 마음을 뭐라고 부르기를 선호하실까요? 이 텍스트에서는 주로, ‘가장 심오한 의식’이라 부르시며, 그것은 모든 마음 속에 충만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참깨 속에 기름이 두루 존재하듯 청명한 빛 역시 모든 의식에 두루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아마도 달라이 라마에게는 이 책 전반에 말씀하신 것처럼 중생을 위한 커다란 자비심으로부터 나온 동기가 있으신 듯합니다.
“이 주제를 탐구하는 것은 일상 속의 마음의 흐름을 넘어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우리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 큰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 더 나아가 세상 속에서 평화를 일구어 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주제를 탐구해야 한다.”(69쪽)
가장 심오한 인식에 대한 가르침은 빠뚤 최끼왕뽀 린뽀체의 <핵심을 꿰뚫는 세 개의 열쇠>에 기반하여 펼쳐집니다. 그 게송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광대 무한한 (진리의) 식견을
세 개의 열쇠로 꿰뚫네.
1.
첫째, 그대의 마음을 내려놓는다.
일으키지도, 거둬들이지도 않으며 분별하지도 않는다.
이 모두 내려놓은 몰입의 상태에서,
갑자기 팓pat을 세게 외쳐 의식을 일깨운다.
강렬하고, 격렬하고, 짧게. 에마호!
그 어떤 것도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경이로움, 걸림 없는 꿰뚫음.
걸림 없는 꿰뚫음,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법신의 가장 심오한 의식을 확인한다.
이 (법신의) 실체는 그대 안에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핵심이다.
엉뚱한데 꽂히는 제게 재미있었던 것은 저 “팓”이었습니다. 마음을 쉬게 하고, 분별도 멈추려 해도 사실 다시 흐려지고 흐트러지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때 일어나는 괜한 편안함과 쾌감이 또 다른 방해물이 됩니다. 심어한 의식의 수준은 지복, 명료함, 부분별의 체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 의식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지복, 명료함 그리고 무분별의 경지까지도 피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므로 분별심의 긴장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이에 오염되지도 않는 이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 안에서, 갑자기 팓pat 소리를 강렬하고, 격렬하고, 짧게 외친다. 이를 통해 ‘이것은 이러니저러니’, ‘이것은 이것 같으니 저것 같으니’ 등의 남아 있던 모든 분별심의 동요를 단박에 쳐낸다. 이 갑작스러운 ‘팓’ 소리의 외침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분별심을 몰아낼 것이다.”(85쪽)
팓 소리가 내질러진 순간, 분별심과 분별심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이전 생각들은 사라졌고, 새로운 생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틈. 바로 여기에 경이로움, 명료함, 성성함, 그리고 순전한 앎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궁금했던 것은 그런 순간이 우리 일상에도 일어나고 있는가였습니다. 책에는 마치 대단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어도 그러한 의식을 경험할 수 있을 것처럼 나오는 듯합니다. 저 틈을 인지하고 넓혀갈 수만 있다면 말이죠. 하지만 일상 속에서는 거칠게 요동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조차 아주 어려워 보입니다. 아무런 명상 시도도 하지 않는 자에게 ‘팓’을 외칠 타이밍도 만들어지지 않겠죠. 이미 거친 곳에서는 충격도 별 필요가 없을테니, 관건은 일단 고요해지는 데에 있겠습니다.
프로이트의 탈주와 반동
3학기 네 번째 강의의 주인공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였습니다. 너무나 풍성했던 강의였고 또 너무나 풍성한 은이샘의 강의 후기가 올라와 있으니 꼭 참고해주세요! 저는 그 중에서 아주 작은 포인트만 반복해보고 싶습니다.
푸코는 <프로이트, 니체, 맑스>라는 논문에서 이들이 자신들 영역에서의 계보학을 통해 근대 주체를 넘어갈 길을 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맑스(1818~1883), 니체(1844~1900), 프로이트(1856~1938)는 약간의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근대성을 탐사한 동시에 탈근대적 사유를 열어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우상파괴자였고 계보학자였다는 데 있습니다. 맑스는 상품의 가치라는 물신-우상을, 니체는 언제나 원해지는 대상으로서의 진리-우상을, 프로이트는 주체를 지배하는 의식-우상을 파괴합니다. 그것들은 불변항으로서의 기원으로 여겨지며 언제나 그 출처나 역사가 질문되지 않은 채 척도의 자리에 앉아 다른 것들을 위계화 합니다. 그 자체로는 텅 비어 있으나 모든 가치를 획일화하고 거기에 위계를 부여하는 화폐. 모든 앎의 목적이자 가치로 군림하는 진리. 신체보다는 정신을 비인간보다는 인간을 특권화하고 정상성을 자임하는 인간 의식. 저 삼인방에 의해 화폐, 진리, 의식은 흔들다리에 놓입니다. 그들은 그 우상들의 계보를 되물으면서, 그것들이 원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왔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상품의 가치는 화폐가 아니라 물질 배치와 살아있는 인간의 노동에서 오고, 진리는 일종의 충동 그것도 약자의 충동이며, 의식은 표면에 떠오른 징후이자 하나의 병증입니다.
결과적으로 셋은 근대주체를 해명한 동시에 그 성립 근거를 해체해 버리게 되었습니다. 맑스에게 주체는 물적 토대들로부터 구성되는 것입니다. 니체에게 이성은 감정, 욕망, 충동 등의 힘관계로부터 구성되는 생리 활동입니다. 프로이트에게 의식적 주체는 무의식의 무수히 복잡한 메커니즘의 표면효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체를 구성되는 무엇으로 설명하는 순간, 동시에 위험성이 따릅니다.
맑스의 경우, 주체의 해방은 달라진 삶의 조건에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관건은 억압적 조건을 바꾸는 일입니다. 당연히, 누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에 대한 답은 결국 가장 추진력이 있고 가장 의식화된 주체입니다. 즉 대안적 주체가 요청되는데, 그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당이죠. 근대 부르주아 주체는 노동자 인민 주체로 대체됩니다. 니체의 경우, 이성이 아닌 힘들의 차원이 중요합니다. 도덕을 입법하는 강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의 왜곡된 해석은 ‘이기는 것이 최고다’는 논리로 이어집니다. 즉 파시즘으로 향할 위험이지요. 이로부터 승자의 도덕에 열광하는 전체주의적 주체가 탄생하기도 합니다. 프로이트의 경우, 데카르트적 의식 주체는 환자라고 규정했습니다. 더 근본적이고 깊은 무의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무의식 주체는 자신의 생성적 무의식이 엄마와 아빠라는 표상에 갇혀질 위험에 빠집니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틀에 가두고 환자를 다시 사회로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가장 부르주아적인 가족이 지속됩니다. 가족적 주체로 회귀하는 것이죠.
채운샘은 혁명적 사유는 언제나 혁명적이지는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유가 반동적 욕망과 결합하면, 자신을 정당화하며 사회를 경직되게 하는 독이 됩니다. 맑스, 니체, 프로이트의 사유는 누구의 욕망 누구의 힘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주의’라는 반동적 영토화에 갇힐 수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사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닦고 수양하는 일이, 나와 나의 가족이나 지인의 안녕에 국한되는 것처럼 나타서는 곤란합니다. 가족주의와 결합되는 한 불교 역시도 기복 신앙(언제나 배타성을 전제로 한)으로 전락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세계에서 신음하는 수많은 인간과 비인간들, 괴로움의 고리를 엮고 있는 시스템과 인연 조건을 함께 느끼고 공부하고 싸우는 일이 동반되어야만 불교는 혁명적 사유로 작동할 수 있을 듯합니다.